[247] 제22장. 연승점술관/ 16. 운명(運命)에 대한 개입(介入)

작성일
2020-07-30 05:53
조회
1515

[0247] 제22장. 연승점술관(燕蠅占術館)


 

16. 운명(運命)에 대한 개입(介入)


========================

 

주 낭자가 뜨거운 차를 모두의 잔에 채운 다음에 천천히 말했다.

“스승님께서 제자에게 설명을 해 보라고 하시니까 혹 이치에서 벗어나더라도 바로잡아 주실 것을 믿고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앞으로 정해질 것에는 아직도 변화의 여지(餘地)가 있다는 뜻이기도 해요. 예를 들어서 적과 싸우러 간다고 하면 승패의 7할은 이미 정해졌다고 할 수 있어요. 무공(武功)의 차이는 하루아침에 좁혀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다만 그 중에도 변수(變數)는 있어요. 그것은 대략 3할이에요. 비록 공식적으로는 상대를 이길 가능성이 없더라도, 변수에 의해서 상대가 몸에 이상이 생겨서 마음대로 자신의 무공을 발휘할 수가 없는 경우도 발생할 수가 있겠네요. 만약에 그러한 변수를 미리 알 수가 있다면 싸우러 가거나 아니면 아예 피하는 것이 오히려 현명할 수도 있겠네요. 스승님의 말씀은 세상일을 모두 다 알아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고, 꼭 필요하고 그것이 누군가에게 유익한 도움이 된다고 하면 비로소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의미로 이해했어요.”

이렇게 말을 한 주 낭자가 자신이 바로 이해를 했는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손헌을 바라봤다. 손헌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의를 표했다. 그러자 주 낭자의 말이 이어졌다.

“상인(商人)의 예로 들어볼까요? 이건 언니에게 해 주는 말이기도 해요.”

춘매는 자기를 위한 말이라고 하자 더욱 잘 듣고 이해하려는 듯이 주 낭자에게 몸을 기울였다.

“상인은 물건을 낮은 가격에 구입(購入)해서 높은 가격에 판매(販賣)하는 거예요. 그래서 3냥에 구입한 것을 5냥에 팔고자 하겠지요. 그렇지만 그 물건이 생각보다 원하는 사람이 적다면 4냥에 팔 수도 있고, 그것도 여의치 못하면 그냥 구입한 가격에 넘길 수도 있겠죠. 다만 기본적으로 가격은 정해졌고, 상인들은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뜻대로 될 것인지는 알 수가 없어요. 왜냐면 여기에서도 변수가 존재하거든요. 그러한 변수를 어떻게든 줄이기 위해서 공부하고 궁리하고 경험을 쌓는 것이죠. 그런데 아무리 경험이 쌓인다고 해도 마지막으로 1할에 대해서까지 완벽하게 알 수는 없어요. 이것까지는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죠. 결국은 팔아봐야 아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온갖 기술이 동원되나 여전히 1할의 여지는 남아있거든요. 이러한 것을 스스로 알 수가 없으면 미래를 예측하는 선생을 찾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답을 얻어서 도움을 받게 될 수도 있겠네요. 이러한 경우가 바로 정해질 것에 대한 의미에요.”

춘매가 그 말을 듣고서야 뭔가 이해가 되었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이미 정해진 것을 예측하고 말하는 것은 변수(變數)가 전혀 없기에 1푼어치의 논할 가치도 없으나 그것으로 자기 자랑은 할 수가 있지만, 정해질 것을 예측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으니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말인 거야?”

“이제야 언니가 이해했네. 앞으로는 신기한 것에 괜히 마음을 빼앗기는 헛된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되겠어. 호호~!”

가만히 듣고 있던 우창이 손헌에게 물었다.

“선생님께 여쭙습니다. 팔자를 연구하는 것은 유익한 것입니까?”

그러자 손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라고 한다면 공부할 가치가 없다고 해야 하겠는데 그 말씀은 팔자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 정해질 것이라는 여지가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물론이네. 그것도 5할만 정해져 있다고 봐야 하겠지. 그러니까 많이 연구해서 길을 묻는 이가 있으면 그의 길을 잘 알려주는 것이야말로 학자가 자신의 학문으로 길을 안내해야 할 최선(最善)이 아니겠는가?”

