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반달(61) 관덕정

작성일
2021-06-13 18:01
조회
426

제주반달(61) [17일째 : 5월 25일(화)/ 2화]


식당문 열 때까지 관덕정(觀德亭)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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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연이 아침을 해결할 곳으로 찾은 곳은 「순수한둠비」였더란다. 아침식사가 가능한 식당 중에서 맛있다고 소문이 난 곳을 찾았으려니 하고서 믿는다. 식당을 찾는데는 이골이 나 있는 호연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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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다 가깝기까지 하니 더욱 좋은 일이지. 9분 거리에 불과했으니까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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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너무 일찍 도착했다는 것을 문에 써붙인 시작시간을 보고서 확인했다. 인터넷의 정보로는 06시 부터라는 곳도 있고, 07시 부터라는 곳도 있었는데 현장에서는 07시부터 하는 것이 맞았다. 그래서 아직은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두 여인은 차에서 쉬기로 하고 낭월은 주변의 풍경을 볼 것이 있어서 얼른 카메라를 챙겨서 나섰고 호연도 앉아있는 것이 지루하니까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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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으로 가는 길의 입구 바로 앞에 제주향교가 있는 것을 놓치지 않고 차에서 봤기 때문에 문만 열어준다면 여기에서 30분을 보내는 것은 일도 아니겠다고 생각하고 가볍게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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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밥을 먹고는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바로 옆에 둘러보기로 한 목록 중에 하나였던 용연계곡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선 향교부터 둘러보고 용연계곡은 모두 같이 둘러볼 곳으로 방향을 정하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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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지방문화제 제2호인 제주향교이다. 그러나 문은 굳게 닫혀 있어서 들어갈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그 후로 낮에도 지나면서 들어가려고 했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마도 공개하지 않고 행사가 있을 적에만 문을 여는 모양이다. 관람객을 위한 공간은 아니었던 모양이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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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볼 수 있는 정보는 이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여기 왔었다는 흔적이라도 남기려고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는 전부였다. 시간이 아직도 33분이나 남았다. 다시 차로 돌아갈 것인지를 5초간 생각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직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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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가면 지척에 관덕정(觀德亭)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는 제주목을 둘러보면서 관덕정까지 가지 않고 멀리서 한 장 찍었는데 이번에는 관덕정을 살펴보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래도 충분히 30분의 시간을 알뜰하게 사용하는데는 아쉬움이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부지런히 걷다가 앞에 한 장면을 찍는데 호연이 뒤따라 오다가 그것을 또 담았던 모양이구나.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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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미화원의 옷을 입은 할머니가 길가에 어질러놓은 흔적들을 지우고 계셨다. 사진을 찍고 지나가는데 호연이 말했다.

호연 : 사부님, 길을 어질러놓는 인간은 모두 벌금을 물려야 합니다.
낭월 : 좀 그렇긴 하지?
호연 : 저렇게 나이 드신 할머니가 수고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낭월 : 꼭 그렇게만 생각할 일은 아니지 않아?
호연 :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낭월 : 만약에 쓰레기 버리면 싱가포르처럼 벌금이 고액이라고 하면?
호연 : 그렇게 하면 아마도 거리는 깨끗해질 것입니다.
낭월 : 아마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많겠지?
호연 : 그래야 합니다.
낭월 : 그럼 저 할머니의 일자라는 어떻게 될까?
호연 : 예? 일자리를 생각해 보지는 않았습니다.
낭월 : 그렇다고 일부러 쓰레기를 만들어드릴 필요는 없다네. 하하~!
호연 : 말씀을 듣고 보니까 그것도 음양의 이치인 것 같습니다.
낭월 : 말인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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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덕정은 바로 앞에 있었다. 불과 5분 거리로군. 햇살이 지붕으로 넘어오는 것을 보는 것은 언제봐도 기분이 좋다. 일찍 일어났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기도 하다. 새벽의 풍경을 이렇게 보는 것의 상쾌함이랄까? ㅎㅎ

