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 제26장. 음양타령/ 7.마음속의 음양(陰陽)

작성일
2020-12-30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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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 제26장. 음양타령 


7. 마음속의 음양(陰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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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매가 그렇게 말하자, 우창도 웃으면서 답했다.

“하하~! 누이가 마음이 급해졌구나. 천천히 해도 이해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옛날 어느 도인이 말하기를 ‘마음은 파초(芭蕉)의 줄기’와 같다고 했어.”

“파초의 줄기라니? 파초의 줄기를 자른 것을 봤는데, 겹겹이 껍질로만 된 것이 전부던데? 속 줄기가 없잖아?”

“맞아, 사람들이 그 도인에게 ‘마음이 뭐냐?’고 물으면 그렇게 답을 했다는 거야. 왜 그랬을까?”

“그러게.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것이 마음이잖아. 올 때 마음 다르고, 갈 때 마음 다르다고 했으니까 고정된 것이 없으니 흡사 파초의 줄기를 벗겨봐야 결국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으로 한 것일까? 난 잘 모르겠어.”

“오호~! 누이가 바로 짚었네. 그것이 마음이라는 거야. 그러니까 헝클어진 실타래와 같이 두서(頭緖)가 없는 것이 마음이기도 한 거지. 그런데 불타의 가르침에는 허무한 존재인 파초껍질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의미심장(意味深長)하지.”

“그래? 그럼 뭐라고 하는 거야?”

“주인공(主人公)이라고 하지.”

“주인공이라고? 연극을 할 적에 주연을 맡은 사람을 말하는 거야?”

“맞아. 인생이란 배우가 무대에서 연극을 하는 것과 같다는 거야. 저마다 맡은 역할은 다르지만 저마다는 모두 주인공이니까 말이야.”

“그럼 연극에 나오는 배우가 모두 내 마음이라는 말인가?”

“맞아. 스스로 머슴도 하고, 황제도 하고, 호랑이도 하는 거야. 그렇지만 주인공은 나 자신인 거야.”

“그러니까 나도 주인공이라는 말이잖아? 내가 춘매인 것은 주인공이고, 안마하는 것이나, 오빠와 밥을 해 먹는 것이나,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희희낙락(喜喜樂樂)하는 것은 모두 배우라는 말이야?”

“그렇지.”

우창의 말을 듣고서 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염재의 표정을 보면서 우창이 물었다.

“어떤가? 염재는 이해가 되었는가?”

“예, 쉽지는 않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에 따라서 맡은 역할이 서로 다를 수도 있겠습니까? 말하자면 어떤 사람은 왕의 역할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역적(逆賊)의 역할을 한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맞아. 그래서 사주팔자를 통해서 그 사람이 잘할 수가 있는 일과, 못하는 일을 살펴서 판단할 수도 있는 것이라네. 이제 점점 명학(命學)의 이야기로 방향을 잡아가는군. 하하하~!”

우창의 설명에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는 듯이 말했다.

“아하~! 그렇게 되는 것이었군요. 그러니까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 내면의 주인공은 유일한 자신의 존재라는 것이네요. 명판관(名判官)인 포청천(包靑天)이 청렴하게 백성을 돌보는 것은 그 역할을 맡은 것이기 때문이고, 실체는 내면에서 드러나지 않은 채로 존재한다는 것이 아닙니까?”

“맞는 말이네. 그렇게 보는 것이 불교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가 있겠네.”

“그렇다면 그 마음의 작용에 대해서 여쭙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일을 낙천적(樂天的)으로 생각하고 좌고우면(左顧右眄)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음양으로 어떻게 대입하면 되겠습니까?”

“그야 양(陽)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하겠지. 이에 상대되는 사람은 어떤 경우가 되겠는가?”

“낙천적인 사람과 대비하는 관점이라면 매사를 비관적(悲觀的)으로 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삶의 자체도 우울하게 볼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우울은 어둡고 낙관은 밝습니다. 이것은 명암(明暗)의 논리로 보는 음양관(陰陽觀)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렇게 보면 되겠습니까?”

