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 제23장. 전생록(前生錄)/ 7.반복되는 꿈

작성일
2020-09-19 06:55
조회
1077

[0257] 제23장. 전생록(前生錄)


7. 반복되는 꿈


========================

그로부터 한 달이 바람처럼 지나갔다. 장맛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복중(伏中)의 아침은 눅눅하여 기분조차도 우울하게 느껴지는 계절이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날씨가 덜 더워서 책을 보는데 훨씬 편하다는 것이다. 다만 밖으로 산책이라도 가볼 요량이면 모기떼들의 공격이 심상치 않아서 해가 기울어가는 시간에는 문단 속을 하고 방에서 부채를 의지하고 지내려니 엉덩이에서 땀띠가 날 지경이었다. 이렇게도 폭염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견디기 어려운 시련의 시간이었다. 아침을 먹고서 어디론가 나들이라도 가고 싶었지만 날씨가 궂으니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천상 춘매가 만들어 준 식혜를 마시면서 더위와 싸우는 수밖에 달리 묘안이 없는 나날이었다.

“오빠, 더워서 힘들지? 오빠는 특히 더위를 많이 타네. 호호호~!”

“누이는 덥지 않아? 나만 더운가?”

“왜 안 덥겠어. 그렇지만 그 정도는 아니야. 시원하게 등목이라도 해 줄까? 이리 와.”

아닌게 아니라 그것도 좋지 싶었다. 적어도 찬물을 뒤집어쓰면 두어 시진은 그런대로 견딜만한 까닭이다. 춘매가 시키는 대로 웃옷을 벗고서 찬물을 뒤집어썼다. 그렇게 몇 번을 하자 더위도 약간 주춤한 듯 싶었다.

“고마워. 춘매 덕에 글이 눈으로 들어오지 싶다. 하하하~!”

“복중에 별다른 수가 있어? 내가 나가서 수박을 한 통 사올 테니까 글을 읽고 있어. 수박을 사다가 화채(花菜)를 해 먹자.”

춘매가 나가고서 한참을 지나도 돌아오지를 않았다. 밖에서 누군가 아는 사람을 만나서 수다라도 떨고 있는가보다 하고서 이내 잊어버리고 적천수를 들고 소리를 내어서 읽었다. 언제 읽어도 감칠맛이 나는 천간편이었다.

“갑목참천하니, 탈태요화니라, 춘불용금이요, 추불용토하라. 화치승룡하고, 수탕기호이니, 지윤천화하면, 가춘가추니라~! 좋다~!”

저절로 좋다는 말이 튀어나오는 구절들이다. 그렇게 한참을 읽고 있는데 춘매가 돌아왔는지 기척이 들린다. 밖을 내다보니까 웬 관료(官僚)를 데리고 왔다. 관복을 입은 사람이 춘매의 안내에 따라서 점술관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우창도 앉아있을 수가 없어서 적삼으로 대충 맨살을 가리고는 손님을 맞았다. 그러면서 무슨 일이냐고 눈짓으로 춘매에게 물었다. 그러자 춘매가 웃으면서 연유를 설명했다.

“아, 오빠, 수박을 사러 갔다가 수박가게 주인이랑 이야기를 나누는 말을 들으신 이 관리께서 오빠를 만나보고 싶다고 하기에 모셔왔어. 더운 복중에는 남의 집 방문도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예의를 갖추셨는데 괜찮으니 괘념치 말라고 하고 모셔왔지. 금방 화채를 만들어 올 테니까 잠시 이야기라도 나누고 계셔.”

우창도 대략 분위기를 이해하고는 손님에게 주인의 예를 차렸다.

“누추한 곳입니다. 잠시 들어오셔서 땀이라도 들이시지요.”

“고맙습니다. 그럼 실례를~!”

“날씨가 너무 덥습니다. 백성을 보살피느라고 수고가 많으십니다. 혹 궁금하신 것이 있으면 말씀하셔도 됩니다. 마침 한가롭게 쉬고 있었습니다.”

