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6] 문사철(文史哲)과 시서화(詩書畵)

작성일
2015-09-28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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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6] 문사철(文史哲)과 시서화(詩書畵)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추석은 잘 보내셨는지요? 이번 추석에는 특별히 더 밝은 달이라고 하네요. 18년 만에 뜨는 큰 달이라나...... 달이 없으면 참 심심했겠다는 생각을 문득 해 봤습니다. 하하~

제목을 가을냄새 물씬 나는 놈으로 잡았습니다. 적어도 글을 하는 선비라면 이 정도는 갖춰야 한대서 뭔 소린가.... 하고 생각을 좀 해 보자는 것이지요. 아마도 문(文)은 문학(文學)을 의미하는 것일테니 글공부를 뜻하는 것이겠고, 사(史)는 사학(史學)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봐서 역사(歷史)를 좀 알아야 한다는 뜻이 틀림없을 것같고, 철(哲)은 철학(哲學)을 의미하는 것일테니 지혜롭게 살아갈 공부를 말하는 것이겠거니... 해 봅니다.

시(詩)는 시를 짓거나 읊어보라는 말일게고, 서(書)는 글을 쓰라는 뜻이겠거니 해 봅니다. 그리고 화(畵)는 그림을 그리라는 말이겠네요. 그래서 이러한 것들을 누리려면 문사철을 잘 해야 한다는 의미로도 들립니다. 조금 더 풀어헤쳐 보겠습니다. 말이 될랑가....

 

1. 문사철은 이성(理性)을 연마하는 것이 목적이다.


글을 배우는 것은 그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자를 알아야만 지식창고에 접근을 할 수가 있는 까닭이라고 하겠습니다. 문자를 모르면 그야말로 눈이 발바닥과 같아서 아무리 기가 막힌 내용을 적어놨더라도 그냥 검은콩일 뿐이니까요. 심지어 보물이 묻혀있는 곳을 적어 놨더라도 읽을 수가 없으면 종이에 낙서를 한 것에 불과한 것이니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가장 먼저 갖춰야 할 것이 문자의 해독력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하나의 문자를 제대로 해독하는 것도 중요하겠습니다만 둘 셋의 문자구조를 받아들일 수가 있다면 지식창고의 열쇠는 더욱 늘어난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한글을 배우겠습니다만 영어든 일어든 추가로 자꾸만 더 배우려고 하는 것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겠습니다. 물론 그 목적이 취직을 위한 것이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글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인생의 절반을 글을 깨우치는데 투자하는 것도 일리가 있겠습니다.

어느 집에 가 본 기억이 납니다. 정말로 멋진 집에 비싼 가구와 장식물들로 꾸며진 집이었는데 왜 이렇게 허전한가.... 싶었습니다. 후에 생각해 보니까 책이 딱 한 권 있었던 것입니다. 그 책이 뭔지 벗님은 아실랑가요? 주부생활 12월호입니다. 왠지 아시겠지요? 정말 책을 징글징글하게 읽지 않는 가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주부생활 12월호일까요? 맞춰보세요. 맞춰도 상품은 없습니다. 하하~ 그 순간, 그 화려한 물건들은 모두 빛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물론 그 반대도 있습니다.

또 언젠가는 허름한 집에 찾아갔더니 문만 빼놓고 사방에 책들로 가득한데 앉을 자리도 좁아서 책들을 밀쳐놓고서야 겨우 엉덩이를 붙일 수가 있었습니다만, 그 집이 전혀 누추해 보이지 않을 뿐더러 멋진 궁전처럼 보여서 흐뭇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해 보면 문(文)의 의미는 문자라는 것을 알 수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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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文)이라고 하면 문학(文學)이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데, 문학이라고 하면 왜 소설이 떠오를까요? 소설을 읽는 것이 문학이라서일까요? 이것은 아마도 오해의 소지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자를 배운다는 것이 문학이라면 소설이든 경전이든 모두가 같은 것이라고 생각을 해 봅니다. 다만 글을 배우기 위해서 소설과 같은 것도 공부한다는 의미로 생각하는 것은 그만이지만 혹여라도 선입견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소설은 소설(小說)입니다. 왜 그럴까요? 작은 이야기라니 말이지요. 소설의 의미를 생각해 보셨나요? 소설이 있다는 것은 반드시 대설(大說)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렇다면 대설은 또 뭔가요? 아니, 그런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고요? 그렇기는 하네요. 낭월도 지금 막 떠오른 것이니까요. 뭐 그래도 생각을 해 보는 것이야 뭐가 어렵겠어요. 왜 소설이라고 했느냔 것이지요.

