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화가 금을 극한다(火剋金)

작성일
2007-09-10 19:02
조회
7216

불이 금을 극하는 이치는 무엇일까? 일단 금도 물을 생해주는 작용을 기본적으로 하고 있다. 불로써는 물이 절대로 곱게 보이지 않을법 한데 그 물을 생조하는 금을 곱지않는 눈으로 보고 싶은것은 어쩌면 기본이 될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금은 나무를 극하기 때문에 불도 금을 극한다고 하면 또 어떨까? 이것도 다른 오행과 동일한 조건이기 때문에 특별히 불이 금을 극하는 이치로는 좀 엉성하다고 하겠다.

어떻게 보면 불은 금을 생하는듯 하기도 하다. 용암을 토해놓는 불을 봐도 그런 느낌이 들고, 암석이 용광로를 거쳐야만이 진귀한 가치를 갖는 순도가 높은 금속으로 변하는 것을 봐도 그렇다. 이러한 일들은 아무래도 불이 금을 생한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그리고 오행의 상생법칙을 도표로 나타내보면 또 금을 생한다는 일리가 있다.

이와 같은 그림을 보면 오행의 순환상셍에서 잘 흘러가다가 유독 화에서 금으로 가는 그림이 없고 중앙으로 왔다가 다시 금으로가는 일그러진 상생도가 된다. 이것이 현재의 오행의 상생에 대한 그림이다. 그러면 과연 火와 金사이에는 어떤 다리가 없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비록 오행상생법에는 일부 어긋나지만 옛 어른들께서 미쳐 생각하지 모했던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해본다.

어쨌거나 화극금이라고 명리학에서는 사용을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기본적인 이론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명리학을 연구하는데 여간 곤란하지 않다. 그래서 일단 이러한 의문을 제기해놓고서 화극금에 대한 이치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불은 맹열하게 타오르는 성분이다. 그렇게 타오르고 있는데 금은 결실이라고 볼적에 불의 입장에서는 금의 결실제일주의가 어쩐지 못마땅하다. 과정을 무시하는 금의 마음을 불로써는 곱게 보지 않을법하다. 그리고 불로써 금에게서 취할 것은 무엇일까? 이점도 얼핏 생각해보면 서로 관계가 없을법하다. 그런데 불은 금이 있어야 보존이 되는 이치가 있다. 여름의 맹렬한 불기운은 그대로 두면 이내 사그러지고 만다. 그렇게 되면 불의 존재는 어디에도 흔적이 없으니 불로써는 미래가 불안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금이라고 하는 그릇에다가 불기운을 보존하려고 할 것이다. 이 이론은 【우주변화(宇宙變化)의 원리(原理)】라는 한동석(韓東錫) 선생의 책에서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그래서 금화교역(金火交易)이라는 좀 어려운 말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일단 불이 금의 그릇에다가 자신의 불기운을 저장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현재로써는 엘피지(LPG) 통이라던지 부탄가스 통을 보면서 불을 보관하는 성분으로써 금이 선택되었다고 생각이 된다.

대단한 화력인 원자력 발전소에서 원자로를 감싸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알아봤더니 금속이라고 한다. 사실 물로써 불을 보존하기는 불가능하고, 토로써 보존을 하려니까 화생토의 의미로써 불기운이 스며들므로 불의 효율이 떨어지는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좋은 것이 금인데 이러한 이치로서 불은 금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를 한다. 극을 한다는 말은 상대방은 원하거나 말거나 불이 필요로 한다는 뜻으로 이해를 하면 될것이다.

이러한 이치에 이해서 불은 금을 극하게 되는데 금은 불에게 무엇을 댓가로 받을까도 궁금하다. 그러나 불은 금을 제련하므로써 금의 가치를 높여준다는 것으로 보상이 된다고 본다. 불이 아니었더라면 그냥 땅 속의 돌덩어리에 불과할 뿐인데 불이 있음으로 해서 금속은 빛이 나는 보옥이 되는 것이니 참으로 중요한 사유라고 하겠다. 그리고 불이 있음으로해서 온갖 도구들이 나왔으니 이점은 다시 말하지 않더라도 모두 이해를 하실 일이다.




또 사회적으로 친다면 한참 맹렬하게 목표를 위해서 추진하고 있는 불에 해당하는 사원들의 눈에는 그저 놀고 먹는 것으로만 보이는 고급사원들이 항상 못마땅하게 보일 수도 있을거라는 생각이다. 특별하게 하는 일도 없으면서 월급은 더 많이 받아가는 간부들이 참으로 못마땅하게 생각이 될법도 하다. 그러나 시회통념상 하극상을 하지는 못하고서 마음으로만 극을 하니 이것이 사회적으로 보는 극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만약에 중간에서 토에 해당하는 직속상관이 없다면 젊은 친구들은 한바탕 난동이라도 부리게 될런지도 모른다. 이렇게 못마땅하지만 서로 눈치를 보면서 잘도 참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다가 자칫 불의 세력이 강화되면 어김없이 하극상이 전개된다. 구테타라고 하던가? ‘잘되면 충신이요 못되면 역적’이라는 말로 대신하는 것 말이다. 그래서 성공하는 구테타는 죄가 아니라는 결정을 당시의 법원에서도 판정을 내렸던 모양인데, 통치자가 바뀌니까 이러한 결정도 뒤바뀌어서 성공한 구테타도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이 현시대의 주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형이라는 최고형량을 선고받기도 하는 것인 모양이다.