“이거 편히 쉬시는 것을 방해했네요. 제가 글은 좀 읽었으나 점술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습니다. 궁금한 것이 선생에게 답을 얻을 수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행여 무슨 해답이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뵙고자 했습니다.”

“그렇습니까? 무슨 인연으로?”

“관청의 발령을 받고서 관내를 순행하다가 보면 온갖 소리를 다 듣게 됩니다. 그런데 연승점술관에 이치에 매우 밝은 점술도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몇 차례 듣게 되면서 한번 방문하고 싶었는데 오늘 우연히 낭자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가 폐를 끼치게 되었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우창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의 행색을 살폈다. 관복을 봐서는 곡부의 현령(縣令)은 아닌 것으로 보이고, 그 아래에서 일을 보는 정도가 아닐까 싶은 짐작을 해 봤으나 평소부터 관료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말단(末端)의 관리는 아닌 것으로 보여서 조금은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기는 했다.

“아, 그러셨습니까? 헛된 소문은 항상 발이 없이 돌아다니기 마련입니다. 변변치 못한 소견이나마 도움을 드릴 수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사이에 춘매가 화채를 만들어서는 들어왔다. 우선 달고 시원한 것이 몸에 들어가니 군화(君火)를 조금은 진화(鎭火)되는 듯했다. 그렇게 시원해지니까 마음도 더불어 상쾌해졌다. 한 그릇을 후루룩 마시고서 다시 관리의 이야기를 청했다. 실은 춘매가 동석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셈이기도 하다. 춘매에게도 항상 새로운 이야기와 방문자들의 상황을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였다. 그리고 손님이 떠나고 나서 이야기를 나눌 적에도 미리 함께 들었던 경우에는 훨씬 효과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춘매를 봐하니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보고서 말을 꺼냈다.

“선생을 찾아뵙고자 했던 것은 제게 작은 고민이 있어서입니다. 실은 고민이라고 하기도 애매하긴 합니다만.”

“뭐든 편히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들어보고 제가 답을 드릴 수가 있으면 드리겠지만 능력 밖의 일이라면 답을 드릴 수가 없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니 무슨 말씀이든 하시지요.”

관리가 하도 진지하게 말하는 바람에 두 사람도 웃음기를 빼고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심각한 것은 별로 안 좋아하는 우창이나 그렇다고 해서 아무 곳에서나 허허거릴 수도 없는 일이라는 정도는 알기 때문이다.

“제 이름은 도대림(陶大臨)이고, 호는 염재(念齋)입니다. 제가 보는 일은 통판(通判)입니다.”

“아, 원래 도통판나리셨군요. 이렇게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격무(激務)에 수고가 많으실 텐데 찾아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소생은 진하경(陳河鏡)이고 호는 우창(友暢)입니다. 변변치 못한 재주를 익혀서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삼고 있습니다. 하하~!”

비로소 대화의 실마리를 찾은 우창의 기분이 다시 밝아졌다. 실로 긴장된 분위기는 성미에 맞지 않았으나 관리가 찾아왔으니 나름대로 서투르나마 대접을 한다고 하는 셈이다.

“혹시, 소지민(蘇之敏) 포정사를 아시는지요?”

“예? 소씨든 왕씨든 소생은 관직이 높은 분들과는 교분할 주제가 되지 못하니 뵈었을 리가 없지 싶습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우창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은 산중에서 공부나 하면서 만난 인연 외에는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고, 있을 턱도 없었다. 하물며 포정사라니까 더욱 말을 할 나위도 없었기 때문에 모른다고 답했다. 우창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서는 다시 말을 이었다.

“실은 제남(齊南)에서 만났을 것입니다만...”

그러면서 우창의 안색을 살폈다. 제남이라는 말이 나오자 비로소 우창도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아, 맞습니다. 이름은 잊었으나 관리를 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소포정사셨나요? 크게 마음을 써 주셔서 편안하게 곡부까지 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도통판께서는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실은 저도 그 당시에 소포정사 휘하에서 일을 보다가 지난봄에 이곳으로 발령을 받고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서 꼭 뵙고 싶어서 수소문하다가 곡부에서 학문을 베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포정사나리께 부탁해서 이곳으로 임명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셨군요. 찾아주신 것은 고맙습니다만, 무슨 인연으로 변변치 못한 우창을 그리도 만나고자 하셨는지가 더욱 궁금해집니다. 하하~!”