염재가 이렇게 말하자 우창도 동의했다.

“옳지, 틀림없네.”

그 말을 듣고 있던 춘매가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양에 해당하는 사람이네? 항상 고민하고 우울할 틈이 없으니 말이야. 이건 좋은 건가?”

춘매의 말에 우창이 설명을 했다.

“음양의 이치에는 절대적으로 좋거나 나쁜 것은 없다고 하지 않았어? 다만 그러한 현상이라고 이해만 하면 되는 거라네.”

“뭐야? 어떻게 낙천적인 것이 좋고, 비관적인 것이 나쁘다는 것은 누구라도 다 아는 것인데 그렇게 보면 안 된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춘매가 다시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묻자 우창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묻지 말고 낙천적인 사람의 단점(斷點)과 비관적인 사람의 장점(長點)을 묻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하하~!”

“아, 맞다. 낙천적인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면 안 좋은 이유도 있을 것이고, 비관적인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라면 좋은 점도 있을 테니까 어디 이해할 수가 있게 설명해 줘.”

춘매의 말에 우창이 풀이를 해 줬다.

“그러니까 낙천적인 사람은 매사에 신중(愼重)하지 못한 단점이 있지. 그래서 깊이 생각하고 판단해야 할 적에 그러한 것이 잘되지 않아서 남에게 속거나 사기를 당할 수가 있는 것인데 그것을 마냥 좋다고만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아하, 듣고 보니까 그렇겠네. 그렇다면 비관적인 사람의 장점도 있단 말이지? 그건 또 뭘까?”

“비관적인 사람의 장점은 항상 현실의 이면(裏面)을 들여다보게 되기 때문에 신중하고 조심스럽고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사람이지. 이런 사람은 웬만해서는 남의 술수에 걸려들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관직(官職)이 높은 사람이라면 이렇게 되어야만 자신의 직무(職務)를 잘 수행할 수가 있을 것이네.”

“와우~! 정말이네. 듣고 보니까 무슨 뜻인지 알겠네. 음양의 관점으로 봐야 하는 이유를 이제 제대로 이해했어. 그러니까 좋고 나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은 밝은 면을 보고 있다면, 또 한 사람은 어두운 면을 보고 있는 차이잖아.”

우창은 춘매가 하나라도 배우려고 열심히 분발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답게 보였다. 그대로만 공부를 한다면 오행의 이치에서 자유롭게 노닐 날도 멀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염재를 바라보고 말했다.

“자애(慈愛)로운 사람이 있다면 그 상대에는 어떤 사람이 있을까?”

이번에는 염재가 잠시 생각하고는 대답을 했다.

“자애로운 사람의 상대라면 흉포(凶暴)한 사람이 있겠습니다.”

“아닐세. 다시 생각해 보게.”

“예? 그것이 아니라면...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상대일까요?”

“인색(吝嗇)한 사람이네.”

“아, 자애는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인색한 사람은 무엇이든 남에게 주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이 되는 까닭네요. 과연 흉포한 사람과는 다른 것을 분명히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흉포한 사람의 상대에는 어떤 사람이 되겠습니까?”

“선량(善良)한 사람.”

우창의 말에 춘매가 손뼉을 쳤다.

“아하~! 맞아. 선량한 사람은 흉포한 사람과 짝이 된다는 말이 이해가 되네. 나도 자애롭고 선량한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춘매가 그 의미를 깨달았다는 듯이 말하자 우창이 다시 춘매에게 말했다.

“아, 누이가 잘 이해했구나. 그렇다면 누이에게 다시 물어볼까? 자애롭고 선량한 사람이면 단점이 뭘까?”

“단점이 아무리 많아도 난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흉포하고 인색한 사람이 되고 싶진 않단 말이야.”

