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반달(6) 유동커피

작성일
2021-04-11 07:08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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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반달(6) [2일째 3월 9일/ 1화]


유동커피 한 잔으로 아침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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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눈을 뜨면 먼저 일기예보를 살핀다. 오늘은 흐릴 예정이라고 나오는 것을 보면서 풍경보다는 식물원을 가는 것이 좋겠다는 방향을 정하게 된다. 서귀포에서 가까운 곳에 상효원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게 정한 다음에는 여유가 넘친다. 꼭두새벽에 성산일출봉으로 달려갈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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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으로 바라보는 서귀포 앞바다의 새벽 풍경이다. 하늘의 달을 보니 구름이 완전히 가득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카메라는 7초 간격으로 연속촬영을 시켜놓고서 폰을 들고 옥상을 어정거린다. 전망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이다. 열 시간이라도 놀 수가 있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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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아오니 한라산도 올려다 본다. 걸음만 몇 번 옮기면 바로 한라산이 보이는 옥상이다. 새벽에는 한라산의 정상이 보인다. 카메라 두 대는 저마다 타임랩스를 찍느라고 바빠서 폰으로 한라산을 당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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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질은 엉망이지만 기슭에 허옇게 보이는 것은 눈이 분명하지 싶다. 아직 정상부위에는 눈이 녹지 않았다는 이야기로구나. 낮에라도 풍경이 잘 보이는 곳을 만나면 잔설이 남은 한라산의 정상을 담아보겠다는 생각의 조각을 하나 마음에 걸어 놓는다. 이것을 괘념(掛念)이라고 하나?

'괘념치 마세요.'

이 말은 '마음에 걸어두지 마세요'라고 풀이하면 되지 싶다. 그리고 사진가는 항상 풍경을 보면서 괘념을 한다.

'저 풍경에 구름이 중턱에 지나간다면 그림이 되겠군'

상담하러 온 손님의 이야기는 괘념치 않는다. 현관문을 나가기 전에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잊어버리기가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풍경에 대해서는 그럴 수가 없다. 괘념을 많이 하게 되어서 대추나무에 연 줄이 걸리듯이 주렁주렁 얼켜있고, 어느 풍경에 다시 갔을 적에 예전에 걸어 둔 생각이 떠오른다. 그래서 갔던 곳에 또 가고, 다음에 다시 가고, 그 다음에도 또 가게 되는 모양이다. 갈때마다 새로운 것을 걸어놓는다. 이러한 생각조차도 사라진다면 다시는 가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완벽한 풍경을 만났다는 말이다. 작년 9월에 한라산에 올라가서 너무 멋진 풍경을 만났기 때문에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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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한라산은 구름이 없었지만 동쪽바다의 풍경은 구름이 가득했다. 그렇게 날은 밝아오고 있었고, 아침을 먹으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까지 옥상에서 새벽의 제주도 앞바다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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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으로 돌아오니 아침상을 차리느라고 분주하다. 국은 어제 녹차한잔에서 연지님이 뜯어온 쑥국이다. 쑥향이 방안을 가득 채운다. 봄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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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아침은 안 먹었지만 여행을 위해서는 먹어야 한다. 오전을 견딜만큼의 에너지원을 확보해야 놀이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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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의 붸페식이 부럽지 않은 조촐한 밥상이다. 이렇게 남겨놔와 뭘 먹고 다녔는지 기억을 떠올리는 코드가 되기 때문에 생각이 났을 적에 한 장 담아놓는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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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내내 놀았던 옥상을 올려다 보니 이름표인 트루웰이 보인다. 그리고 뒤쪽을 보면 또 다른 이름이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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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까지 붙어있는 것으로 봐서 이것이 얼굴인 모양이다. 신신호텔이다. 아, 검색을 하면 꼭 두 개가 나온다. 하나는 천지연이다. 위치가 다르니 건물도 다르지만 주인은 한 사람인 모양이다.

호연 : 커피 한 잔 하고 출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낭월 : 좋지~!
호연 : 맛있는 커피집을 알아 놨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낭월 : 뭘 다녀와, 같이 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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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커피집이라는 곳으로 향하는 두 사람을 따라갔다. 커피가 맛이 있어봐야 커피가 아니겠느냐는 생각은 있지만 그래도 사진꺼리는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차에 우두커지 앉아있기 보다는 몸도 풀겸 움직여보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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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물처럼 흘러가도 괜찮다. 사람들이 커피향에 이끌려서 하나 둘 찾아들고 있는 풍경을 보면서도 맛에 대해서는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미감(味感)에 대해서는 그리 뛰어나지 못한 것을 인정해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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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분 거리에 있는 유동커피이다. 낭월은 항상 아메리카노이다. 커피는 커피다워야 커피지 다른 것이 들어가면 그것이 커피냐는 주의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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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맛인지, 보이차 맛인지만 구분할 수가 있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당연하다고 해야 할랑강? 아니면 집에서도 커피를 마시고 있으니 특별히 더 맛있는 것에 대한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 싶다. 이미 최상의 맛을 누리고 있는데 또 다른 맛이 궁금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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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차도 그렇다. 끓는 물을 부어서 따라 마시면 된다. 야단스럽게 갖춰야 한다는 차도(茶道)같은 것은 애초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다도라고 해야 하나? 뭐 그래도 그만이다. 낭월은 차도라고 하고 싶을 따름이다. 차는 그냥 마시는 것인데 무슨 호들갑을 떠는 것도 같아서 별로 흥미가 없다. 문득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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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의 동화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총독부의 머시깽이가 동화사를 방문했더라지. 동화사에는 당시에 고승으로 이름이 높았던 스님이 계셨는데 이름은 잊어버렸다. 실로 낭월은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일종의 망각현상이 있다. 미각도 떨어져서 그 맛이 그맛이고. 얼굴을 기억하는 안면인식에도 장애가 있어. 이름도 항상 잊어버린다. 드라마의 배우를 말할 적에도 성과 이름이 틀리는 것은 늘상 있는 일이다. 그래도 답답하지 않다.