“아니, 타고난 팔자가 겨우 5할만 정해져 있단 말씀입니까? 9할이 아니고요? 이것은 우창도 생각하지 못한 말씀입니다.”

우창이 의아해하면서 손헌의 말을 믿을 수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5할이라면 있으나 마나 한 수치라는 것을 늘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슨 기준으로 방향을 잡아준단 말인가.....

“사람이 팔자대로 사는 건가?”

“대부분은 그렇다고 여깁니다만....”

“맞는 말이네. 대부분은 그렇겠지. 그러나 항상 예외도 있는 법이라네. 그렇다면 그 예외는 누군가에겐 5할이고, 또 누군가에겐 1할이 되겠지?”

“그렇겠습니다.”

“누군가에겐 1할이라면 또 누군가에겐 그 예외가 9할일 수도 있지 않을까? 왜 5할이라고 하는지는 이러한 의미라네.”

“예? 아무리 그래도 예외가 9할이라면 간지를 배워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벌써 잊었나? 내 관법(觀法)에 대해서 말이네.”

“예? 아, 반야심경(般若心經)의 관법이라고 하신 것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잖아도 도대체 그게 무슨 법인지 많이 궁금했습니다.”

“내가 나름 게으르지 않게 배울 만큼 배우고, 궁리할 만큼 궁리하고, 다시 적용을 시켜볼 만큼 적용을 시켜 본 결과 공법(空法)이 최고라는 것을 깨달았다네. 우창은 아직 젊으니까 정법(定法)을 더 배워야 할 테니 때가 덜 되었다고 봐야 하겠군.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고 하는 말은 들어 봤겠지?”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선생님께 그 말씀을 들을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배움이란 언제라도 버릴 때가 되면 버리는 것이라고 이해를 하면 되겠습니까? 오늘 갑자기 학문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원래 학문의 목적은 모든 것을 내려놓기 위한 것이라네. 어리석은 학자는 모으는 것이 학문인 줄로 알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깨달은 다음에는 모두 버리는 것이 본질이라는 것을 저절로 깨닫게 되지. 마치 밥을 먹고 대소변(大小便)을 방출(放出)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네. 버리지 못하면 변비증(便秘症)에 걸려서 마음이 편치 않을 따름이라네. 허허허~!”

“도대체 얼마나 공부를 해야 모두 버릴 때가 올까요?”

“실은 버린다는 말도 틀린 말이라네. 잊는 것이 맞는 말이겠군.”

그러자 춘매가 놀랍다는듯이 말했다.

“아니 할아버지, 죽자고 배워서 잊는다니 무슨 말씀이세요?”

“그건 말이지, 지금은 아무리 설명을 해 줘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니까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볼 날이 올 것이니 서두르지 않아도 때가 되면 저절로 그렇게 된다네. 다만 게으르지만 말게. 그것이 유일한 길이라네. 허허허~!”

그러자 우창이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그렇지만 다시 여쭙겠습니다. 어떤 근거가 있어서 팔자의 작용이 1할도 되고 9할도 되는지 혼란스럽습니다. 운명이 정해진 대로만 산다면 10할이라고 할 것인데, 1할만 적용되는 사람이라면 운명의 해석은 완전히 빗나가게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러한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싶기도 합니다. 그리고 운명대로 살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갈 방법은 있는 것입니까?”

우창은 갈증이 났다. 차를 연거푸 두 잔이나 마셨지만 그래도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적천수(滴天髓)』의 가르침을 통해서 깨달은 바로는 ‘누구나 타고 난 숙명(宿命)은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으로 확고(確固)하게 믿었는데 그러한 철옹성(鐵甕城)이 오늘 손헌을 만나서 균열(均熱)이 생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가슴 속에 맺혀있던 한 덩어리의 의문을 풀어헤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에 대한 답을 듣고자 했다. 손헌도 그 마음을 잘 헤아렸는지 잠시 빛바랜 서첩(書帖)을 뒤적이더니 팔자를 하나 적었다.