“어허~! 어제도 말했지만 양 끝의 극단적인 곳에 머물면 중생(衆生)인 거야. 언제나 그 중간 어딘가에서 머무르라고 하지 않았어?”

“맞아. 그랬어. 그렇다면 자애롭기도 하고, 포악(暴惡)하기도 하며, 선량하기도 하고, 악독하기도 하다면 그게 도인인 거야?”

“아니지.”

“그럼 무슨 말이야? 뭔가 이해가 된 것처럼 생각이 되었다가 다시 깜깜해지네.”

춘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우창이 종이에 글을 썼다.

277 선악

춘매가 무슨 뜻인가 하고 글자를 들여다 보자 우창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하~! 자애로울 것도 없고, 흉포하지도 않고, 선량하지도 않으면서 인색하지도 않으면 그 사람이 바로 잘 사는 사람이라고 해야지. 이런 사람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

“뭐야? 그게 도인이라고? 뜨뜻미지근한 사람이지~!”

춘매가 얼른 답했다. 아무래도 우창의 말이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러자 우창이 다시 말했다.

“누이의 생각이 무엇인지는 알아. 그렇지만, 자애와 흉포의 중간에서 머물면서 때론 자애롭고 또 때론 흉포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인이라고 할 수가 있는 거야. 또 때로는 인색하고, 또 때로는 선량하면서 다시 때로는 인색할 줄도 알아야 그 사람은 아무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거야. 너무 허허롭게 웃으면서 무골호인(無骨好人)으로 살아간다면 가정을 유지할 수도 없고, 자칫하다가 자신도 먹여 살리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남에게 폐만 끼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지. 하하하~!”

“아, 그럴 수도 있겠네. 그건 아니지. 호호호~!”

춘매는 그제야 또 이해가 되었다는 듯이 환하게 웃는 것을 보던 염재가 말했다.

“스승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해 보니 어제부터 계속해서 관통(貫通)하는 이치가 명료하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편중(偏重)을 피하고 균형(均衡)을 이루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옳지~! 염재가 핵심을 짚었군. 틀림없는 이야기네.”

“그렇다면 음양의 이치란, 상대적인 것을 먼저 깨닫고 난 다음에 그 중간쯤에 머물면 제대로 이치를 깨닫고 살아가는 자유인이라는 뜻이 아닙니까?”

“왜 아니겠나. 하하하~!”

“참으로 명쾌(明快)하신 말씀입니다. 아무리 마음이 천변만화(千變萬化)로 전개가 된다고 하더라도. 머무는 곳이 치우치지 않은 곳에서 균형을 이룬다면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자신을 지키면서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다. 참으로 귀중한 가르침이십니다.”

“염재가 핵심을 제대로 꿰뚫었네. 하하하~!”

“흡사 태극권(太極拳)을 연마하는 것과 매우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팔을 뻗되 완전히 뻗는 것이 아니고, 무릎을 구부리되 완전하게 구부리지 않습니다. 항상 어중간한 그 어느 지점에서 동작하는 것은 급변하는 상황을 만나더라도 순식간에 변화할 수가 있도록 하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맞아~! 염재가 적절한 비유를 들었네. 하하하~!”

우창이 흡족해서 웃자 염재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태극권에서는 펴지도 않고 접지도 않는 이치를 명학에서는 어떻게 적용(適用)이 되는 것입니까? 음양만으로 명학을 설명할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 어떻게든 적용되지 않겠습니까?”

“당연하지. 그 사람이 태어날 적에 타고 난 것을 일러서 천명(天命)이라고 한다네. 천명은 선천적(先天的)인 것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고, 다른 말로는 본심(本心)이라고 한다네.”

그러자 가만히 말을 듣고 있던 춘매가 물었다.

“본심은 나도 많이 들어본 것이네. 그런데 본심은 누구나 같은 거야? 아니면 사람마다 다른 거야?”

“누이가 그렇게 묻는 이유가 있겠지?”