원래 소설이라는 뜻은 '좁쌀같은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랍니다. 좁쌀이 얼마나 잘잘한 것인지는 아시지요? 오죽하면 조바심이라고 했겠어요. 조바심은 좁살을 타작하는 일이라는 것을 최근에서야 알았네요.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를 찾다가 알게 되었는데 한자의 마음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서 허탈하게 웃었습니다. 심이 그 심(心)이 아니었던 겁니다. 모르면 용감하다고 하더니만 당연하려니~~ 했던 것에서 뒤통수를 한 방 맞았습니다.

그럼 왜 좁쌀같은 이야기인가? 그건 골목에서 전해지는 잡다한 이야기들이라는 의미가 또 포함되어 있습니다. 문자로는 가담항어(街談巷語)라고 하네요. 거리에서 오가는 이야기나 골목에서 나누는 이야기라는 의미로군요. 그러한 것을 주워모아서 책으로 만든 것들을 일러서 잔총소어(殘叢小語)라고 분류를 했던 모양이고, 여기에서 소어(小語)가 변해서 소설(小說)이 된 것으로 미뤄서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습니다.

묘하게도 대하소설이라고 하면 엄청나게 큰 작은 이야기가 되어버리나요? 역사소설은요? 역사의 작은 이야기인가요? 당연하게 사용하는 호칭도 의미를 뜯어보면 또 다른 맛이 나오기도 하는 경우가 참 적지 않습니다. 여하튼 소설이든 대설이든 글을 많이 읽고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 대설이 뭐냐고요? 그야 낭월도 모르지요. 궁금하시면 검색해 보시던가요. 하하하~

낭월에게 묻습니다. 넌 문학을 익혔느냐? 그러니깐요. 늘 공부는 하고 싶은데 이것이 마음만이고 허둥대느라고 제대로 못했습니다. 겨우 한글과 한문 조금 익히고 있으니 그 나머지는 모두가 발바닥입니다. 그나마도 구글링이 있어서 영어에 대해서는 발바닥보다는 발가락...? 우습네요.  배워아야 할 것은 많은데 제대로 하는 것은 얼마 없고, 심지어는 우리말의 뜻도 온통 모르는 것 투성이이니 다른 것이야 말해서 뭘 하겠느냔 말이지요. 그래도 매일 문자를 접하긴 합니다. 그러니까 어제보다 눈꼽찌꼽만큼은 진화를 했으려니... 할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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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史)는 역사를 말하는 것이 틀림 없겠습니다. 책을 보면 사서(史書)가 참 많기도 하잖아요? 역사, 문학사, 철학사, 과학사, 전쟁사 등등 뭐든 학(學)자 뒤에 사만 붙으면 됩니다. 그리고 그 책이 갖고 있는 내용은 그 분야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라는 틀림없는 사실이겠습니다. 어느 분야든 역사는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공부를 하지 않으면 과거를 모르는 것이 되고, 과거를 배우지 않고서는 미래를 유추할 수가 없으니, 그것을 문자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고 했으니 그 말을 한 이는 공자님이라네요.

옛것을 배우는 것이 역사이고, 그것만이 남아있는 유일한 자료이니까 그럴만도 했겠습니다. 물론 그것만 배우고 말면 묵은 보따리를 들여다 본 것에 불과하겠네요. 새로운 것을 알아야 한다는 뒷 구절이 살아서 팔팔 뛰는 공자님의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어떤 책을 보면 좋겠느냐고 낭월에게 물으면 사마천의 《사기》를 짐짓 권해 보곤 합니다. 온갖 인생들의 군상이 그 안에 다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말이지요. 특히 열전(列傳)이 제격입니다. 본기나 세가는 보면 좋지만 안 봐도 괜찮으니까 사기열전이라도 보면 좋다고 권합니다. 물론 재미도 있고 말이지요.

