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금이 수를 만나면 철학가이다

작성일
2007-09-10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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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깊고 깊은 철학자가 드디어 자신이 깨달은 것에 대해서 장광설(長廣舌)을 토하기 시작하면, 그의 이야기는 어디에도 막힘이 없다. 막힘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깊은 사유와 명상을 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한 결과를 내어 놓는 것이기 때문에, 천년을 두고서도 아무도 범접을 하지 못할 깊은 내면의 세계가 전개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금이 물을 만났을 경우라고 생각을 해본다.

공자님의 깊은 사유를 생각해본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면 또 고치고, 그렇게 수정을 해가면서 세월을 먹으면서 익어간다. 천성이 압축을 시키는 성분이다. 다지고 또 다진다. 그렇게 다지다 보면 그 속에서 정(精)이 나온다. 원래 누르고 다지면 뭔가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혁명은 그렇게 억압을 받는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억압을 떨치고 일어났을 때에는 아무도 막지 못한다. 이와 같이 압축이 될대로 된 금에서 나온 물은 아무도 막을 수가 없다. 바위에서 나오는 물을 한번 막아보라. 그 방법은 많이 있겠지만, 참으로 물길을 막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이내 알게 될 것이다.

공자님의 이야기는 그렇게 인생이 살아가면서 알아야 하는 구구절절히 피가 되고 살이되는 말씀으로 집약이 되어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감히 거역을 할 수가 없다. 어느것 하나도 이치에 어긋남이 없기 때문이다. 이치에 맞는데도 반대를 하는 사람은 진리를 참구하는 수행자가 아니다. 그는 오로지 불타는 공명심만이 가득한 허황한 사람일 뿐이다. 참으로 진리를 찾아 다니는 수행자는 어린아이가 말을 하더라도 그 내용에서 진리가 번득이면 귀를 기울인다. 물론 무릎을 꿇고서 설법을 청할 준비도 다 되어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사람은 인연이 닿는 셈이다. 실제로 금은 자신의 지혜를 나눠주더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원치 않으면 입을 열지 않는다. 불에 속하는 사람들의 남들이 듣지 않으면 귀를 잡아당겨서 입을 대고 더 큰 소리로 떠드는 것과는 비교가 된다. 이렇게 강제로 주입을 시키려고 하는 것은 불의 성분이다. 그리고 불의 성분은 금에게는 참으로 못마땅하게 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가슴속은 묻어두고서 그냥 입으로만 하늘이 어떻고, 신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아무리 떠들어 봐도 전혀 가슴에 와서 진동을 일으키지 않는다.

불교의 형태를 보면서 금을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오는 사람 막지않고, 가는사람 잡지않네.’라는 말에서 특히 그러한 맛이 진동을 한다.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오지않으면 찾아다녀라.’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이다. 이렇게 수동적인 자세는 금에서 나온다. 금이 물을 나눠준다. 와서 먹으라고 소락대기를 질러댈 필요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왜나면 목이 마르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물이 맛있다고 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이 마른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물을 찾게 되어있다. 그리고 조용히 마시고는 또 떠나간다. 그래도 막지않는 것이 금의 마음이다.

진리도 마찬가지이다. 스스로 목이말라서 찾아오면 나눠주고, 그렇게 목마름을 달랜 사람은 또 떠나간다. 그리고서는 아무일도 없다. 이것이 자연의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에서 금이 물을 만나면 철할자가 자신이 깨달은 세계를 조용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는 그렇게 행복해 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조용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전혀 모른다. 사실 진정으로 큰 일은 조용히 내면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소란뻑지근하게 야단을 피우는 것은 실속이 없는 껍질들의 합창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는 낭월이가 이렇게 소란을 피우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껍질일 가능성이 매우 높겠다. 아니, 실은 껍질을 시끄럽게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서 늘상 스스로를 되돌아 보고 있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