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생목(水生木)이 과다하다

작성일
2007-09-10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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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나무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본다. 나무는 아시다시피 물이 없이는 하루도 살아가기가 만만하지 않다. 그래서 어떤 경우가 되었던지 간에 물이 결여될 수가 없다는 것은 불문율(不文律)이다. 이렇게 소중한 물이 이번에는 지나치게 많다면 어떻게 되겠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히도 나무는 물에 잠겨서 죽어버릴 것인가? 과연 그렇게 된다면 수생목이라는 말이 창피해서 얼굴을 가리고 쥐구멍으로 도망을 가버릴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자연에서도 나무는 물에 잠기면 죽어버리게 된다. 여름에 논에서 열심히 자라고 있는 벼를 보면서 생각해본다. 벼포기가 물에 담겨 있는 동안에는 그렇게 쑥쑥 잘도 자란다. 그러다가 물이 부족해져서 바닥이 거북이 등이 되면 벼들도 빨갛게 타들어간다. 이러한 때에는 농부의 마음도 타들어 가는 것은 물론이다. 그서 비가 내리라고 기우제도 지내고 급하면 남의 논에 있는 물을 도둑질이라도 해서 내논에 집어 넣어야만 한다.

그렇게 해서 지성이면 감천인지 몰라도 하여튼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농부의 얼굴에는 미소가 솟아오른다. 이제 고민 끝이라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자연은 그렇게 미소만 머금고 있도록 두지를 않는다. 왜냐면 오랬만에 내린 빗줄기는 멈출줄을 모르고 장대처럼 퍼부어 대기 때문이다. 이른바 장마철인 것이다. 아니 장마라는 말로는 오히려 실감이 나지 않는다. 홍수라고 해야 더 어울릴 것이다.

도랑을 흐르던 물은 점차 불어나면서 논으로 차오른다. 처음에는 논두렁의 의미가 약간은 있기도 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논두렁의 경계는 별다른 의미가 없어진다. 오로지 넓고 넓은 물의 벌판만이 있을 뿐이다. 이때는 오히려 호수라고 해야 더 실감이 날 것이다. 그렇게 넓은 논은 불과 3~4일 내에 물 속으로 잠기고 만다. 이렇게 되면 잠시 미소를 머금었던 농부는 다시 수심으로 돌아선다. 가뭄이야 종구락으로라도 물을 퍼다 부어볼 수가 있지만, 이렇게 온 들판이 황톳물로 넘칠때에는 어떻게 해볼 방법도 없다. 그냥 삽자루를 들고서 망연하게 바라다 보고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장면을 보면서도 철없는 아이들은 그렇게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벼들이 물을 실컷 먹고 잘 자라겠네.”




라고 말이다. 그러나 농부들은 그 말이 얼마나 철없는 어린애의 말인지를 안다. 이제 바로 물이 빠지지 않는다면 머지않아서 아마도 벼들은 죽어버릴 것이라는 것에 걱정이 되어서 밤에 잠도 오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장면을 고려해서 서대승님께서 마련해 둔 말이 바로 지금 설명하고 있는 항목에 있는 ‘수다목표(水多木漂)’인 것이다. 물이 지나치게 많아서 나무가 표류를 하듯이 그렇게 떠 다니는 경우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심란한 경우가 되면 물을 빼기 위해서 온갖 노력이 총동원된다. 그럼 오행의 원리로 따져서 토극수를 하니까 토를 가지고서 물을 빼내면 될까? 과연 물이 범람을 했는데, 토를 퍼부으면 물이 줄어들까? 아마도 이렇게 멍청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행의 원리라고 해서 이렇게 적용을 시키다가는 그나마 조금 남는 희망을 송두리채 빼앗아갈 것이 분명하다.