“염재(念齋)가 우창 선생을 뵙고자 했던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풀 수가 없는 제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신념이 있어서였습니다. 이제 말씀을 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디 말씀해 보시지요.”

“부친이 공직자였던 인연으로 자연히 공부하여 벼슬길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말단이지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승진할 바탕은 마련되어 있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그러나 벼슬에는 큰 뜻이 없는지라 그야말로 의무적으로 맡은 일을 처리할 따름입니다. 항상 마음이 가 있는 곳은 따로 있었지요. 그것은 도학(道學)입니다. 도학을 생각하고, 공부하면 마음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좋은 인연입니다. 최상승(最上乘)의 공부가 도리(道理)를 깨닫는 것이니까요. 하하하~!”

우창은 염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분도 좋아졌다. 행여 승진과 같은 질문을 꺼내면 어쩌나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관리들이란 항상 관심사가 지위의 향상에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그런데 도학을 묻다니 이것이야말로 흥미를 유발(誘發)시키기에 충분한 말이다. 춘매를 바라보니까 열심히 이야기를 듣고 있는 춘매의 표정도 밝아지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오래전부터 항상 꿈을 꾸면 같은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까닭인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알 수가 없고, 꿈을 풀이하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려줘 봐도 모르겠다는 말만 하는 까닭에 스스로 풀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호~! 그것참 궁금하네요. 무슨 꿈이기에 그러셨습니까?”

“꿈만 꾸면 제가 기녀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는 한량(閑良)들과 놀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놀라서 깨곤 합니다. 그런데 항상 배경은 주루(酒樓)입니다. 실로 평소에는 술은 냄새만 맡아도 역겨워서 입에도 대지 않는데 꿈만 꾸면 항상 술상과 함께 있는데 이것이 여간 고역이 아닙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해답이 없어서 답답합니다.”

“듣고 보니 꿈도 참 신기합니다. 그러니까 생시에는 통판의 일을 보시고, 꿈만 꾸면 주루에서 한량들의 시중을 드는 기녀가 되신다는 말씀인가요?”

“예! 맞습니다. 이것도 어쩌다 그렇다면 또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겠습니다만 툭하면 그러고 있으니 신경쇠약이 걸려서 잠을 자기가 싫을 때도 있었지요. 꿈에서 한량과 싸움이라도 크게 벌이고 나면 다음 날은 온종일 기분이 우울하여 업무를 동안에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기도 합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습니까? 제가 맡은 역할이 남의 일을 판단해 주는 통판(通判)이잖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제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판단도 할 수가 없으니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습니다. 하하~!”

그야말로 웃어도 웃는 게 아닌 도통판의 씁쓸한 표정을 보면서 우창은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춘매를 바라보자 춘매도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창이 이야기를 듣고서 오주괘를 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중시계를 꺼내어서 분주를 확인한 다음에 오주를 기억하고는 다시 물었다.

257-1


“그러니까 꿈에 기녀가 되었을 적에 배경은 항상 같은 공간이었습니까? 아니면 공간은 바뀌어도 하는 일은 그대로였습니까? 그리고 한량들은 같은 얼굴이 반복됩니까? 아니면 늘 새로운 얼굴들입니까? 그도 아니면 때론 같은 얼굴이고 또 때론 낯선 얼굴입니까?”

우창이 이렇게 묻자 도통판은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여태까지 해몽하는 사람이나 점술가에게 제 꿈의 이야기를 했으나 선생과 같은 질문을 주신 분은 아무도 안 계셨습니다. 벌써 그 말씀만으로도 해결의 실마리가 나오겠다는 기대감이 생깁니다. 부디 해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야 당연히 해결해 드려야지요. 오늘 저녁에 술시(戌時:19시)가 되거든 평복(平服)을 하시고 동승빈관 앞에서 뵙시다. 동승빈관은 아시지요? 아마도 고민하시는 그 문제를 해결해 드릴 수가 있지 싶습니다.”