그런데 문사철을 생각하다가 보니까 역사에 대한 책을 보는 것이 지성인이 갖춰야 할 항목이었다는 것을 알겠네요. 역사를 드라마로 만들면 사극이 되나요? 나름대로 꾸준한 시청률을 얻고 있는 분야 중의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역사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미 지나간 이야기인데 말이지요. 그것이 참 묘합니다. 왜냐하면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고인들이 말을 했으니까요. 지구가 돌고, 태양이 돌고, 우주가 돌아서 그럴까요? 그래서 역사도 돌고 돌고 도는 것인가 싶기도 합니다.

또 낭월에게 묻습니다. 넌 역사는 좀 알고 있느냐? 알긴 뭘 알아요. 겨우 중국의 역사책을 쪼매 읽어봤을 뿐이고, 박가의 역사도 혁거세 할배 무덤에 가서 절 하고, 밀성대군 비석에 절한 것 말고는 별로 아는 것이 없으니 제대로 알지도 못한다는 것이 분명하구먼요. 요즘 공주와 부여에서는 백제문화제를 하고 있습니다만, 또한 역사공부이니 언제 시간을 내어서 참여를 해 보긴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문득 일어납니다. 그래도 역사공부가 재미있기는 합니다. 사실 혼자 생각입니다만 소설을 읽는 것보다 역사책을 보는 것이 훠얼씬 더 재미있기는 합니다. 역사는 대설일까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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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哲)은 철학이군요. 젊어서, 그러니까 많이 젊어서..... 대략 20대 중반에 서점에 가서 점원에게 가장 좋은 철학 책을 물었습니다. 음악을 알고 싶으면 레코드 가게에 가서 점원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랬더니 베토벤 9번 고향곡이 제일 좋다고 해서 그걸 사들고 와서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서점에서는 가장 좋은 철학 책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권해주는 책을 한 권 사들고 와서 두어 시간 읽는데 머리가 터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 책의 제목은 《순수이성비판》이었습니다. 참 좋은 책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그렇게 재미없는 책이 또 있을까 싶었습니다. 이런 책을 도대체 왜 그 점원은 권했던 것일까요? 그로부터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서야 그 책이 꽤 괜찮은 책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렇게도 공부의 길에는 만나는 것만이 아니라 교감하는 때도 중요한가 싶습니다.

좋은 것이라고 권해주는 것이 때로는 가장 재미없는 것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좋은 음식은 맛이 쓰고, 좋은 책은 재미가 없는가보다 했습니다. 물론 아직도 정감이 썩 가는 책은 아닙니다. 칸트의 이야기는 낭월의 성향이 아니었던가 봅니다. 그러면 안 보면 됩니다. 선택은 자유이고 읽어야 할 철학서는 무진장이니까 말이지요.

철(哲)은 밝을철입니다. 그러니까 철학이란 밝은 것을 배운다는 뜻인가요? 인생을 밝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풀이를 해도 되지 싶습니다. 밝아지려면 맑아져야 하고, 맑아지려면 고요해야 하고, 고요하려면 집중을 해야 하는데 복잡한 인생살이에서 집중하는 것도 참으로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니 밝아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는 저절로 알겠네요. 물론 밝아지면 그 다음에는 통(通)입니다. 누구나 좋아하는 것이지요.

통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법일통(萬法一通)입니다. 오만 가지의 이치에 모두 통한다는 의미가 되겠네요. 이 글귀는 어디에서 본듯 한가요? 눈썰미 있으십니다. 이것은 짝퉁입니다. 원품은 만법귀일(萬法歸一)이거든요. 이렇게 글자 하나 바꿔놓고 낄낄대는 것도 문자의 즐거움이려니 합니다. 같은 뜻 다른 느낌이라고 하나요? 오늘의 삶이 즐거우십니까? 그러시다면 이미 철학과 가까이 지내시는 겁니다. 지금 이 순간이 고통스러우십니까? 그렇다면 즉시로 철학과 사귀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그 안에서 고통을 없애는 비방을 발견하게 될런지도 모르니까요.

다시 낭월에게 물어 봅니다. 철학에 대해서 뭣 좀 아는 것이 있느냐고? 이것에 대해서는 나름 한두 마디는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명색이 직업이랄 것도 없지만 그래도 운명철학(運命哲學)을 몇 년 연구했으니까 그나마도 면무식(免無識)이라고 하겠습니다. 천만 다행이네요. 그리고 틈틈히 노장입네 공맹입네 하면서 동양의 정신에 대해서도 관심은 놓지 않고 있으니 공부를 하지 않았다고는 못하겠습니다.