247-1


우창의 눈이 저절로 사주의 일간(日干)에 머물렀다. 정유(丁酉)가 술월(戌月)에 태어났다. 갑목(甲木)이 연월간(年月干)모여있지만 지지(地支)의 상황이 전혀 받쳐주지 못하고 있으니 천복지재(天覆地載)를 이루지 못했으므로 일간의 기운은 왕(旺)하다고 보기 어렵겠다. 그렇다면 용신(用神)은 월간(月干)의 갑목(甲木)에 있는 것으로 봐야 하겠고, 용신격은 일약용인격(日弱用印格)으로 보이는 구조였다. 일단 이 정도의 풀이를 한 다음에 손헌의 설명을 기다렸다. 무엇인가 가르침이 있는 자료라는 느낌이 들어서이다.

“자, 간지학을 공부했으니 어디 물어볼까? 이 사주의 균형은 보이시나?”

“아무래도 토금(土金)쪽으로 균형이 치우쳐 보입니다.”

“이 명식의 주인공이 학문은 깊이 연마했겠는가?”

“아무래도 어렵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삶의 모습은 청정(淸淨)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도 쉽다고 말하기 어렵겠습니다.”

“재물의 인연은 부유하다고 하겠는가?”

“그것도 말하기 어렵겠습니다. 그래도 밥은 있다고 할 수 있지 싶습니다. 그 이유는 인성(印星)이 연월(年月)에 있어서 학문을 연마한다면 그 정도는 가능하다고 보는 까닭입니다. 다만 부유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잘 살피셨네. 그렇게 보는 것이 오행의 관법이라고 하겠네. 실로 그 정도로 보는 것도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닐 테니 공부가 깊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풀이로군.”

“아마도 선생님께서 이 자료를 제시하신 것은 우창의 풀이가 실제 상황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함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어서 그 연유를 듣고자 합니다.”

“실로 이 명주(命主)는 과거에 천하제일의 갑부(甲富)라고 해야 할 정도로 엄청난 재부(財富)를 누렸던 사람이라네. 그의 이름은 마운(馬雲:알리바바의 창업자 마윈)이라고 하는데 아마 들어보진 못했을 것이네.”

“비록 들어보지는 못했더라도 선생님이 말씀하시니 그대로 다 믿어도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재물을 쌓아놓을 수도 있는 것인가 싶은 생각에 문득 어리둥절해집니다. 이것은 어떻게 해석을 하는 것인지요?”

“해석이 불가하다네. 해석이 가능하다면 내가 왜 명학(命學)을 접었겠는가.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러한 점을 찾을 수가 없어서 명학으로는 답을 얻을 수가 없다고 판단을 했다네.”

“과연,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까 일리가 있겠습니다. 보통의 부자가 아니라 일국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거부라고 한다면 팔자만으로는 해석할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우창은 이렇게 말하면서 다시 이 팔자에서 재물에 대한 인연을 세세히 살펴봤다. 용신(用神)이 인성(印星)이니 기신(忌神)은 재성(財星)이 된다. 재물의 길흉은 재성의 희용(喜用)으로 보는 것이 자평법의 원칙(原則)이라고 본다면 분명히 이 사람은 재물로 인해서 큰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고 보겠고, 억만금의 재물을 갖고서 산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것임이 틀림없었다. 차라리 손헌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을 하고서 물었다.

“그렇다면 선생님의 견해로는 어떻게 보셨습니까?”

“자, 팔자의 영향력이 1할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해서 공감이 되는가? 어떻게 생각하는가?”

“맞습니다. 이 사주의 구조로 봐서 상상을 초월하는 거부의 사주로 해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어디에서 합당한 답을 찾을 수가 있을까요?”

“이렇게 되면 운명론자들은 다른 곳으로 핑계를 댈 수가 있겠지. 생일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거나, 혹은 조상의 묘터로 인해서 그렇게 발복을 한 것이라고도 하고, 관상(觀相)이 좋아서 그렇다거나 하다못해 수상(手相)까지 동원하게 되는 것이라네. 그러니까 핑계를 찾을 곳은 부지기수(不知其數)라고 봐야겠지.”