춘매에게 우창이 다시 물었다.

“누구나 마음은 천심이라고 하잖아. 그래서 물어 본 거야.”

“그렇다면 누이는 어떻게 생각해?”

우창은 춘매가 자기의 의견을 말하도록 짐짓 되물었다. 때로는 답을 알려주기보다는 생각의 자락을 잡고 추적하면서 말하는 것도 궁리하는데 오히려 도움 될 것으로 여겨서였다.

“내 생각에는 사람의 마음은 저마다 다른 것으로 보여. 태어나면서부터 자애로운 사람도 있고, 흉포한 사람도 있고, 미련한 사람도 있고, 음흉한 사람도 있는 것 같은데 왜 모든 사람의 마음은 선량하다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아, 그건 맹자(孟子)의 영향을 받아서 그래.”

“맹자? 공자왈맹자왈이 왜 생각나지? 호호호~!”

“그만큼 맹자의 영향이 컸다는 것을 의미하지.”

우창이 맹자를 말하자 염재가 말했다.

“맹자라면 성선설(性善說)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렇다네. 그가 모든 사람의 성품은 선하다고 하는 바람에 학문의 오류(誤謬)로 인해서 다들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부작용(副作用)이 생긴 것이라네.”

“아니, 그렇다면 스승님의 말씀으로는 그것이 아니라는 뜻입니까?”

우창의 말에 의아해진 염재가 다시 물었다.

“당연하지.”

“설명을 해 주십시오.”

“성선설이야말로 이론(理論)과 실제(實際)의 오류라고 봐야지.”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오류라고 하시는 것은 전혀 참고삼을 가치가 없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물론이네. 맹자가 선량했다면 그것은 인정하겠지만, 부분적(部分的)인 것을 일반화(一般化)로 확장(擴張)해서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고자 한 것이 바로 오류라는 말이네.”

“아,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됩니다. 그렇다면 순자(荀子)는 어떻습니까?”

“성악설(性惡說)을 말하는 것이겠지?”

“그렇습니다.”

“물론 순자도 치우치긴 했지만, 그 근저(根底)에는 맹자의 오류가 있었으니까 순자만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네. 오히려 순자로 인해서 치우친 관념적(觀念的)인 본성(本性)의 의미를 다른 관점에서 살펴볼 계기(契機)가 되기도 했으니까 말이네.”

우창의 설명을 듣고 난 염재는 더욱 궁금증이 증폭되어서 다시 물었다.

“정말 스승님의 해석이 궁금합니다.”

“그렇다면 어디 물어볼까? 맹자의 주장은 음일까, 양일까?”

그러자 춘매가 얼른 나섰다.

“그건 내가 답을 해 볼게. 마음이 선량(善良)하다는 것은 양이고, 마음이 흉악(凶惡)하다는 것은 음이 되는 것이잖아? 이제 음양을 공부하고 보니까 그런 것도 질문을 받자마자 바로 생각이 나네. 신기하게도 말이야.”

“그게 내공(內功)인 거야. 하하하~!”

염재가 다시 물었다.

“스승님의 말씀으로는 양이 있으니 필연적(必然的)으로 음도 생기게 되어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맹자의 성선설로 인해서 순자의 성악설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의미로 보면 되겠습니까?”

“그렇다네. 다시 물어볼까? 자연(自然)이란 말은 무슨 뜻인가?”

“자연(自然)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것이 사람의 마음에서조차도 그렇게 된다는 의미입니까? 사람들이 선하다고 하니까, 순자는 그렇게 말하는 것도 완전하지 못하니까 절반에 해당한다는 듯이 사람은 악하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자연의 균형에서 본다면 오히려 적절한 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맹자의 선설(善說)이 없었다면 순자의 악설(惡說)도 또한 한쪽으로 치우치고 말았겠습니다.”