“예? 지금 바로 해결해 주시는 것이 아니고요? 물론 동승빈관은 알지요.”

도통판이 의아해서 우창에게 되물었다. 그러나 우창은 미소만 짓고서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지금 이야기를 할 것이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기 때문에 염재도 의미를 깨닫고는 이따가 만나기로 하고 돌아갔다. 비로소 둘만 남게 되자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호호호~! 오빠, 통판 나리가 놀라는 표정을 봤어? 신기하다.”

그 말에 우창도 웃었다.

“하하~! 그러게 뭔가 통했나 보지? 참 재미있지?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고 하지만 이렇게 재미있는 일이 생기다니 말이야. 하하하~!”

“그런데 저녁에 만나서 도대체 뭘 할거지?”

“지금은 말할 수가 없지. 천기(天機)를 누설(漏泄)하면 안 되니까. 하하하~!”

“쳇, 그래 알았어. 그런데 점괘를 뽑았잖아? 그건 어떻게 되는 거야? 적어봐 혼자만 생각하고 있으면 난 알 수가 없잖아.”

우창이 오주괘를 적어서 보여주자. 춘매가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나름대로 해석을 했다.

“음.... 뭐지? 봐도 모르겠는데? 시주(時柱)의 경신(庚申)은 정인(正印)이니까 나빠 보이지는 않지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어. 어서 풀이를 해줘 봐.”

“또한 천기누설~!”

“이잉~! 왜 그래?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발설한다고 그러는 거야~! 이건 너무 하는 거잖아?”

춘매가 그렇게 말하는데도 우창은 빙긋이 웃기만 하고 더 설명하지 않았다.

“이따 나갔다와서 설명해 주면 되지 뭘 조바심을 내나? 하하하~!”

“그래, 알았어. 저녁이나 지어야겠다. 쉬고 있어.”

춘매가 돌아가자 우창은 다시 점괘를 들여다보면서 오주괘를 통해서 전생을 읽을 수가 있을 것인지를 궁리했다. 도락(道樂) 스승님께 오주괘를 전수받을 적에는 그러한 말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통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차피 시간은 무한하다. 삼세(三世)를 경계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면 점괘의 연주(年柱)와 월주(月柱)를 반드시 2~3년 전의 상황으로만 국한(局限)시켜 생각할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확인된다면 또한 새로운 관점으로 활용의 범위가 무한대(無限大)로 넓어지게 될 가능성도 있기에 어서 술시(戌時)가 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춘매가 차려 준 저녁을 맛있게 먹고는 술시에 맞춰서 동승빈관으로 나가자 이미 도대림이 와 있었다. 서로 간단히 인사를 하고는 우창이 전에 봐둔 청루(靑樓)로 향했다. 도통판은 영문도 모르고 우창의 뒤를 따랐다. 행여 누가 알아볼까 싶어서인지 부채로 얼굴을 대충 가리기도 했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우창이 양해를 구했다.

“통판나리께 실례를 해야 하겠습니다. 이후로는 말을 평어로 할테니 그렇게 응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편안한 분위기를 위해서입니다.”

“아, 잘 알겠습니다. 진형으로 부르겠습니다.”

그렇게 약속을 하고서는 앞으로 향했다.

「앵화루(櫻花樓)」

화려하게 치장을 한 낭자들이 입구에서부터 우창과 염재를 반갑게 맞아줬다. 그야말로 집 나간 오라버니가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환한 웃음으로 맞아주니 우창은 그 분위기에 적응이 되지 않아서 얼떨떨한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촌티가 나지 않게 하려고 나름 근엄하게 표정을 짓는 것이 오히려 낭자들에게는 더 우스웠던 모양이었다.

“자, 글방 샌님들은 이쪽으로 오세용~! 한가한 곳을 좋아하실테니까요~!”