“실제로도 그러한 영향이 있을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전하는 말로는 그의 면상(面相)은 빈곤(貧困)하고 고독(孤獨)한 상이었다더군. 그렇지 않아도 관상가(觀相家)들은 그의 면상을 놓고서 연구를 많이 한 모양이지만 학문적인 관점으로는 아무리 봐도 부유한 상으로 보이지는 않았던 모양이네. 만약에 사주가 실제와 다르다고 한다면 그의 모습은 실제일 수밖에 없으니 부유한 상이어야 하지 않겠느냔 말이네. 또 참으로 한날한시에 태어난 사람이라고 하면 사주는 같을 테지만 생긴 모습조차 같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이러한 것을 모두 만족할 수가 있는 학문이 있을까? 열심히 궁리를 했던 학자들이 참으로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고 적어놓은 것을 보니 그들의 고뇌(苦惱)가 느껴지기도 한다네. 허허허~!”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뜻이 이해가 됩니다. 사주팔자를 봐도 겨우 밥이라도 먹으면 다행이라고 하겠고, 그의 면상을 봐도 빈곤과 고독의 모습이라고 하는데도 그가 천하제일의 갑부라고 한다면 술수(術數)에서는 그 해답을 찾을 수가 없을 것이라는 의미이신지요?”

“맞는 말이네. 한 사람의 삶에 대한 모든 것을 팔자에서만 답을 구한다는 것은 아전인수(我田引水)가 되거나 견강부회(牽强附會)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까 어느 것 하나라도 마음을 둘 곳이 없더란 말이네.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학문이 가치가 없다고 하는 생각은 않는다네. 다만 9할의 작용을 하거나, 혹은 1할의 작용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먼저 깨닫고서 지혜롭게 활용한다면 만무일실(萬無一失)이라고 생각된다네.”

우창은 손헌의 통찰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얼마나 깊이 공부하고 사유하여 핵심(核心)을 관통(貫通)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가 없는 경지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혜안이십니다. 이제야 왜 차이를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잘 이해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팔자를 접하면 어떻게 현실과 이론의 사이를 좁혀야 할지는 방법을 찾기가 어렵지 싶습니다. 차리라 포기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원, 그럴 리가 있는가. 극단(極端)을 말하지 않았던가? 극단으로 가게 되면 이러한 일이 생긴다는 것으로만 알아두면 된다네. 그러니까 극단을 벗어난다면 자평법의 뛰어난 능력(能力)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을 정도인 것도 알고 있다네.”

“그렇게 말씀을 해 주시니 또 희망이 보입니다. 무슨 뜻인지 좀 쉽게 설명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실로 마운(馬雲)과 같은 사람이 10만 명 중에 하나라도 되겠는가? 어쩌면 100만 명 중의 하나일 수도 있겠네. 그와 같은 일시(日時)에 태어난 사람이 어찌 그 하나뿐이겠는가? 그런데도 한 사람은 천하의 갑부가 되었으나 그 나머지는 또 어떻게 되었는지 알 바가 없지 않은가? 그 말은 그와 같은 팔자를 타고 난 사람들은 그렇게 빈곤한 삶이라도 면해보고자 애를 쓰면서 살았을 것이라는 이야기지. 그러므로 위아래로 1할만 포기한다면 9할은 모두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해답을 줄 수가 있을 테니 이만한 학문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왠지 적용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걸리기는 합니다. 그러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수용을 해야 할까요?”

“세상에 완벽한 것이 있겠는가?”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까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한 것은 전혀 없을까요?”

“그러한 것이 있다면 아마도 공법(空法)일 것이네.”

“예? 공법이라면 ‘완벽한 것은 없다.’는 이치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렇다네.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으니 이것만은 누구라도 예외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결국 완전한 답을 구한다면 공법에서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아하~! 이제 선생님께서 왜 공법을 의지한다고 하셨는지 이해가 됩니다. 세상의 복잡한 일들은 시시비비(是是非非)가 끊이지 않는데 공법으로 살아간다면 모든 번뇌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겠습니다. 다만 공자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유학자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공법으로 적용하는 것은 타당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궁금합니다.”

