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반달(44) 항파두리

작성일
2021-05-23 16:09
조회
608

제주반달(44) [11일째 : 3월 18일(목)/ 1화]


항파두리(缸坡頭里) 항몽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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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항몽유적지를 만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법환포구에서 최영장군의 막숙을 보기 전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제주도에서까지 몽고군과 싸웠던 것까지는 생각할 상식이 부족했던 까닭이기도 하다. 제주4.3을 조금 이해하고 났을 뿐인데 또 몽고가 등장을 한다. 이 작은 섬에 웬 일들이 그리고 많았을까. 그래서 아무리 바쁜 걸음이지만 잠시 들려서 그 흔적을 살펴보는 것이 옳지않겠느냐는 생각이 여행가의 발목을 잡아 끌어서 잡은 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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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한라산을 서쪽으로 끼고 동쪽길을 타고서 제주시로 갔는데, 오늘은 반대로 한라산을 동쪽으로 끼고서 서쪽길로 항파두리로 향하는 여정이구나. 거리는 49km이고, 예상 시간은 1시간이란다. 그래 오늘은 도두봉에서 비행기와 놀아볼 생각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지나가는길이라고 해도 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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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쉬었다가 10시에 출발했다. 마스크 단단히 챙기고 빠진 것은 없는지 다시 둘러보고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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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인네는 아직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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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벛꽃이 제대로 피어나고 있다. 출입구 부근에 한 그루의 벛나무가 아침마다 인사를 건넨다. 그래서 반가워서 셔터로 화답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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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인네도 고단했던 모양이다. 오늘도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하면서 출발하는 마음은 여행 첫째날이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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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는 '매우 맑음'이다. 한라산의 설문대할망께서 누워서 주무시는 실루엣이 차창가를 스친다. 이렇게 되면 그냥 지나갈 수가 없지.

낭월 : 잠깐 세워 줄래~!
화인 : 볼만한 것이 없는데요?
낭월 : 그야 네 사정이지 나는 볼게 있으니까.
호연 : 예, 옆에 세우겠습니다.

차를 세우자마자 망원과 광각을 장착한 카메라를 둘레메고 커다란 삼나무들이 시야를 가리는 것을 피해서 걷다가 보니까 어느 집 마당이다. 둘러보니 가게의 상호를 적어놓은 큰 돌이 있는데 쥔 아지매가 마당에서 서성이다가 낭월을 쳐다본다.

낭월 : 안녕하세요~!(최대한 공손공손)
여인 : 무슨 볼일이 있으세요?
낭월 : 한라산을 찍고 싶은데 이 돌 위에 올라가도 될까요?
여인 : 거긴.... (옥상을 가리키며) 옥상에 올라가 봐요.
낭월 : 아, 그래도 되겠습니까? 고맙습니다.

그야말로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다. 차마 남의 집 옥상에 올라가고 싶다는 말을 못했는데 이 아지매는 천성이 낭월을 꿰뚫어보는 능력을 가지셨는지 바로 원하는 바를 이뤄주니 이야말로 관음보살의 현신이랄 밖에.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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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삼나무들을 헤치고 한라산의 풍경을 담을 수가 있었던것이다. 자주 느끼는 것이 있다면 나잇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백두옹(白頭翁)으로 인해서 억지어른 노릇을 하게 된다는 것이 고맙기도 하고 미안키도 하다. 백발의 좋은점이라는 뜻이다. 더구나 집을 나온지 열흘이 넘었으니 머리카락도 많이 길어서 더욱 은빛이 반짝이고 있으니 말이다. 스스로 나이를 잊고 있다가도 이렇게 공손한 배려를 받으면 나이를 먹는 것의 좋은 점도 있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ㅎㅎ

풍수학에 전하는 말이 있다.