반은 콧속에서 맴도는 듯한 소리로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그렇게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흡사 절에 간 색시의 꼴이었다.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라서 탁자를 마주하고 앉았다. 그러자 관리자인 듯한 여인이 옆에 와서 무릎을 꿇고 앉아서 말했다.

“나리들께서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이 되시기만 바랄 따름이에요. 우선 무엇을 준비해 드릴까요? 무엇이든 말씀만 하시면 최대한으로 편의를 봐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창은 예의를 갖춘 중년의 여성이 말하는 소리를 듣는 것도 참으로 어색했다. 어쩌자고 여기를 왔는지도 순간적으로 후회를 할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기왕 엎질러진 물이려니 하고서 나름 할 수가 있는 대로 말했다.

“맛있는 술과 요리를 해 주시고, 함께 대화를 나눌 여인네도 불러 주시오.”

우창이 이렇게 말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낭자가 키득키득 웃다가는 중년 여성이 눈짓하자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러면서도 재미있어하는 표정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우창은 순간적으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당황하는 표정을 낭자가 보고서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예, 분부대로 모시겠습니다. 그럼 편안하신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홍의(紅衣) 낭자와 황의(黃衣) 낭자가 술병을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는 홍의낭자는 우창의 옆에 앉고, 황의낭자는 염재의 곁으로 가서 앉았다. 분위기가 삽시간에 환하게 밝아졌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우창에게 홍의낭자가 말했다.

“아무런 걱정도 마시고 그냥 술만 드시고 담소하세요. 호호호~!”

우창이 이런 곳에 첫나들이를 했다는 것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이 걱정을 해결해 줘서 고마웠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서 염재를 바라봤다. 그런데 염재의 표정이 자못 심각했다. 실로 우창이 생각했던 장면이 이것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뜻대로 일이 되어간다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어색했던 생각을 풀어버렸다. 그리고는 낭자들이 따라주는 술을 생각도 없이 들이마셨다. 옆에서 요리를 집어서는 들고 잔이 비워지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흐름이 진행되었다고 해야 할 모양이다.

그렇게 해서 서너 차례의 술잔이 채워지고 비워졌다. 그 사이에도 낭자들은 무슨 말인지를 재잘재잘 떠들었으나 머릿속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분위기를 봐서 적당한 시기라고 판단을 한 우창이 염재를 보면서 우창이 말을 꺼냈다.

“이보시게 염재, 어떤가? 꿈속의 그 장면이 실제로 나타나지 않았는가?”

“아, 진형의 뜻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지금 가슴이 방망이질을 치듯이 울렁입니다. 꿈의 장면을 현실에서 접하게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기 때문인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아우가 하고싶은 대로 마음껏 해 보시게. 그것이 오늘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라네. 하하하~!”

그러자 홍의 낭자가 끼어들었다.

“어머 진형, 두 분끼리만 이야기하시려면 집에서 하시지 뭐하러 여긴 오셨담~! 여긴 꽃 속이란 말이에요. 꽃밭에 오셨으면 나비가 되어 주셔야지 여기에서도 일하시는 남정네는 싫거든요. 호호홍~!”

“아, 낭자에게 실례 했소이다. 우리는 그저....”

“실례는 또 뭐래요? 호호호~! 그냥 이렇게 실없이 웃고 놀면 되는 거란 말이에요. 처음 오셨으니 얼떨떨하시죵?”

“그걸 어찌 알았소?”

“에구~! 관둬요. 오늘 홍련은 일진이 사나운 날임이 분명해요. 그러니까 진형같이 재미없는 손님을 받게 되었겠거니 해야죵. 호호호~!”

우창은 낭자들의 수다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도 짙은 분 냄새가 좀 거슬리기조차 했다. 그나마 겨우 술을 마신 힘으로 버티고 있는 셈이었는데 얼굴에다가 가슴이 닿을 듯이 밀착해오는 것에는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그래서 눈길을 둘 곳을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 염재의 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다. 염재도 당황스러울 만도 하겠는데, 마치 급류에 휘말린 사람처럼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 그의 내면에서는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 것인지가 더 궁금했다. 그래서 황의낭자에게 건드리지 말라는 눈짓을 하고는 대신에 우창이 두 낭자를 맡았다. 지금은 혼자서 보내야 할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황의낭자는 이름이 황련이오? 아니면 금련이오?”