'뭣이 중헌디~!'

희한하게 자기합리화는 잘 한다. 이름이 중혀? 내용이 중혀? 장 이런 식이다. 내용에서는 배우고 깨달을 것이 있지만 이름은 떠벌이는 용도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이 어쩌고, 괴델이 어떻고 하는 것이 중요하냔 말이지.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들려 주는지가 궁금할 따름이듯이 동화사의 조실 스님이 어떤 법호를 사용하셨는지 잊어버린 것도 이렇게 생각하더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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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의 고위 인사가 수행원을 잔뜩 거느리고 거들먹거리면서 선사를 찾아왔겠지. 미뤄서 상상이 된다. 나름 불교를 믿는다고 하고 선사를 방문해서 마주 앉았으려니 싶다.

선사 : 시자야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차를 가져 오너라~!
시자 : 예, 스님~!

잠시 후에 시자가 가져온 차. 총독부의 고위 인사가 놀랐더라지. 원래 예의를 중시하는 일본의 차를 마시는 습관을 생각해 보면 얼마나 놀랐을지 대략 짐작이 된다. 아마도 그는 그러한 상상을 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명색이 조선 최고의 고승의 제자가 주는 차라면 그 정성도 대단할 것이라는 상상을 했음직했기 때문이다. 선사가 시자에게 호통을 친다.

선사 : 이놈아, 차를 사발에 가져오면 어떡하느냐~!
시자 : 예, 스님 죄송합니다. 차를 만들다가 그릇이 깨졌습니다.
선사 : 에구, 녀석 항상 덤벙대는 꼴이라니. 쯧쯧~!

고위 인사도 어떻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면 선사도 그 막사발에 차를 받았기 때문에 자신도 동격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선사는 고상한 찻잔에 차를 주고 자신에게는 막사발에 줬더라면 내심으로 뒤틀렸겠지만 완전히 같은 대접이니 어떻게 시비를 걸어 볼 수도 없었던 것일게다. 그냥 낭월의 상상이다. 다른 것은 다 떨어지는데 희한하게도 상상력은 날이 갈수록 하늘을 찌른다. 그나마 다행인가?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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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시자에게 호통을 친 선사가 귀한 손님에게 말했더란다.

선사 : 이해하시오. 세상의 물정을 모르는 놈들이니. 허허허~!
인사 : 아, 괜찮스무니다. 아주 좋스무니다. 

겉다르고 속다르다고, 명색이 손님의 입장이니 마음 속은 어떻게 꼬였던 간에 겉으로는 정치인 답게 말을 했으려니 싶다. 혹시 막사발이라고 해서 문경의 그것을 떠올리시는 벗님이 계실지 모르겠다. 원 그럴리가.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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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찻사발:인터넷에서]


그냥 머슴밥을 담는 막사말 말이다. 사기사발이라고 하던가? 나이가 좀 있으신 벗님은 아실 것이다. 테두리에 복(福)자가 새겨져 있는 투박한 그 사발 말이다.

 

tkqkf[막사발:인터넷에서]


아싸~! 찾았다. 바로 이것이었을 것이다. 머슴밥을 담아주던 그 그릇이다. 그 사발을 들고 차를 마시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선사와 시자는 내심으로 얼마나 꼬~소~했을까? 아마도 참깨 서 말은 볶았을게다. 선사가 문득 고위인사를 불렀다.

선사 : 머시깽이 님.
인사 : 예, 대사님.
선사 : 차를 드시오? 그릇을 드시오?
인사 : 예? 아 그야 차를 마시무니다. 예예.
선사 : 사발은 아무래도 상관 없소이까?
인사 : 그럼요. 상관 없스무니다.

그렇게 사발차를 마시고 가면서 분명히 즐겁지는 않았을게다. 그러니 그 속에 깉은 깊은 선리(禪理)를 깨달았을지는 모를 일이다만 아마도 어림도 없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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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인사를 전송하고 돌아와서 사제지간이 앙천대소(仰天大笑)했을 것은 당연했다. 시자의 뚝심이나, 얼렁뚱땅하는 선사의 심사가 보이는 듯하니 말이다. 그아말로 산중에서 도를 닦는 스님식의 소심한 복수라고나 할까? 그랬다는 이야기가 선가에 전해져 오기로 낭월이 소싯적에 극락선원에서 선방 스님들의 수다 속에 묻어나왔던 이바구의 한 쪼가리를 얻어들었던 생각이 이렇게 제주도의 유동커피집 앞에서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떠올랐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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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 낭월아 커피가 뭐꼬?
낭월 : 커피지 뭐긴 뭐라.