“당연하지. 순자는 바로 그것을 지적함으로써 흉악한 사람들이 마음대로 활개를 치고 선량한 사람들을 우롱(愚弄)하는 것을 차단(遮斷)하고자 했던 것이니 어찌 보면 공로자(功勞者)라고 해야 할 것이네. 하하~!”

“오늘 제자는 심성(心性)에 대해서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바탕이 선하다고만 생각했었던 것조차도 한쪽에 치우친 것이었다는 가르침이 가슴을 후벼팝니다.”

“그런가? 다행이네. 관청에서 실무를 하면서도 느낀 바가 있었지 싶군. 어디 그 이야기를 들어볼까?”

“예, 때로는 백성들이 억울(抑鬱)하다면서 들고 와서 판단해주기 바라는 민원(民願)을 접하면서 과연 인간이 이렇게까지 잔인(殘忍)할 수가 있을까 싶은 일도 많은데, 그래도 바탕은 선하다는 생각으로 인해서 그 사람도 원래는 악한 것이 아니었으나 환경이 나빠서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교화(敎化)를 하면 다시 원래대로 선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기준을 갖고서 응대하였던 것이 생각해 보니 우습기조차 합니다.”

“오호~! 그것을 깨달았으면 이미 절반은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로군. 실로 교화는 원래 불가능한 것이라네. 그냥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은 맹자로부터 비롯된 착각(錯覺)일 뿐이지. 그것도 거대한 착각 말이네.”

우창이 이렇게 말하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염재가 다시 물었다.

“무슨 뜻인지 설명을 듣고자 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어디 생각해 보세. 가령, 산이나 물과 같은 자연은 교화가 될까? 그러니까 누군가 강제로 그 본성을 바꿀 수가 있겠느냐는 말이네.”

“자연은 물론 교화의 대상도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은 교화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교육(敎育)이 아닐까요?”

“그럴까? 우선 자연의 모습을 좀 생각해 봐. 가령 오리가 물에서 살기 위해서 물갈퀴가 생기고, 토끼가 천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귀가 커진 것은 누가 그렇게 한 것일까?”

“그야 자연이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이 아닙니까?”

“과연 그럴까?”

“음, 스승님의 말씀으로는 그것이 아니라는 뜻인가 봅니다.”

“당연히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라네. 다만 적응(適應)을 하면 살아남고,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淘汰)될 뿐이네. 그러자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스스로 생존(生存)을 위해서 환경에 적응해야만 했겠습니다. 그래서 발가락에 물갈퀴가 생기고 토끼는 귀를 크게 했겠습니다.”

“맞아, 그것이야말로 자연에 스스로 맞춰가는 것이라네. 여기에 교화(敎化)라는 의미로 포장을 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맹자는 틀렸고, 순자는 옳았다는 말씀입니까?”

“아니지, 둘 다 옳기도 했고, 또 둘 다 틀리기도 했다는 말이네.”

염재는 우창의 말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예? 그건 무슨 뜻인지요?”

“모두 옳았다는 것은 인간의 심성은 선량하기도 하지만, 반면에 포악하기도 한 까닭이라네. 그리고 모두 틀렸다는 것은 선만 말하고, 악만 말한 것이었다네.”

“아, 다시 말하면, 음양의 양극단(兩極端)만을 말하고 그 중간의 균형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맞아.”

“과연, 명쾌하신 말씀입니다. 음양을 공부하고 보니 전적으로 동감하게 됩니다.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외부에서 억지로 교화시킨다는 것은 착각이라는 말씀이지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지.”

“그냥 흉악한 인간도 내버려 둬야 합니까?”

“아니지, 가둬야지. 남에게 해악(害惡)을 끼치는 존재는 격리(隔離)할 뿐이지. 교화하면 선량한 사람으로 거듭 태어날 것이라는 착각은 말라는 것이지.”

“그러면 교육(敎育)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까?”

“왜 의미가 없겠는가? 가르쳐야지. 다만 교화(敎化)가 아니라 교육(敎育)이라는 것을 명심하게.”