그야 아무래도 좋다. 낭월이는 정치적인 면에는 감각이 둔해서 별로 흥미를 못느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화극금의 이치는 바로 하극상의 이치가 자연에도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화를 금의 아래에 두는 이유는 무엇이냐면 우선 목(木)으로부터 출발을 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물론 용(用)의 차원일 것이다. 만약에 체(體)를 생각한다면 수로 출발해서 금에서 끝이 나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체용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한다. 나중에 또 틀림없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불을 금의 앞에다가 두는 것은 인생을 기준으로 따져봐도 일리가 있다고 보아서이다.

수를 시작으로 두는 것을 인생으로 견준다면 뱃 속에서부터 사람으로 볼것인가 하는 점의 차이라고 하겠다. 배 속에서부터 사람으로 본다면 수가 가장 처음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리고 불교적인 관점에서는 이것이 타당하다. 뱃속의 아이도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고래로 전해내려온 윤리관에서도 타당하다고 본다. 그 이유는 태어나면서 한 살이라고 하는 기준이 발생하는 것을 볼적에 당연히 태아도 나이를 10개월간 먹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이 서양의 사고방식이 들어오면서 급속히 깨어지게 된다. 서양에서는 정확히 태어나는 순간부터 따져서 365일이 되어야 한 살이라고 하는 것이 그 사실을 증명해준다. 그래서 생일을 물으면 ‘몇살 몇 개월’ 이라는 식으로 답변을 한다. 이렇게 태어나는 순간이 그 사람의 시작이라고 하는 면에서는 명리학(命理學)의 기준와 완전히 100% 호환이 된다. 그러고 보면 명리학은 동양적인 사상에서 출발을 했으면서도 실은 서양적인 사고방식이 흐르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사주를 본다는 것은 몇일 몇시에 태어났는가에 대해서만 관심을 보이기 떄문이다. 또 말이 길어졌는데, 결론은 그래서 금이 화보다 뒤에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점만 이해를 하면 충분하지만 그래도 덤으로 이런 주변의 상황까지도 이해를 하면 손해를 볼 일이 없다고 생각해서 생각이 나는대로 이야기를 해 드리는 것이다. 이만 화극금(火剋金)에 대한 이야기를 줄인다. (4) 화가 금을 극한다(火剋金)




불이 금을 극하는 이치는 무엇일까? 일단 금도 물을 생해주는 작용을 기본적으로 하고 있다. 불로써는 물이 절대로 곱게 보이지 않을법 한데 그 물을 생조하는 금을 곱지않는 눈으로 보고 싶은것은 어쩌면 기본이 될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금은 나무를 극하기 때문에 불도 금을 극한다고 하면 또 어떨까? 이것도 다른 오행과 동일한 조건이기 때문에 특별히 불이 금을 극하는 이치로는 좀 엉성하다고 하겠다.

어떻게 보면 불은 금을 생하는듯 하기도 하다. 용암을 토해놓는 불을 봐도 그런 느낌이 들고, 암석이 용광로를 거쳐야만이 진귀한 가치를 갖는 순도가 높은 금속으로 변하는 것을 봐도 그렇다. 이러한 일들은 아무래도 불이 금을 생한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그리고 오행의 상생법칙을 도표로 나타내보면 또 금을 생한다는 일리가 있다.

이와 같은 그림을 보면 오행의 순환상셍에서 잘 흘러가다가 유독 화에서 금으로 가는 그림이 없고 중앙으로 왔다가 다시 금으로가는 일그러진 상생도가 된다. 이것이 현재의 오행의 상생에 대한 그림이다. 그러면 과연 火와 金사이에는 어떤 다리가 없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비록 오행상생법에는 일부 어긋나지만 옛 어른들께서 미쳐 생각하지 모했던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해본다.

어쨌거나 화극금이라고 명리학에서는 사용을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기본적인 이론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명리학을 연구하는데 여간 곤란하지 않다. 그래서 일단 이러한 의문을 제기해놓고서 화극금에 대한 이치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불은 맹열하게 타오르는 성분이다. 그렇게 타오르고 있는데 금은 결실이라고 볼적에 불의 입장에서는 금의 결실제일주의가 어쩐지 못마땅하다. 과정을 무시하는 금의 마음을 불로써는 곱게 보지 않을법하다. 그리고 불로써 금에게서 취할 것은 무엇일까? 이점도 얼핏 생각해보면 서로 관계가 없을법하다. 그런데 불은 금이 있어야 보존이 되는 이치가 있다. 여름의 맹렬한 불기운은 그대로 두면 이내 사그러지고 만다. 그렇게 되면 불의 존재는 어디에도 흔적이 없으니 불로써는 미래가 불안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금이라고 하는 그릇에다가 불기운을 보존하려고 할 것이다. 이 이론은 【우주변화(宇宙變化)의 원리(原理)】라는 한동석(韓東錫) 선생의 책에서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그래서 금화교역(金火交易)이라는 좀 어려운 말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일단 불이 금의 그릇에다가 자신의 불기운을 저장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현재로써는 엘피지(LPG) 통이라던지 부탄가스 통을 보면서 불을 보관하는 성분으로써 금이 선택되었다고 생각이 된다.