이렇게 문사철에 대해서 살펴보니 결국은 공부하라는 이야기로군요. 그리고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거나 문사철은 놓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도 은근슬쩍 해 봅니다. 이렇게 문사철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과 무시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시간이 흐를 수록 점점 간격이 벌어지겠네요. 그러다가는 마침내 소통이 불능한 상황까지 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학문이든 인간이든 서로 만났다가 헤어지곤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문사철로 이성(理性)을 다듬는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성적인 분야를 넓혀가려면 글을 배우고 역사를 알고 철학을 이해하는 것이니까 모두가 머리에 해당하는 영역이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머리가 좋다는 것은 이러한 것을 많이 이해하고 정리하고 활용하는 사람에게 부여하는 칭찬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냥 암기만 잘 하는 것만으로는 머리가 좋다고 하면 안 되는데 이런 말을 너무 남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네요.

 

2. 시서화는 감성(感性)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제 시서화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봅니다. 옛 사람들인들 공부만 하다가 죽고 싶었겠느냐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공부하는 것이 공부를 위한 것일까요? 그렇다면 바로 때려치워야지요. 그런 공부는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삶을, 소중한 자신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하고 즐겁게 살아가기 위해서 하는 공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목적을 갖고서 공부를 하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공부하는 것이려니 합니다.

그렇다면 문사철을 공부하는 이유는 시서화를 즐기기 위해서라는 주장이 나올 법도 하네요. 맞습니다. 바로 그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니까 문사철은 음(陰)의 뿌리가 되고, 시서화는 양(陽)의 꽃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시서화를 즐기느냐는 것이 문제로군요. 여하튼 즐길 수가 있으면 즐겨야지요. 웃어도 하루, 찡그려도 하루거든요. 선택은 온전히 자신의 몫입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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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는 운율을 붙이는 것이니 노래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다들 노래 좋아하시지요? 부르는 것을 좋아하거나 듣는 것을 좋아하거나 모두 시를 즐기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시를 즐기려면 문자를 알아야 하겠네요. 책도 많이 읽어야 하겠고요. 그래야 쟁여놓은 멸치에서 젓국물이 흘러나오듯이 그렇게 깊이있고 풍미로운 맛을 낼 수가 있을테니까 말이지요.

말하는 것도 시입니다. 말을 시처럼 해 보세요. 얼마나 아름답겠어요. 그래서 시처럼 말을 하라고 글을 배우는 것이 아니겠어요? 물론 시가 모두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지요. 때론 강개하고 때론 음울하고, 또 때론 음탕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모두 감성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은 틀림없겠습니다. 벗님은 어떻게 말씀하세요? 자신의 말을 생각해 보면 시를 즐기고 있는 것인지 담 쌓고 있는 것인지 알 수도 있지 싶습니다. 그러려면 천상 자신의 말을 녹음해서 들어봐야 하겠네요. 하하~

어떤 사람의 말은 들어도 들어도 또 더 듣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생기게 됩니다. 이것은 좋은 시인 것이지요. 그 사람은 시인이고, 비록 시집을 내지는 않았더라도 말은 시가 되어서 귓가를 맴돌고 안으로 들어와서는 심장을 후벼팝니다. 그래서 찌릿찌릿하지요. 그런 감동을 느끼기 시작하면 시덥잖은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그냥 흘려버리는 것이지요. 이미 고농도의 마약에 중독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으며 가슴 설레는 일이겠느냔 말이지요.

시(詩)는 말[言]과 진리[土]와 조각[寸]으로 모아서 만들어진 글자입니다. 그러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하면 그것이 시가 되는 것이지요. 토(土)는 도[十]가 드러남을 나타낸다는 것은 아시지요? 그러니까 진리의 조각들을 말로 하면 그것이 시가 된다는 분석이 가능하다고 하겠습니다. 즉 시는 말을 한다는 것이고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고 말을 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라는 것이기도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시(詩)는 말을 하는 방법이 되겠고, 그것을 위해서 글자를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이고 문학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로군요. 그러니까 소설이든 대설이든 많이 읽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어떤가요? 무슨 말을 해도 그럴싸 하지요? 반대로 글을 많이 읽지 않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어떨까요? 아마도 모르긴 해도 재미는 없는 말이 나올 것같은 느낌은 살짝 드네요.