누가 낭월에게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한다. 차의 맛이 기가 막히다는 둥, 그집 음식은 세상에 둘도 없다는 둥. 이런 말에는 별로 감동이 되지 않는다. 감동이 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래봐야 한 고개 넘어가면 다 같은디 뭘.'

이러고 있으니 커피 한 잔을 사겠다고 줄을 서 있는 것을 보거나, 칼국수를 사 먹겠다고 자신의 번호가 오기를 30분이나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낭월과 같은 사람을 위해서 '맛집의 옆집'이 있는 것이지. 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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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향을 날리면서 차로 돌아왔다. 아침에 커피 한 잔은 기분을 상쾌하게 해 주는 마법(魔法)이 있지 싶다. 차는 마음을 느긋하게 해 주는 비법(秘法)이 있는 것도 같다.  그래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집에서는 차를 마시지만 밖에서는 차를 마시는 것이 좀 번거롭다. 예전에는 일없이 자사호와 찻잔을 챙겨서 다니기도 했는데 그것도 귀찮아서 이번에는 아무 것도 챙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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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를 가도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가 있기 때문이기도 한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겠네. 여하튼 유동커피가 유명하다고 해서 한 잔 마시게 되었다. 그렇지만 유동커피든 우동커피든 낭월에게는 다 감동일 따름이다. 이 아침에 여행길을 나서기 전에 마시는 한 잔의 커피이니 더 말해서 뭘 하겠느냔 말이다. 그리고 집에서 가져온 믹서커피라고 해도 전혀 나쁘지 않다고 하면 호연이 섭섭하다칼랑강?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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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연 : 맛이 어떻습니까? 확실히 다르지 않습니까?
낭월 : 으응~ 확실히 다르네.
호연 : 전국에서 제일 유명한 바리스타가 내린 것입니다.
낭월 : 그렇구나. 어쩐지 맛이 좋군.
호연 : 제주도에서 가장 유명한 커피집이거든요. 
낭월 : 그렇구나. 좋아.
호연 : 좋아하실 줄 알았습니다. 정말 맛있거든요.

이런 것이 영혼없는 대화인 모양이다. 실로 그맛이 그맛인 것은 낭월의 미각 탓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는 인정해야 할 모양이다. 색깔에 대해서 말하라면 백 가지로 말을 할 수가 있겠는데 맛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표현할 방법이 없는 것은 그렇게 느끼기 때문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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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쓸생각은 없었는데, 이야기를 시작할 적에는 간단히 하고서 넘어가려고 했는데 그것조차도 맘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다. 마음은 얼른 목적지로 가고 싶은데 손가락이 머뭇거리면서 팔공산까지 소환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괜찮다. 사실 여행이란 과거의 추억을 소환하는 코드를 찾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을 보지만 그것을 통해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거기에다가 다시 새로운 추억을 덧씌워가는 것이 여행이겠거니 한다.

커피집 앞에서 서성이면서 막사발에 기가 막힌 지리산 녹차를 마시면서 느꼈을 그 일본 사람의 기분까지도 생각해 보고 있었으니 이러한 것이야말로 걸림없는 사유의 세계가 아니겠느냔 말이지. 그나저나 그 선사의 이름이 뭐지? 아무리 생각해도 확실하게 떠오르지 않는 것은 어쩌면 이미 까마득한 옛날의, 그러니까 40년도 더 된 이야기인 탓도 없다고는 못하지 싶다.

그렇게 따진다면 이 정도라도 기억창고에 남아있는 부스러기가 고맙기도 하군. 다 사라지고 났지만 막사발과 차와 선사의 대화는 남아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세월이 흘러가면 군더더기는 모두 사라지고 고갱이만 남는다는 말은 맞지 싶다. 소나무가 죽어서 천년이 되면 모두 삭아서 흙으로 돌아가지만 관솔은 여전히 붉은 색을 띠면서 그대로 있는 것처럼 말이다.

다 안다. 뭐라고 해도 기억력의 부실함은 감출 수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얼버무리는 것은 이렇게 살아도 크게 불편하진 않더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대충 기억하고 잊어버리고 얼렁뚱땅 살아도 되더라는 말이기도 하다. 가장 경계하는 것은 강박관념으로 일일이 메모하면서 기억하려는 노력까지는 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느냐는 말이기도 한 셈이다. ㅎㅎ

어쨌든 바라노니 낭월의 마음 속에도 묻혀있는 관솔들이 많기만을~!

호연 : 어디로 갑니까?
낭월 : 상효원~!
호연 : 옙! 상효원으로 모시겠습니다~!

상효원이 뭘 하는 곳인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낭월이 가자고 해서 실망스러웠던 적이 없다는 것을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일게다.

(여행은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