「고일촌산(高一寸山)이요, 저일촌수(低一寸水)니라」

기준에서 3.3cm가 높으면 그것은 산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또 그만큼 낮으면 도리어 물이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보다 더 명백하게 산수(山水)를 밝힌 말도 없지 싶다. 특히 사진을 찍을 적에는 더욱더 실감()하고 절감(感)하고 통감()한다. 계단 하나를 올라가는 것과 내려가는 것에 따라서 풍경이 확확 달라지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이 말이 얼마나 현실적으로 산천을 누비던 지리학자의 손끝에서 나온 말인지를 공감(共感)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탁상에 앉아서 풍수를 상상으로 궁리하는 안방풍수는 도저히 깨달을 수가 없는 영역일 것이다. 하물며 옥상이라니, 최소 3m의 높이를 얻었으니 얼마나 고맙겠느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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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도구이다. 전동사다리 말이다. 이녀석까지는 아니라도 최소 3m정도의 높이만 되는 것이라도 차에 싣고 다녔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이다. 그렇다고 배낭에 지고 다닐 수도 없고... 천상 트럭에 실어야 할 모양인데..... 현실적으로해결방법이 있을지 아직도 생각 중이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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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몽유적지는 뭘 보러 온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눈을 위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지식창고를 채우기 위해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가능하면 그 시절의 그 일들을 지난 일로 생각하기 보다는 오늘 목전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느낌으로 이해를 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래야 막연한 느낌이 아니라 생생한 경험으로 여운을 남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화인 : 여기에서는 뭘 보게 되나요?
낭월 : 아마 별로 볼 것은 없을 게다.
화인 : 그럼 왜 오셨어요?
낭월 : 느끼러 왔지.
화인 :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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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은 오감만족(五感滿足)이다.

절경(絶景)은 눈이 만족하고
자연의 소리는 귀가 만족하고
풍겨오는 향취는 코가 만족하고
맛난 별미는 혀가 만족하고
간지르는 바람은 몸이 만족한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으니 바로 마음의 만족이다. 그것은 고인의 자취를 더듬으면서 그 시절의 마음과 조우(遭遇)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할 수도 있을 게다. 만날조(遭)에도 걸어가야[辶] 하고, 만날우(遇)에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나면 여정은 끝임없는 만남의 연속이 분명하고 그 만남은 그냥 지나칠 수도 있고, 심금을 울릴 수도 있으니 무엇을 느끼든 온전히 자신의 몫일 따름이다. 그리고 그것을 느끼는 정도는 자신의 지식창고에 무엇이 들어있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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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가지의 볼꺼리를 안내하고 있구나. 그렇지만 일일이 둘러볼 필요는 없지 싶다. 그런데 여기에도 새별오름이 있었던 모양인가? 사진을 봐서는 들불놀이를 하던 그 새별오름은 아닌 것으로 보이고, 또 여기에서 새별오름은 무척이나 멀고 새별오름에서는 몽고군과 싸웠다는 기록을 보지 못한 듯 싶은데....? 아무리 뒤져봐도 다른 새별오름이 없는 것으로 봐서 아마도 그 새별오름이었던가 싶은것으로 정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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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직지로만 남겨있는 풍경이다. 복원은 거의 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여서이다. 유적지라니까 생각나는 풍경은 베트남의 미산유적지가 떠오른다. 과연 유적지라고 하기에 딱 어울리는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그나마 전쟁유적지다 보니 남은 것은 없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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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은 여행기를 쓸 적에 읽으라고 있는 것임을.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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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바로 이것을 읽어 볼 때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디.....

강화도에서 진용을 정비한 삼별초군으로 시작하는 이야기구나. 하긴, 몽고와 싸웠다는 이야기는 강화도와 마니산 참성단 정도를 알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 당시에 강화도에서 팔만대장경을 새겼다는 것도 있긴 하구나. 그러고 보면 해인사의 고려대장경은 몽고군이 아니었더라면 태어나지 못했을 보물이었을 수도 있겠구나.

삼별초라.... 옛날에 중앙일보의 소설에서 읽어 봤던 기억이 가물가물.... 하긴 50년 전의 이야기이니까 그럴만도 하겠다. 오늘 여기에서 삼별초에 대해서 좀 공부해야 할 모양이다. 항몽유적의 주인공이 바로 삼별초라는 이야기니까 말이다. 삼별초란?




 

삼별초는 최씨 정권()의 사병()으로 좌별초()·우별초()·신의군()을 말한다. 그것이 경찰·전투 등 공적() 임무를 수행했으므로 공적인 군대에 준하는 것이다.

최씨 정권의 최우() 집권기에 나라 안에 도둑이 들끓자 용사()를 모아 매일 밤에 순찰, 단속하게 하여 그 이름을 야별초()라 하였다.