우창이 후끈 달아서 답을 구하려고 안달하는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손헌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우창.”

“예, 선생님.”

“아직은 그대의 자루가 차지 않았다네. 어떻게 해야 할까?”

“예? 자루가 차지 않았다는 것은....?”

“더 채워야 한다는 말이지.”

“예? 그러니까, 아직은 더 공부를 쌓으라는 말씀이신지요?”

“물론이네. 허허허~!”

“그러니까 채우기 전에는 비워야 하는 이치를 깨달을 방법이 없다는 뜻입니까? 그것은 관념(觀念)으로 습득할 영역이 아니라는 뜻으로 들립니다만...?”

“옳지, 바로 그 말이네. 공법은 자루가 가득 채워져서 넘치게 될 적에 비로소 인연의 문이 열리는 것이라네. 지금 서두르지 않아도 반드시 그때가 올 것이니 아직은 열심히 겪으면서 수행을 하면 된다네. 그것을 불가(佛家)에서는 점수돈오(漸修頓悟:점차로 수행이 쌓이면 문득 깨닫게 되는 것)라고 말한다더군. 허허허~!”

“그러다가 마무리도 하지 못하고 후회만 남기게 될까 봐서 두려움이 앞섭니다.”

그러자 잠자코 이야기만 듣고 있던 주 낭자가 말했다.

“여태까지 스승님을 곁에서 뵈었습니다만, 오늘처럼 이렇게 말씀해 준 방문자는 없었어요. 그러니까 이미 공법으로 다가갈 자질을 갖췄다고 판단하신 것으로 보여요. 진정으로 사교입선(捨敎入禪:배운 다음에 그것을 버리고 고요해 지는 것)의 뜻을 아신다면, 아직은 가르침을 버릴 때가 아니라는 것으로 보셔도 좋지 싶어요.”

“주 낭자께서 그렇게 말을 해 주시니 위로는 됩니다만, 그래도 기회는 왔을 적에 잡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다가 보니까 마음이 급해집니다.”

“그러시죠? 그래서 스승님께서도 더 기다리라고 말씀하시는거에요. 지금 바로 공법을 알고자 한다면 아마도 반드시 불완전하게 버린 채로 공의 이치를 누리게 될테니 여운이 남는 공의 이치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완전히 텅 비어서 아무런 미련도 의심도 남지 않는 상태가 되기 전에는 접근하면 주화입마(走火入魔)가 될 뿐이거든요. 그래서 화진도 아직은 열심히 공부하고 있답니다. 호호~!”

“그렇다면 언젠가는 그러한 무상(無上)의 이치를 깨닫게 될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물론이죠. 그것을 스승님께서는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고 하셨어요. 여름이 되면 저절로 초목이 무성해지고, 가을이 되면 저절로 들판의 곡식이 여무는 것과 같다고 하셨거든요. 아직은 여름인데 결실을 자꾸 얻겠다고 하면....”

주 낭자의 말을 듣고서야 춘매가 그 뜻을 활연(豁然)히 깨달았다.

“아~! 맞다~! 그 말이었구나. 마치 아기는 엄마의 품에서 즐겁게 자라는 것이 최선이고, 성장을 해서는 선현의 지혜를 배우는 것이 최선이고, 나이가 들어서는 그것을 모두 버리는 것이 해탈이고, 자유가 된다는 이야기인 거지? 그러니까 봄엔 열심히 꽃을 피우고 여름에 무럭무럭 자란다면 가을에는 원하지 않아도 알이 굵은 곡식을 거두게 되어서 겨울에는 들판이 텅 비어도 농부의 집안에서는 웃음이 끊이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단 말이지?”

“와우~! 언니는 역시 대단해. 호호호~!”

“그러니까 들판에 곡식들이 모두 사라져도 그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농부의 곳간에 가득하게 들어있어서 언제라도 꺼내서 밥도 짓고, 떡도 해 먹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거지?”

“맞아~! 축하해. 언니~! 이제 철이 들었어. 호호호~!”