말은 무엇인가요? 마음을 밖으로 전달하는 매개체겠지요. 두 사람이 있을 적에 서로의 생각 속에 들어있는 것을 소통하려면 말 밖에는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그냥 '내맘 알제?'로만 해서는 될 일이 아니니까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왕지사 시(詩)가 말이라면 그냥 언(言)이라고 하면 되었을 걸, 왜 시라고 해서 듣는 사람 부담되고 괜히 주눅들게 만들까요?

그런데 그냥 말[言]은 소리와 같은 것입니다. 글자가 생긴 모양을 보면, 네 개의 음절을 입으로 소래내는 것이잖아요. 그렇지만 그러한 것은 말이라고 하지 않고 소리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소나 말이나 고양이도 입으로 그 정도의 소리는 내니까 말이지요. 그 중에서 뜻이 전달되려면 오랫동안 같이 산 사람이야 가능할지 몰라도 지나가는 사람이 알아듣기는 쉽지않을 것 같지요?

그래서 뒤에다가 진리의 조각[寺]을 붙여놓은 것이겠지요. 소리 속에 진리가 들어있어야만 비로소 그것을 말이라고 하자는 의미로 이해를 해 봅니다. 그래서 시란 말을 잘 하는 것이라고 정리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잘 나타내는 것이 말을 잘 하는 것'이라고 하는 주석이  필요하다면 그것도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소통을 잘 하는 것이니 남들과 더불어서 갈등없이 잘 살아가려면 문사철을 잘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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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書)는 붓[聿]으로 말하기[曰]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람과 대면해서는 시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면 되지만 서로 거리가 멀어서 소리로는 전달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면 글로 전해야 하므로 글을 써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네요. 지금 이렇게 벗님들께 글로 전하는 낭월의 마음이 바로 서(書)가 되는 셈이겠습니다. 시는 형체가 없어서 이내 사라지고 말기 때문에 전달을 해 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전달을 해도 왜곡되기가 십상이지요. 그래서 비교적 소통의 오해가 적은 글로 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는 말하고 아난이 기억했다가 제자들이 글로 적어서 남기면 불경이 됩니다. 말은 시가 되어서 허공을 맴돌고, 글은 문서가 되어서 대대손손 진리를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난리 중에도 고려대장경을 써서 새겼고, 까마득한 옛적에도 말을 남기기 위해서 글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갑골문에 남겨져 있어서 그것을 해독하여 당시의 고인들이 남긴 말을 이해할 수가 있으니 글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하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의미는 시와 크게 다르지 않겠습니다. 간단하게 하면 『말하기와 쓰기』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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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畵)는 그림입니다. 그림은 맨 마지막으로 표현하는 수단이라고 해도 되지 싶습니다. 그렇지만 문자를 모르는 사람에게도 전달을 할 수가 있으니 어쩌면 최초의 전달 방식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시화(詩畵)도 하고, 서화(書畵)도 합니다. 어느 것에나 끼여들어서 표현을 돕고 직관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외국 식당에 가서 메뉴를 읽을 줄은 몰라도 버섯을 그리면 버섯요리가 나오는 것은 그림의 공덕입니다. 물론 잘못 그리면 우산을 얻게 될 수도 있지만 말이지요. 하하~