호연 : 그런데 저렇게 사람을 찍는 것은 괜찮습니까?
낭월 : 왜? 초상권에 대한 생각이 든 건가?
호연 : 예, 그런 말도 들은 것 같아서 궁금합니다.
낭월 : 그야 문제가 될 수도 있지.
호연 : 그럼 사부님은 그것도 알고 계신 거지요?
낭월 : 우선 정면을 들이대고 찍으면 허락을 받아야지.
호연 : 저 할머니는 멀리서 찍어서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낭월 : 멀리서 찍었더라도 이름을 잘 붙여야지.
호연 : 그건 무슨 뜻입니까?
낭월 : 모델에게 모욕감을 준다면 기분이 나쁘지 않겠나?
호연 : 어떻게 하면 모욕감을 줄 수가 있습니까?
낭월 : 가령 청소하는 할머니를 찍었더라도 설명하기에 달렸으니까.
호연 :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습니까?
낭월 : 가령, 「젊어서 빈둥거리면 늙어서 이렇게 된다」는 식으로.
호연 : 아하~!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본인이 보면 기분나쁘겠네요.
낭월 : 퀵배달을 보고 아들에게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고 했다잖은가.
호연 : 맞습니다.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낭월 : 사물을 어떤 눈으로 보느냐가 중요하다네.
호연 : 정말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은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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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봐도 관덕정이 아니라 관덕루로 해야 맞지 싶다. 격에 맞지 않는 이름인 줄은 알지만 유물이기에 그것을 마음대로 바꿀 수가 없을 뿐이다. 예전에 이웃에 있던 어느 절의 이름이 「미타암」이었다. 주지스님께서 참으로 열심히 기도하시고 노력하셔서 규모가 상당한 절로 변모를 했다. 그런데도 절 이름은 미타암이었다. 주지스님은 그것이 못마땅해서 이름을 바꾸기로 했던가 보다. 언제부턴가 미타암의 안내판이 있던 자리에는 「미타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여전히 사람들은 미타암이라고 부를 뿐이었다. 그래서 처음에 이름을 잘 지어놔야 하는 것은 맞다.

계룡산자락에 토굴을 마련하고 이름을 「감로사(甘露寺)」라고 붙였더니 미타암 주지스님께서 놀러와서 보고는 한 말씀 하셨다.

"감로사의 이름은 너무 크잖여? 감로암이라면 또 몰라도 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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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만도 했지. 당시 살고 있었던 풍경의 사진 한 장을 보면 대략 짐작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때는 1997년 여름이었던 모양이구나. 당시의 감로사 법당 모습이다. 어느 공사판의 헌 판넬창고를 뜯어다가 조립해 놨으니 그 몰골이야 지금 봐도 참 허름하기 짝이 없구나. 그럼에도 이름은 감로사라니 그 분의 상식으로는 아무리 봐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었지 싶기는 하군. 그렇지만 낭월은 오늘을 본 것이 아니고 앞을 내다보고서 지은 이름이니 비록 초라한 18평짜리 건물이지만 남의 절 100평짜리 포집보다도 못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던 모양이다. ㅋㅋ

"계룡산이 너무 커서 균형을 맞추려고요. 하하~!"