“어머~! 사람을 처음 봐도 척하면 이름이 나오나요? 점쟁이세요? 맞아요. 소녀는 금련이랍니다. 금련이~!”

“금련낭자가 뭘 볼 줄은 아시는군. 내가 점쟁이가 맞소이다. 하하하~!”

우창이 이렇게 말하자, 홍련이 말했다.

“진형, 그렇게 말을 하면 격이 맞지 않잖아요. 사당(祠堂)에서는 사당의 예법이 있고, 주당(酒堂)에서는 주당의 예법이 있거늘 어찌 주루에서 글방의 예법을 차리신단 말인가요. 참 내~! 호호~!”

그 말에 우창은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이치는 이미 훤하게 알고 있지만 실로 주루의 예법을 배울 겨를이 없었으니 어쩌랴. 그냥 어정쩡한 자세로 대충 때우고 있는데 이렇게 정곡을 찔러오니 오히려 당황스럽기조차 했다.

“실로 주루의 예법을 모르니 양해하시기 바라오.”

“우선 알려 드릴게요. 말투는 ‘하게’로 하시거나, ‘해라’로 하세요. 어느 것이든 모두 주루에서 통용되는 어법이랍니다.”

“아 그런가? 그렇다면 바로 배워서 예를 모르는 사람은 면해야지. 하하~!”

“그래요. 훨씬 나아요. 그다음에는 친구끼리 한마디 하면 저랑도 한마디 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소외감으로 외로워지고 그것은 우리의 존재감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니까요.”

“그것도 일리가 있네. 그래 내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 줄 텐가?”

그 말에 금련이 한마디 꺼냈다.

“애쓰시는 모습이 너무 안쓰럽잖아요. 돈 내고 무슨 노동을 하시는 것도 아니고 말이에요. 차라리 그냥 가세요. 봐하니 즐기러 오신 것도 아닌 모양인데. 쳇~!”

이렇게 말하고는 휭하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 우창이 약간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붙잡지도 않았다. 사실 염재에게 여인은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홍련도 들어가는 금련을 보더니만 우창을 향해서 말했다.

“우리네 인생은 남정네의 허풍을 먹고 산답니다. 그런데 오늘의 손님은 허풍은 고사하고 너무나 진지해서 이러다가는 오늘 일당은 연기가 되어서 날아가 버리고 말게 생겼으니 어쩐답니까? 흐흐흑~!”

장난삼아서 아리따운 모습으로 그렇게 말하는 홍련을 보니 과연 사내를 녹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그런데 홍련의 말을 듣던 염재가 갑자기 얼굴을 두 팔로 감싸고 파묻었다. 그리고는 어깨가 들썩였다. 아마도 오열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 일도 생길 것이라는 짐작은 했지만, 그 뇌관(雷管)을 홍련이 건드렸던 모양이다. 이렇게 되자 당황한 것은 홍련이었다.

“홍련, 놀랄 일이 없네. 오늘 말하지 못할 경험을 하게 되어서 자신도 어쩔 수가 없을 테니 잠시만 그대로 두게. 그리고 내가 점쟁인데 내게 뭘 물어보면 봐줄 수도 있다네. 하하하~!”

우창이 기분전환을 할 겸으로 홍련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홍련이 별 기대도 하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세요? 그럼 여쭐게요. 제게 큰 고민이 있어요. 어떻게 해결이 될지 좀 봐주세요.”

일단 질문을 받으면 점기가 동한다. 우창은 점기를 찾아보려고 주루를 한 바퀴 둘러봤지만, 언뜻 눈에 들어오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가장 손쉽고 재미있는 단시점을 떠올렸다.

'옳지, 오늘은 단시점이랑 놀아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