말을 못하면 글이라도 쓸 줄 알아야 하고, 글도 쓸 줄 모르면 그림이라도 그릴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을 만들어도 되겠습니다. 그런데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 글주변인들 있을 것이며, 글주변이 없는 사람이 그림주변인들 있겠느냐는 생각으로 이어지다가 보면 결국은 문사철을 잘 해야만 말도 잘 하고, 글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린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모양입니다. 벗님은 어떠신지요? 물론 말을 잘 한다는 것은 두서가 있고 이치가 있어야지 황당무계(荒唐無稽)한 횡설수설(橫說竪說)을 말하는 것은 아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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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잘 그리려면 상상을 잘 해야 하고, 상상을 잘 하기 위해서는 머릿속에서 말을 해야 합니다. 이미지를 펜으로 종이에 나타내는 것은 그 사람의 머리 속에 들어있는 것을 손을 통해서 구현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은 그림도 잘 그릴 수가 있는데 상상이 안 되면 그림도 영~ 엉망이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물론 그림이 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글로 나타내면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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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서울의 풍경을 담은 사진이 한 장 있다고 상상해 봅니다. 사진은 그림이지요? 기계와 빛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그 사진을 척 보는 순간에 한국 사람은 대부분 다 압니다. 서울이구나 여름이었나보다, 혹은 밤이었구나 하고 바로 알아보지요. 이것이 바로 그림의 공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림이 아닌 글로 이것을 나타낸다면 어떻게 될까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집이 많다. 억수로 많다. 높은 집도 많이 있다. 강도 있는데 그 위로는 다리가 열 네개나 걸쳐있다. 그리고.. 또... 또....

실제하는 풍경은 사진으로나마 그림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만 실제하지 않는 대상은 천상 그림으로 그리는 수밖에 없겠네요. 그래서 그림도 필요합니다. 《신나는 현공풍수》에 들어있는 삽화들은 낭월의 상상과 미대 출신 화가의 손을 빌린 합작으로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상상이지만 말로 해서는 너무도 복잡하니까 대충 그림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면 전문가는 그것을 구체적인 실물처럼 만들어 내는 능력을 발휘하게 되지요. 몽타쥬를 그린다는 것은 말을 듣고 그림으로 그리는 사람이니까 더 고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 낭월에게 물어 봅니다. 시는, 그러니까 말은 잘 하는가? 뭐 별로... 그럭저럭 무슨 말을 하려는지 상대방이 알아먹을 정도는 된다고 하겠습니다. 절대로 잘하는 말은 아니라고 하네요. 말주변은 없는데 알아먹을 수는 있답니다. 그렇다면 최소한의 목적은 충족한다고 봐서 더 이상의 노력은 하지 않아도 되지 싶습니다. 실은 말을 잘 해 보려고 웅변학원에 가본 적이 있었습니다. 등록을 하기 전에 한 시간 남들이 하는 것을 보라고 해서 지켜보고는 바로 나왔습니다. 낭월이 원하는 것이 그것은 아니었겠다는 것을 바로알아 먹은 것이지요.

다시 낭월에게 물어봅니다. 글은 잘 쓰는가? 뭐 그럭저럭.... 달필은 아니라도 무슨 말을 전달하려는지 정도는 쓴다고 남들이 말해 줍니다. 지금 이렇게 적어놓은 글을 벗님이 읽고 이해가 되셨다면 또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겠습니다. 하하~ 예? 이해가 잘 되지 않으신다고요? 그러니깐요..... 아직도 갈 길이 멀기만 합니다요.

마지막으로 낭월에게 물어봅니다. 그림은 잘 그리는가? 원 천만에요. 그럴리가요. 참으로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이 그림입니다. 그래도 대충 비슷하기는 합니다. 사과를 그리면 배인지는 헷갈려도 감이라고 하지는 않을 정도지요. ㅋㅋㅋ 나머지는 말로 때우고 그것으로 부족한 것은 손짓발짓으로 해결하면 그럭저럭 전달하고 싶은 마음은 전해 질 수가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3. 오늘을 즐겁게 살아야 할 권리가 있다.


결론입니다. 문사철은 재미있고 신나게 살기 위해서 배워야 하는 도구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크게 장만하면 삶도 풍요로울 것이고, 조금 밖에 갖추지 못했다면 삶도 조금은 빈약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들어야 하겠습니다.

항상 방문자와 대화를 나눕니다. 상담이지요. 방문이든 전화이든 의뢰자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바탕으로 철학적인 판단을 해야 하며, 그 판단을 다시 말로 전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살아가다가 보니까 결국 문사철과 시서화는 내 주변에서 늘 쓰이고 있었더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되네요. 대학교의 도서관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추석이 지나고 점점 사색의 계절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올 가을에도 벗님의 정신세계의 농장은 풍요로운 수확을 거두시길 앙망(仰望)합니다. 그리하여 더욱 즐거운 삶이 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낭월의 소망은 이것 하나 뿐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한 소망이기도 합니다. 두서없는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2015년 9월 28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