도둑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야별초를 나누어 이를 잡게 하였는데, 그 군사의 수가 많아지므로 이를 나누어 좌별초와 우별초라 하였다. 또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도망 온 자들로써 편성된 신의군과 함께 삼별초()라 하였다.


삼별초의 정확한 설치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사』에 보면, 야별초에 대한 기록은 1232년(고종 19) 처음으로 보이고 신의군 및 좌별초·우별초에 대한 기록은 1257년(고종 44)과 1258년에 각각 처음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야별초의 설치는 최우 때라 할 수 있지만, 삼별초로 형성된 것은 최씨정권 말엽이라 하겠다. 별초라는 임시군대의 편성은 이미 1174년 조위총의 반란 때 나타났다.


삼별초는 날쌔고 용감한 군대로 알려져 전투와 경찰, 그리고 형옥()의 임무를 맡았다. 경찰의 기능에 있어서는 당초 삼별초의 출발이 야별초에 있었고, 야별초의 출발이 도둑을 잡는 데 있었기 때문에, 삼별초가 도둑을 잡고 난폭()을 금지하는 것은 원래의 사명인 것이다.


그리하여 삼별초는 전국에 걸쳐 경찰권을 행사하였다. 형옥의 기능에 있어서는 죄인을 잡아서 가두기도 하고 죄를 심문하기도 했는데, 도둑뿐만 아니라 반역 죄인까지도 관할하였다.


군사 활동에 있어서 수도경비대·친위대·특공대·경찰대·전위대()·편의대(便) 등의 임무를 맡아 수행하였다.


1253년(고종 40) 고종이 몽골의 사신을 만나기 위해 강화에서 승천부()로 갈 때 야별초 80명이 평복 속에 갑옷을 입고 뒤를 따랐다. 1260년(원종 1)에는 원종이 몽골에서 돌아올 때 태손(: 후의 충렬왕)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제포()에 나가 왕을 맞아 호위하였다.


1254년 몽골의 차라대()가 침입하자 경상도와 전라도의 야별초 각각 80명씩을 가려 도성()을 수비하게 하였다.


특히 몽골과의 전투에서 처음에는 정부 정규군의 활동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1253년 무렵부터는 정부 정규군의 활동은 거의 없어지고 이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것은 병제()가 문란해 정부의 정규군이 무력해진 반면,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야별초 내지 삼별초를 강화한 데에 그 원인이 있었다.


이들은 전투에 있어서 결사적이었다. 야습()으로 적을 무찌르기도 하고 복병() 또는 협격()으로 적을 쳐부수기도 하며, 최선두에 서서 적을 공격하기도 하고 적의 소재를 정탐하기도 하였다. 또한『고려사』「병지()」에는 삼별초가 기동성이 강했기 때문에 권신()들이 자기들을 수호하고 보좌하는 부대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삼별초는 권신에 의하여 설치되고 권신에 의하여 지휘되었다.


