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서로 어우러져서 한바탕

작성일
2007-09-10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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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하면 좀더 자세하게 상극의 이치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려고 했다. 여기에서 총론과 결론을 삼아서 간단하게 정리를 해본다. 각각의 극하는 관계를 기본적으로 이해를 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실은 서로 복잡하기 그지없는 거미줄과도 같은 복잡한 사연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함께 인식하면서 이해를 한다면 더욱 의미있는 상극의 공부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야기 중간에서도 잠시 언급을 했지만, 서로 서로의 이해관계가 첨예(尖銳)하게 얽혀 있다고 보는 것이 상극의 관계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극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생에 대해서도 뭔가가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어머니가 자식의 필요성을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모통은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하지만, 그러한 내리사랑이 발생하는 이유는 반드시 있다고 보는 것이다. 뭐든지 우연(偶然)인 것은 없다고 전제를 하고서 이 공부는 진행을 해야 한다. 우연이라는 것을 인정해버리면 아무것도 연구를 할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

가령 부부가 서로 만나는 것도 우연이라고 한다면 궁합의 이야기를 끼원 넣을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히도 우연은 없다고 본다. 자연의 이치에는 모든 것이 ‘우연처럼 보이는 필연(必然)’에 의해서 진행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사상은 불교에서도 흐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우연(偶然)’이라고 하는 낱말은 조작된 것이라고 보기도 하는 것이다.




처음에 명리학을 공부할 적에는 상생은 매우 좋은 것이고, 상극은 매우 불량한 것이라고 하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각인되었다. 이것은 낭월이의 무지한 것만도 아니라고 생각된다. 대개의 명리서적들에서는 극을 나쁜 것으로 인식이 되게끔 적혀 있다는 것이 어쩌면 정답일 것이다. 그러한 자료를 의지해서 공부하다가 보니까 극에 대해서는 은연중에 어떤 저항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러한 생각은 참으로 한동안 없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정도의 오행순환법칙(五行循還法則)에 눈을 뜨게 되면 이러한 ‘호생염극(好生厭剋)의 마음이 없어진다. 문자를 하나 만들어서 무슨 말인가 하실는지 모르겠다만, 간단히 말해서 생은 좋아하고 극은 싫어한다는 말이다. 생이나 극이나 그 모두는 지극히 당연한 필요에 의해서 발생한 자연의 흐름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생의 작용이 좋다고 하더라도 그에 못지않게 반작용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또 극의 작용이 나쁘다고 해도, 극의 좋은 역할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요즘에 와서 생극의 문제를 생각해보면, 그 작용은 서로서로 ‘50 대 50’으로 느껴진다. 그만큼 극의 작용도 없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데, 고인(古人)들도 이 극의 작용을 생의 작용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로 다뤄오고 있다는 것을 보면서 역시 어르신들의 통찰력은 대단하게 깊었다는 것에 새삼 옷깃을 여미게 되는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다.

이러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뒤쪽에서 등장을 하게 되겠는데, 우선은 이정도로 극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두고서 넘어가는 것으로 충분하리라고 생각해본다. 명칭은 달라지더라도 항상 생극의 이치는 그 이면에 깔려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회라고 하는 구조도 또한 그렇게 생과 극을 반복하면서 얽혀가는 것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