물론 이러한 경우에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서대승님은 마련해 두었다. 물이 지나치게 강할 적에는 수문을 확장시켜라 하는 것으로 말이다. 토극수라고 하는 것은 밀가루 반죽이 질어졌을 적에 뿌리는 밀가루의 경우에 해당하는 말이다. 그렇지만 밀가루 반죽에서도 약간의 물기가 많을 적에나 밀가루를 뿌리는 것이지 물을 덜퍽 부었다면 이때는 밀가루 만으로 해결을 하기에는 무리이다. 밀가루를 마냥 넣었다가는 누가 그 많은 칼국수를 먹겠느냐는 것이다. 밀가루만으로 해결을 하기에는 늦었다고 한다면 그릇을 기울여서 물을 따라내는 것이 상책이다. 이것이 바로 너무 강한 물은 수문을 만들어서 흘려보내는 것이 처방이라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했는데도 반죽이 질다면 도리없이 수제비를 만들 연구를 해야 한다. 반드시 칼국수를 만들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안목이 부족한 요리사이다. 수제비는 반죽이 약간 질척해야 맛이 있는 것이다. 메뉴는 변경되었지만, 적절하게 응급처치를 한 셈이다. 그런데 수제비로 만들기에도 그 정도가 지나쳤다면 어떻게 할것인가? 하고 묻는다면 천상 풀이나 끌여서 겨울이 오기전에 문을 바르는데 쓰라고 하는 수밖에 없겠다. 이렇게 풀로 만드는 것도 오행의 이치에 ‘수다토류(水多土流)라는 멍언으로 분명하게 설명되어져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것이 오행의 이치이다. 그냥 단순하게 토극수요, 수생목이 아닌 것이다. 오행의 이치를 약간 배웠다고 해서 아무곳에다가나 적용을 시키면 참으로 철없는 학자일 뿐이다. 그러면 또 ‘물에 잠기면 모든 나무는 죽어버린다’고 고집을 부릴 것인가 하고 묻는다면 뭐라도 대답을 할 것인지를 다시 생각해보자.




* 수생목의 과다에서도 사는 경우가 있다




수생목이 지나치면 목이 죽어버린다고 말을 했으니 이제 그 이야기는 틀림이 없을 것이라고 마음을 굳혀버린 벗님이 계신다면 또 한수 느린 사고방식이라고 말을 해줘야만 낭월이가 욕을 먹지 않게 되니 참으로 복잡하기 짝이 없는 것이 오행의 변화인가보다.

벼나 보리처럼 애초에 물이 적절하게 필요하기를 바라는 초목은 물이 넘치면 곤란하다. 그리고 이것을 일러서 명리학에서는 ‘오행(五行)의 상리(常理)’라고 부른다. 좀 어려운 이야기를 사용한다면 ‘정격(正格)’이라는 말로 대신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정격의 이론을 적용시켜야 하는 경우는 모든 사주를 통털어서 약 90% 이상이다. 그러나 일부의 학자는 정격만 주장하고 다른 상황은 무시를 해야 한다고 하는 의견도 있는가 보다. 그러한 학자들도 나름대로 안목이 있기는 하겠지만, 물속에서도 살아가는 식물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하실런지가 궁금하다. 미역이나 다시마 등은 과연 물속에서만 살아가는데 무슨 오행의 이치로써 대입을 해서 설명하게 될 것인가를 묻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는 반드시 ‘외격(外格)’이라는 사주용어를 대입해서 설명하게 될 때만 합리적인 이치가 된다. 그리고 ‘오행의 편리(偏理)’에 속한다고도 말할 수가 있겠다. 이렇게 물이 너무나 지나치게 많은 사주에 속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한 경우에는 물을 거부하고 다른 방법으로 중화(中和)를 이루려고 해도 묘안이 없으므로 천상 죽어버려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렇지만 자연의 묘리는 언제나 그 나름대로의 정법(定法)이 있기 마련이다.

이렇게 아예 물 속에 들어앉아 있는 식물에 대해서는 물속에서 나오면 오히려 죽어버리는 것으로 답을 삼는 것이다. 물로만 이뤄진 사주는 땅을 보면 죽어버리는 것으로 정해놓고 있다. 이것이 자평명리학의 탁월한 안목이 되는 것이니 이러한 이치에 대해서 두루 통하지 않고서는 감히 사람의 운명을 감정한다고 나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물속에 들어있는 식물인지, 땅위의 식물인지는 어떻게 구분을 할 것인가를 묻는다면, 나중에 배우게 된다고 뒤로 미루는데, 다만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이치라는 점은 분명히 강조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