춘매의 이야기를 으면서도 우창은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더구나 이제 공부를 시작한 춘매도 알아들은 뜻을 자신은 왜 이해가 되지 않는지도 답답했다. 그래서 다시 손헌에게 물었다. 확실하게 깨닫게 전에는 물러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우창은 아직도 미진(未盡)함이 있습니다. 오늘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를 어떻게 담아야 하겠습니까?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나았다고 해야 할까 싶기도 합니다. 앞으로 공부를 하면서도 회의심(懷疑心)이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은 두려움이 앞서서 다시 여쭙습니다.”

“아니네, 허허허~!”

우창의 답답함을 이해한다는 듯이 웃음으로 받고는 말을 이었다.

“가령, 온 산천이 초록으로 가득한 곳에서 동물이나 식물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세. 그렇게 세상의 모든 초목이며 동물들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한 노인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네.”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까?”

“그 노인이 뭐라고 중얼거리나 들어보니까, ‘결국은 서리를 맞고 다 죽을 것이라네.’라고 하더라네. 그 말을 듣고서 공부를 하던 사람은 좌절감에 빠져야 하겠는가? 아니면 그렇거나 말거나 오늘 할 공부를 열심히 하고 난 다음에 가을이 깊어갈 즈음에 산천의 초목이 모두 시드는 것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여야 하겠는가? 그리고 만약에 노인의 말을 듣고서 결국은 시들고 말 초목을 연구하면 뭐하겠느냐는 생각으로 공부를 접는 것이 옳겠는가?”

“음....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체험(體驗)이라네.”

“체험이라면 직접 겪어보면서 깨달아야 한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렇다네. 노인이 가을에는 시들게 된다고 하는 말을 미리 듣고 있었다면 아마도 연구를 하는 마음에도 여유가 있을 것이네. 그렇지만 오로지 초목의 연구에서 지고무상(至高無上)의 답이 있을 것으로만 생각하고 일로매진(一路邁進)을 했다가 나중에 텅 비어버리는 경지를 맛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된다면 살아갈 의욕이 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바로 그 말이라네. 가을이 깊어갈 적에 학자의 지식창고는 쌓아놓은 곡식들로 가득하게 될 것이고, 초목의 삶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어졌지만 스스로 마음만은 허허롭게 자유로운 경지에서 노닐게 되겠지.”

“음.... 그러니까.... 아~!”

우창이 비로소 그 뜻을 헤아린 것으로 보이자 손헌이 빙그레 웃었다. 우창이 자신이 생각한 것을 재차 확인했다.

“그러니까 선생님의 말씀은 지금 우창이 자평법을 통해서 인생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을 공부하지만 언젠가는 그러한 것도 모두 쓸모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말씀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순간이 오더라도 이렇게 체험을 한 것은 지식의 곳간에 가득하게 채워져서 춘하추동이 오고 감을 넌지시 바라보면서 여유롭게 미소를 지을 수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신지요?”

우창의 말에 손헌이 웃으면서 말했다.

“바로 그 말이라네. 허허허~!”

“그렇게 소요자재(逍遙自在)를 하다가 우창과 같은 학인이 길을 물으면 공법에 대해서도 한마디 툭 던지면서 지혜의 길을 가는 것이 그만큼 보람이 있겠지만 자칫하다가 신기한 곳으로 잘못 떨어지지 않도록 한마디 건네는 것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고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이제 더 말하지 않아도 되겠네. 이미 그대는 올바른 길로 가고 있으니 전혀 걱정하지 말고 그대로만 정진하게나. 허허허~!”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뭔가?”

“그날 식당에서 우창이 정답을 맞히지 못한 것을 기특하게 여긴 것은 어쩌면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원리를 궁리하려는 것에서 하신 말씀이었습니까?”

“바로 그렇다네. 결과(結果)만 추구(追求)하는 사람과 과정을 유추(類推)하는 사람의 차이라네. 허허허~!”

“......”

우창이 잠시 혼란스러웠던 생각들을 정리하느라고 조용해진 틈을 아무도 깨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나자 우창이 일어나서 손헌에게 큰절을 올렸다. 그것은 스승님께 올리는 예법이었다. 그리고 손헌은 그렇게 하는 우창을 말리지 않고 그대로 절을 받았다. 깨달음에 대한 감사의 표시려니 싶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