짐작컨대, 아마도 그 말의 듯을 이해하지는 못했을 게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감로암(甘露庵)이라니 그 생각도 해 보긴 했지만, 미타암을 보면서 감로암은 사용하지 않기로 했음을 생각이나 하셨겠나 싶었는데   관덕정이 관덕루가 되지 못한 것을 보면서 문득 떠올려 본 그 시절의 생각 한 조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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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항상 덤벙대는 낭월의 천성을 고칠 방법이 없음을 종종 후회하지만 여간해서 고쳐지지 않을 모양이다. 사진의 저장방식을 확인하지 않았던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항상 파일의 형식을 로우(raw)파일로 저장을 하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저장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아마도 누군가 새로 들어온 책의 표지를 찍느라고 제이피지(jpg) 형식으로 바꿔놓은 것을 모르고 그냥 들고 다녔더라는 이야기이다. 로우파일이었더라면 해가 있는 하늘을 저렇게 구멍으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통탄을 하고 있는 게다. 그래서 다음엔 반드시 길을 떠날 적에는 저장하는 형식부터 살펴봐야 한다는 것을 또 하나 깨닫는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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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정의 관용도가 그야말로 천지차이다. 얄짤없다고 하지 않는가. 지나간 것은 돌이킬 수가 없고, 더러 아쉬운 장면은 포기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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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하르방이 다 같겠거니 했다. 그런데 불상도 고려불상과 조선불상이 다르듯이 하르방도 세월따라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껴졌다. 뭔가 엄숙해 보이고 무게감이 있어 보인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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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관덕정의 하르방은 역사가 있는 것이었다는 말이로구나. 제주읍성에 있던 2개의 하르방을 관덕정에 세워놓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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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322호인데 제대로 잘 찍어놔야지. 정식으로 관덕정의 증명사진을 찍었다. 이렇게 찍을 적에는 나름대로 조심을 한다. 특히 기울지 않도록 하는 점이 신경쓰여서이다. 관덕정을 지은 사람은 세종30년에 제주목사를 지냈던 신숙청(辛淑晴)이 군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였더란다.

관덕(觀德)의 이름은 '사자소이관성덕야(射者所以觀盛德也)'라는 뜻에서 왔더란다. 뜻은 '활을 쏜다는 것은 왕성한 덕을 보는 것이다.'라는데 앞뒤가 맞는 것인지 잘 모르겠군. 활을 쏘는 것은 마음을 집중하는 공덕이 있다고 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왜 덕이 왕성해지는지 잘.... 여하튼 이 글귀의 출처는 『예기()』라는데 그 책은 제목도 본 적이 없었지 싶다. 보통은 시경에서 따오는데 여기에서는 예기가 나오는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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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덕정도 일제시대에는 수난을 겪었었구나. 무엇 하나라도 온전히 둔 것이 없으니 말이지. 에구~ 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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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편 하르방도 한 장 찍어야지. 그런데 원래 하르방은 수문장격이 아니었나? 그렇다면 관아의 정문에서 자신의 일을 해야 할텐데 어쩐 일로 관덕정을 지키고 있는 역할로 전락되었단 말인가? 이것도 일제의 흔적이라면 얼른 되돌려 놔야 하는 것이 아니겠느냔 말이지. 성읍민속마을에서는 그래도 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관덕정을 자세히 보니 이러한 것도 보여서 아쉬움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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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의 글씨가 호방해 보인다. 한때는 관덕당(觀德堂)이라고도 했었구나. 그래도 훨씬 낫군. 원래의 목적에 활쏘기 위한 것이라서 관례상으로 '정'을 붙였던 모양인가 싶기도 하다. 원래의 관덕정 현판은 제주판관 고덕종이 안평대군에게 부턱해서 써줬는데 후에 불타버리고 없어져서 선조때에 정승을 지낸 이산해()가 쓴 것이란다. 이렇게 오래 된 건물에 전설이 없으면 섭하지. 그래서 전설을 찾아서 네이버삼천리를 한다.




제주목사 신숙청이 관덕정을 지을때 전국의 이름난 목수들을 한 데 모아 지었으나, 알수 없는 이유로 인해 다 지으면 무너지고 다시 지으면 또 무너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목수들이 이번에는 무너지지 않고 튼튼하게 지으리라 하고 공사에 열중하는데 한 노인이 지나가다 공사현장을 보고 "또 무너지겠군"하고 중얼거렸고 몇몇 목수들이 이를 들었다.

그렇게 신중하게 지었는데도 무너지자 목수들이 이를 기억하고 수소문하여 노인을 찾아 조언을 들었다. 노인이 "상량식을 할때 닭이나 돼지를 제물로 바치면 안되고 사람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며 조언하고 목수들이 당혹스러워 하자 노인이 한 가지 방법을 알려 주는데 "아무 날, 아무 때 상량식을 준비할때 솥장수가 그 앞을 지나갈텐데 큰소리로 '상량'이라 외치면 솥장수가 죽을 테니 그를 제물로 바쳐라."라고 알려 주었다.