삼별초는 경찰과 전투를 맡아 공적인 성격이 농후한 군대로서, 그 지휘자도 도령()·지휘()·교위() 등 국가관료가 배치되었다. 이렇게 사병이면서도 관군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도방()이나 마별초() 등의 사병보다 움직이기가 용이하였고, 이런 데서 김준()·임연()·송송례() 등이 정변을 일으킬 때마다 중요한 무력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성격의 삼별초는 대몽강화()가 이루어진 뒤에 이에 반발하여 1270년(원종 11)에 반란을 일으켰다. 독자적으로 정부를 세우고 정부와 원에 대항하여 진도()를 본거지로 삼아 3년 동안 싸우다가, 1273년 고려·몽골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섬멸당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별초 [三別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낭월의 여행기를 더욱 기름지고 알차게 해 주는 정보는 대부분 「한국민족문화대백과」로구나. 그래서 저자들께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이렇게 정리를 해 주신 덕분에 『고려사』든 『고려사절요』든 뒤질 필요도 없이 고스란히 뽑아놓은 알찬 정보로 여행기를 채울 수가 있으니 말이다. 왜 삼별초(三別抄)인가 했더니,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을 이르는 말이었구나. 처음 알았다. 여행의 묘미는 이러한 것을 알아가는 것에도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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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도를 그냥 지나치면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 반드시 렌즈에게 보여줘야만 한다는 것도 여행에서 얻는 경험적 지식이 된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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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롭게 한바퀴 돌아봐도 되겠다만 그것은 또 다음 기회로 미뤄둔다. 오늘은 유적지에 대해서만 공부하는 것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다음의 일정이 밀물처럼 들이닥치기 때문이기도 하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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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연 : 안에 들어가 봐야지요?
낭월 : 그래, 들어가기 전에 마음가짐을~!
호연 : 아, 알겠습니다. 이렇게 하겠습니다.
낭월 : 옳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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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봐도 그렇고, 나라잃은 난민을 봐도 그렇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쳤던 순국선열의 고마움이 새삼 뼈저리게 다가온다. 발을 붙일 곳이 없으면 존재감도 급락한다는 것을 매일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만큼의 나라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말이다. 이 한 몸을 의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있어왔는지를 새삼 생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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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몽순의비(抗蒙殉義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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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를 알아보기는 좀 어렵구나. 혹 누군가 써놓은 것이 있는지 찾아봤지만 아쉽게도 그런 내용은 찾지 못하겠구나. 제대로 읽어보려면 탁본이라도 떠야 하겠지만 그것은 어려운 일이니 사진을 최대한으로 크게 해 놓고서 읽어봐야 하겠다. 글을 지은 분이 리선근 선생이라니까 더 호감이 가는 까닭이기도 하다. 최대한 확대해서 살펴보는 것으로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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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드리노니, 항몽유적지를 관리하시는 분이 수고스럽더라도 2~3년에 한 번 씩만 보수를 해 준다면 방문자가 사진을 찍거나 내용일 읽어볼 적에 고마움이 저절로 우러나지 않을까 싶다.

새삼 느끼는 것은 카메라는 무조건 고화소가 최고임을 다시 느낀다. 잘 보이지 않아도 확대하면 또 읽을만 큼의 내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소니알사(R4)의 6,100만화소에 대한 찬양가이다. 아무리 확대해도 깨어지지 않고 보여주니 말이다. (쓰담쓰담~) 만약에 1억화소를 만들었다고 하면 참 고민이 많이 되지 싶기는 하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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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전시관을 둘러봐야 할 순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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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안내판은 비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아서 읽을만 하구나.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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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통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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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 국의 문자로 안내판을 작성한 성의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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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파편들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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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은 흔적이니까 이렇게라도 모아놔야 하는 것이 맞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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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마디의 말보다 그림 하나가 전해주는 효과는 엄청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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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래도 왜놈들에게 끌려나가서 동굴진지를 파는 것보다는 나았을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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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와 싸우겠다는데 고려군대가 치고 들어오니 우짠단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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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안 되는 줄을 알면 사기도 꺾이기 마련이다. 한을 품은 채로 세상을 하직하는 최후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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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년간 고려를 지배하면서 얼마나 많은 처자를 끌고 갔는지 그 수를 알 수가 없다고 하더니만 제주도에서도 비참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구나.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기황후( )가 떠오르는 것은 또 뭐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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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법환포구 앞의 범섬까지 이야기가 연결이 되는 구나. 그야말로 조각퍼즐을 맞추는 것과 같은 제주도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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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 공부 잘 하고 갑니다."

몰랐던, 혹은 대충 알았던 과거의 한 시절에 대해서 공감까지는 못되더라도 이해라도 하고 떠나게 되어서 고마운 일이다.

낭월 : 화인아 어떻더노?
화인 : 이런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어요.
낭월 : 잠시 둘러볼만 하제?
화인 : 정말 의미가 큰 시간이었네요. 싸부님 덕분입니다.
낭월 : 순의비를 향해서 묵념이나 하고 갈가?
화인 : 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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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에 대한 평가는 물론 제각각이다. 긍정과 부정이 공존한다는 의미이다. 군사정권이 자신들의 명분에 부합하는 면을 부각시켰다는 비판도 있음을 읽었다. 다만 그러한 것에 대해서까지는 생각지 않을 요량이다. 이유야 어떻던 간에 소중한 목숨을 바쳐서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했다는 것을 낮게 평가할 이유일 수는 없겠기 때문이다. 어차피 하나의 기준에는 두 가지의 견해가 있음은 음양의 이치 안에 존재하는 까닭이다. 최소한 몽고군을 괴롭혔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존재감은 살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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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주차장에는 벗꽃이 바람에 하늘거릴 따름이다.

(여행은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