대단한 화력인 원자력 발전소에서 원자로를 감싸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알아봤더니 금속이라고 한다. 사실 물로써 불을 보존하기는 불가능하고, 토로써 보존을 하려니까 화생토의 의미로써 불기운이 스며들므로 불의 효율이 떨어지는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좋은 것이 금인데 이러한 이치로서 불은 금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를 한다. 극을 한다는 말은 상대방은 원하거나 말거나 불이 필요로 한다는 뜻으로 이해를 하면 될것이다.

이러한 이치에 이해서 불은 금을 극하게 되는데 금은 불에게 무엇을 댓가로 받을까도 궁금하다. 그러나 불은 금을 제련하므로써 금의 가치를 높여준다는 것으로 보상이 된다고 본다. 불이 아니었더라면 그냥 땅 속의 돌덩어리에 불과할 뿐인데 불이 있음으로 해서 금속은 빛이 나는 보옥이 되는 것이니 참으로 중요한 사유라고 하겠다. 그리고 불이 있음으로해서 온갖 도구들이 나왔으니 이점은 다시 말하지 않더라도 모두 이해를 하실 일이다.




또 사회적으로 친다면 한참 맹렬하게 목표를 위해서 추진하고 있는 불에 해당하는 사원들의 눈에는 그저 놀고 먹는 것으로만 보이는 고급사원들이 항상 못마땅하게 보일 수도 있을거라는 생각이다. 특별하게 하는 일도 없으면서 월급은 더 많이 받아가는 간부들이 참으로 못마땅하게 생각이 될법도 하다. 그러나 시회통념상 하극상을 하지는 못하고서 마음으로만 극을 하니 이것이 사회적으로 보는 극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만약에 중간에서 토에 해당하는 직속상관이 없다면 젊은 친구들은 한바탕 난동이라도 부리게 될런지도 모른다. 이렇게 못마땅하지만 서로 눈치를 보면서 잘도 참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다가 자칫 불의 세력이 강화되면 어김없이 하극상이 전개된다. 구테타라고 하던가? ‘잘되면 충신이요 못되면 역적’이라는 말로 대신하는 것 말이다. 그래서 성공하는 구테타는 죄가 아니라는 결정을 당시의 법원에서도 판정을 내렸던 모양인데, 통치자가 바뀌니까 이러한 결정도 뒤바뀌어서 성공한 구테타도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이 현시대의 주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형이라는 최고형량을 선고받기도 하는 것인 모양이다.

그야 아무래도 좋다. 낭월이는 정치적인 면에는 감각이 둔해서 별로 흥미를 못느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화극금의 이치는 바로 하극상의 이치가 자연에도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화를 금의 아래에 두는 이유는 무엇이냐면 우선 목(木)으로부터 출발을 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물론 용(用)의 차원일 것이다. 만약에 체(體)를 생각한다면 수로 출발해서 금에서 끝이 나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체용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한다. 나중에 또 틀림없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불을 금의 앞에다가 두는 것은 인생을 기준으로 따져봐도 일리가 있다고 보아서이다.

수를 시작으로 두는 것을 인생으로 견준다면 뱃 속에서부터 사람으로 볼것인가 하는 점의 차이라고 하겠다. 배 속에서부터 사람으로 본다면 수가 가장 처음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리고 불교적인 관점에서는 이것이 타당하다. 뱃속의 아이도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고래로 전해내려온 윤리관에서도 타당하다고 본다. 그 이유는 태어나면서 한 살이라고 하는 기준이 발생하는 것을 볼적에 당연히 태아도 나이를 10개월간 먹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이 서양의 사고방식이 들어오면서 급속히 깨어지게 된다. 서양에서는 정확히 태어나는 순간부터 따져서 365일이 되어야 한 살이라고 하는 것이 그 사실을 증명해준다. 그래서 생일을 물으면 ‘몇살 몇 개월’ 이라는 식으로 답변을 한다. 이렇게 태어나는 순간이 그 사람의 시작이라고 하는 면에서는 명리학(命理學)의 기준와 완전히 100% 호환이 된다. 그러고 보면 명리학은 동양적인 사상에서 출발을 했으면서도 실은 서양적인 사고방식이 흐르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사주를 본다는 것은 몇일 몇시에 태어났는가에 대해서만 관심을 보이기 떄문이다. 또 말이 길어졌는데, 결론은 그래서 금이 화보다 뒤에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점만 이해를 하면 충분하지만 그래도 덤으로 이런 주변의 상황까지도 이해를 하면 손해를 볼 일이 없다고 생각해서 생각이 나는대로 이야기를 해 드리는 것이다. 이만 화극금(火剋金)에 대한 이야기를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