목수들은 그 조언이 황당무계하다고 느꼈으나 달리 방도가 없어 상량식 날 그대로 따라했더니 지나가던 솥장수가 무슨 소리인가 하고 주위를 살피려 머리를 들어올리나 솥들이 무거워 넘어져서 깔려죽고 죽은 솥장수를 상량식 제물로 바치니 공사가 무너지지 않고 원래 목적대로 무사히 끝낼수 있었다 하더라.




무슨 전설이 이렇노. 그래도 없느니보다는 낫지 뭘 그랴. 그런데 왜 하필이면 솥장수가 피해를 당해야 하지? 그 연관성이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요리조리 궁리를 해 봐도 끌어다 붙일만한 꺼리가....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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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을 들여다 보니까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이라는 글이 보인다. 아니, 제주도에서 호남이라니 이건 또 무슨 글인가 싶었지만 당시에는 제주도가 따로 독립적이지 못하고 전라도에 소속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짐작으로 타협을 한다. 이 편액을 쓴 사람은 1881년도에 제주방어사를 지낸 박선양(朴善陽)의 글씨라고 하는데, 이렇게 글이라도 한폭 걸려있어야 그 이름을 찾아서 거론해 주니 그 시대의 선비들도 그러한 정황을 알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군.

그리고 초대형의 현판에는 「탐라형승(耽羅形勝)」이라고 썼는데 이 글씨는 숙종 42년에 김영수(金永綏)가 당시 제주목사로 있으면서 썼단다. 의미는 '제주는 가장 뛰어난 곳'이라는 정도로 보면 되겠다. 호남이 아니어서 다행이구나. 한산도의 「제승당(制勝堂)」도 그의 글씨라고 하니까 큰 글씨를 쓰는데 명수였던 모양이다. 가만, 한산도 제승당도 둘러 봤던 적이 있었는데.... 언제더라.... 이번에는 묵은 사진폴더를 뒤적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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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렇게 헛일 삼아서 찍어둔 사진 한 장이 갑자기 광채를 발하면서 등장한다.

"두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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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승(勝)'자가 완전히 한 사람의 작품이 맞구나. 그나저나 이때가 언제냐? 2017년 8월 20일이었구나.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아침에 통영에서 배를 타고 한산도에 가서 둘러봤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당시의 연장은 알이(R2)카메라에 렌즈는 24-240이 수고를 했군. 참 잘 사용했던 연장이었지. 지금의 연장에 비하면 원시인의 돌도끼라고 해야지.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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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관덩정은 제주4.3사건의 발화점까지도 모두 지켜보면서 그 자리에 버티고 있나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수를 했는데 1834년에는 목사 한응호()가 중수한 다음에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일반인이 갖고 있는 것을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에 보관하게 되었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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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정이 지은 중수기도 있는데 이것은 한응호가 쓴 것이구나. 내용을 읽어 볼 겨를이 없지만, 그 중에서 '제주백성의 굶주림을 구휼하기 위해서 공사를 벌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말에는 가슴이 뭉클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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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켠에는 선덕대(宣德臺)가 새겨진 단이 있는 것으로 봐서 중요한 날에는 여기에서 행사를 했을 것으로 짐작만 해 본다. 호연이 자꾸 시계를 들여다 보는 것으로 봐서 07시가 되기 전에 가야 할텐데 이렇게 천하태평으로 관덕정과 놀고 있는 것이 걱정되는가 싶기도 하지만 나도 시간은 챙기고 있다.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았잖여?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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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대의 뒤쪽으로 세워져 있는 하르방도 지방문화재라던가 그렇다지. 그냥 지나치면 또 그만이지만 눈여겨 봐주면 이런 것도 눈길이 멈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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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덕정의 오른쪽 앞에는 기간지주가 서 있다. 말하자면 깃발계양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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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찰을 가보면 당간지주(竿)가 서 있는데 당간을 세우는 기둥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법회를 할 적에 거대한 두루마리식 불화를 게양하는 용도로도 쓰는데 보통은 볼 수가 없으니까 뭐하는 물건인지 잘 모르기도 한다.

