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목생화(木生火)가 과다하다

작성일
2007-09-10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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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불을 생해주는 경우에 대한 말이다. 여기서는 나무가 과다하게 많아서 불을 생해주는 정도가 지나치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인데, 과연 나무가 지나치게 많으면 불이 살아나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문제로 의문을 갖어보셨는지 모르겠다.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면서 아궁이의 이야기가 등장을 한다. 아궁이란 재래식으로 나무를 이용해서 난방을 하는 방식인데, 아마 이 책을 읽으시는 벗님들 중에서는 구경도 하지 못한 벗님들이 간혹 계실 것이라고 생각이 되어서 간단하게 설명을 해본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벗님은 시골에서 보았을 것이다. 다만 지금은 시골이라고해도 모두 보일러로 기름을 사용하기 때문에 아궁이를 반드시 볼 수가 있다는 말씀은 하기가 어려울 듯 하다.

어린 시절에 연속극을 봐야 하는데, 어머니께서 저녁 밥을 하는데 불좀 때어 달라고 부탁을 하시면 거절을 하고 싶은 마음이 얼른 앞서지만 어른이 시키는데 그럴 수는 없는 일인지라, 투덜투덜 하면서 불을 지핀다. 그런데 마음이 앞선다. 이놈의 밥솥이 얼른 끓어야 방에 들어가서 보다만 연속극을 마져 볼 수가 있겠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궁이가 미어터지라고 나무를 우여 넣는다. 어린 생각에도 나무가 많이 들어가야 불이 활활 타서 빨리 끓게 될 것이라는 계산이 있어서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와 반대이다. 불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그러면 아궁이에다가 대고 화풀이를 한다.




“이놈의 아궁이는 왜 불이 꺼지는거야~!!”




그러면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어디 보자’ 하고는 들이밀던 나무를 끌어내고는 속에 있는 나무들을 호비작호비작 들썩거리면서 뒤적거린다. 그러면 불은 다시 슬슬 살아나서 타오르게 되니까, 아궁이를 보고 욕하던 마음이 민망해지는 것이다. 아마도 어려서 시골생활을 하신 벗님이시라면 이러한 경험이 한 두 번씩은 있으실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이 바로 오행 중에서 목생화이지만 목이 지나치면 불이 꺼진다는 구절인 ‘목다화식(木多火熄)’에 속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오행을 공부하시지 않았지만, 삶의 공부를 통해서 목다화식의 이치를 알고 계셨던가보다. 그래서 삶의 경험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목의 생이 지나치게 많으면 불이 꺼진다는 말을 하게 되는데, 크게 틀리지 않는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비유가 너무 인위적이라고 생각을 할 수도 있을법 하다. 자연상태에서 그러한 상황을 설명할 수가 있다면 더욱 좋겠는데 그러한 모델이 있을지 찾아봐도 냉큼 쉽지가 않다. 자연적인 상황에서 불이라고 하는 구조를 접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산불 정도인데, 산불에서는 목다화식이라는 말이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인위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것 모두가 자연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사람은 자연을 이용할 뿐이라는 것이 가장 정확한 결론이 될 것이다. 무엇이든지 인간 스스로 할 수가 있는 것보다는 자연이 베풀어 주는 것을 이용해서 활용하는 능력이 뛰어난 것이 사람이라고 보자는 것이다. 가령 인간들이 만들어서 사용하는 기구 중에서 인공위성은 그래도 첨단이라고 할만 한 물건이다. 그렇지만 그 물건을 만들기 위해서 소용되는 물질들은 어디서 나왔는가를 생각해보자. 우선 표면은 아무래도 특수금속일 것이다. 그 금속이라는 것은 역시 이 자연이 베풀어 준 것을 이용한 것이다. 변질시키고 가공하는 것도 역시 자연의 힘을 이용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다.

물리학(物理學)이라고 말을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보면 물질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설명을 할 수가 있겠다. 그렇다면 자연상태에서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니 인위적이라고 하는 것도 실은 자연의 본래 모습을 응용한 변화인 셈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자연에 대한 관찰을 한다면 어느것 하나도 자연 아님이 없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목다화식의 또 다른 경우를 생각해보자.




영화 ‘타워링’을 보셨는지 모르겠다. 이 영화를 보면서 목다화식을 생각해볼 구석이 있다는 것은 역시 명리가의 안목이기에 가능하다고 본다. 불길이 마구 솟구치는 빌딩의 모습은 설명을 하지 않다고 될 것이다. 다만 구조작업을 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돌아다니던 소방관들이 어느 사무실 앞에 섰다. 경험이 없는 소방관이 얼른 방문을 잡아당겼다. 속에서 사람들의 아우성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얼른 사람들을 구조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앞뒤를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달궈진 문을 잡아당기는 순간 속에서 불길이 화악~ 내풍겨서 소방관의 얼굴을 덮친다. 자신의 얼굴에 불이 붙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남을 구한다는 것은 둘째 문제이다. 자신의 문제가 더욱 화급하니 말이다. 그러나 경험이 많은 소방관은 다르다. 문을 만져봐서 문이 뜨거우면 이미 불길이 ‘목다화식(木多火熄)’의 상태에 돌입했다고 보는 것이다. 즉 속에서 불들이 죽어가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아궁이에서 죽어가듯이 말이다. 상황은 달라도 이치는 똑같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전원 엎드려”




이 한마디 속에서 지혜를 읽을 수가 있다. 문을 여는 것은 숨이 죽어가는 불들에게 다시 에너지를 공급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있는 것이다. 그리고서 문을 화악 열면서 모두 엎드리거나 잠시 밖으로 피한다. 그러면 화악~ 나오던 불길이 잠시 후에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바로 그 틈을 타고서 모두는 실내로 들어간다.

당연하겠지만, 내부에서는 불길이 타는 도중에 산소공급이 차단됨으로해서 불들이 질식(?)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마당에 다시 문을 열어서 새로운 산소를 공급해 준다면 틀림없이 불들은 되살아 날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아궁이의 사정과 완전히 일치를 하고 있는 이유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을 생각하면서 목다화식, 즉 목이 지나치게 많으면 불이 꺼진다는 말을 이해해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