“교화는 ‘가르쳐서 변화시키는 것’이고, 교육은 가르쳐서 기르는 것‘입니다.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가르쳐봐야 변화하진 않는다네. 다만 옳고 그름을 깨닫도록 가르쳐서 기를 수는 있다네, 물론 그러한 영향으로 인해서 선악을 판단하는 능력이 커지는 것이고, 스스로 무엇이 옳고 그런지를 알도록 한다면 점차로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교육의 시작이고 끝이라네.”

“그러니까 스승님의 말씀은, 선악은 스스로 선택하거나 바꿀 수가 있다는 의미입니까?”

“그렇지. 스스로 선택하는 오리와 토끼처럼 인간도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남에게 지탄(指彈)받거나, 혹은 죄를 범하고 감옥에서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면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지.”

“그렇게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선악의 그 중간쯤에 있는 사람은 좋은 방향으로 효과가 있을 것이네. 그러나 악으로 치우친 사람은 그렇게 해도 답이 없을 것이니까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겠지. 그들은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가 될 것이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하겠지.”

“그래도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포기(抛棄)를 하지 않는 경우를 많이 접했습니다.”

“당연하겠지? 그래서 본성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네.”

우창의 말에 염재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자신의 행위에 의한 결과가 빤히 보이는데도 그렇습니까?”

“그래? 어떤 결과가 보이나?”

“악은 파멸(破滅)한다는 결과가 이미 있지 않습니까?”

“과연 악은 파멸할까?”

“예? 그런 것이 아닙니까?”

“아무래도 염재는 공직자이고 목민관(牧民官)이라서 백성을 믿는 마음이 있는 모양이군. 그것은 착각이라네.”

“참 어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사람이 선해진다면 참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나?”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몽매(蒙昧)한 백성을 가르쳐야 한다고 배웠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맹자의 가르침에 따라서?”

“아,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그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마음속에 선(善)을 세우는 순간 그 상대편에는 악(惡)이 자리하게 된다네. 밝은 태양을 바라본다면 그 뒤에는 반드시 검은 그림자가 존재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네.”

춘매가 이야기를 듣다가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

“와우~! 오빠의 말이 무슨 뜻인가 싶어서 몽롱~했는데 이제야 분명해졌어. 그러니까 사람은 스스로 어느 것을 택하든 저마다의 마음에서 출발할 것이지만 그래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사람에게는 가르쳐서 깨닫게 할 수는 있다는 것이었네.”

“누이가 오늘 제대로 깨달았네. 하하하~!”

그러자 춘매가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팔자공부는 해서 어디에 쓰나?”

“아니, 왜?”

“그렇잖아, 생긴대로 살텐데 사주팔자를 봐서 뭘 하겠느냔 말이야.”

“그야 열심히 공부해서 스스로 균형을 얻는 것만으로 이미 공부의 목적은 다 한 것이지. 그다음에는 누군가 균형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 찾아오면 또한 그것을 나눠서 기쁨이 두 배가 될 따름이라네.”

우창의 설명을 다 듣고 나서야 이해가 되었다는 듯이 말했다.

“맞아~! 그것이 사주를 공부하는 것의 본분이라는 거지?”

“옳지. 하하하~!”

“어려운 줄로만 생각했던 이야기가 이렇게 쉽게 풀릴 줄이야.”

“그것도 열심히 공부한 결과라네. 그야말로 교육(敎育)의 효과(效果)지.”

염재는 말이 없이 생각에 잠겼다. 우창과 춘매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곰곰 생각하다가 비로소 말했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스승님의 가르침으로 음양의 이치를 약간이나마 깨달았지 싶습니다. 물론 앞으로 또 더 공부가 되면 새로운 음양을 깨닫게 되겠지만 지금 알게 된 것만으로도 최소한 편견(偏見)은 벗어나지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염재가 고마운 마음을 이렇게 표시하자 우창도 묵묵히 미소로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