 

당간지주[인터넷자료: 당간지주]


이렇게 사용한다는 의미이다. 야외법회를 할 적에 사용하는 용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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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것의 이름은 기간지주(旗竿支柱)였구나. 이름이 붙어있지 않았다면  으례히 그렇듯이 '당간지주'라고 했을 텐데 다행이군. 깃대를 세우는 기둥이라는 뜻이니 매우 적합한 이름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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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먼저 3월에 제주목에 왔을 적에 앞에 있는 윗층이 종루인지 고루인지 확인을 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래서 눈길을 돌려서 제주목의 정문으로 가서 다시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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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진해루의 출입문은 굳게 닫혀 있다. 그리고 안에 들어갈 일은 없으니 문이 열려있더라도 들어가지는 않았을게다. 그냥 윗층에 있는 것이 법고가 맞는지만 확인하면 되니까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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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 역시 먼저 본 것과 마찬가지로 법고였구나. 이렇게 확인을 했으니까 이제 아침을 해결하러 가봐도 되겠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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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월이 오는 것을 보고서 연지님과 화인도 차에서 내린다. 시간은 이제 07시 1분이로군. 어지간히 맞춰서 알뜰히도 놀고 왔구나. 이제 문을 열었을테니 아침을 먹으러 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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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으로 올라가서 자리를 잡고 보니까 요리하는 주방이 매우 깨끗해서 사진을 하나 담았다. 나이 지긋해 보이는 주방장의 바쁜 손놀림도 보면서....

호연 : 사부님은 뭘 드시겠습니까?
낭월 : 순두부~!
호연 : 두 가지입니다. 
낭월 : 순수한 둠비로~!
호연 : 왜 그걸 선택하셨습니까?
낭월 : 이 식당 이름이 뭐여?
호연 : 순수한둠비입니다.
낭월 : 그러니까 순수한 순두부를 먹을 밖에.
호연 : 아 그렇네요.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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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냉면집에서는 물냉면을 먹고, 함흥냉면집에서는 비빔냉면을 먹는 것은 당연하듯이 순두부집에서는 순수한 순두부를 먹어야 한다는 것도 물으나 마나지.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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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께서 창원에 사실 적에는 두부집을 하셨었다. 그래서 어린 주현은 항상 두부를 먹을 수가 있었고, 그야말로 오리지날 순두부를 아침마다 먹었으니 기억속에서도 고향의 맛이랄 밖에. 아침 메뉴로 순두부가 선택된 것도 고마울 일인데 그 맛도 먹을만 했다. 그래서 또 호연의 탁월한 선택에 감사해야 할 모양이다. 순두부의 고소하고 담백하고 간간한 그 맛은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가 없다는 것을 낭월은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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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하고 담백한 순두부를 먹다가 보니까 밥솥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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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좀 걸렸던 것은 밥을 새로 짓느라고 그랬던 모양이다. 낭월이 싫어하는 밥이 두 가지가 있는데, 식은밥과 데운밥이다. 이것은 아마도 행자시절에 공양주를 하면서 받았던 트라우마의 잔재일 수도 있겠군. 그러니까 다른 것은 다 감당이 되는데 식은밥과 데운밥은 안 반갑다. 된밥, 진밥 설익은 밥도 다 좋다. 설익은 밥은 물을 뿌려서 찌면 되고, 진밥은 국이나 물에 말면 되고, 된 밥은 비비면 되기 때문이다. 다행히 연지님은 항상 새밥을 지어주니 복도 이런 복이 또 없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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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제주에서 밥을 먹게 된다면 또 찾아와도 되겠다는 것으로 정리해 둔다. 눌은밥까지 알뜰하게 먹고서야 새벽부터 뛰어다니느라고 소모한 기운을 다시 가득 채울 수가 있었다. 이제는 또 다음 목적지로 향해야 하겠구나.

화인 : 맛있게 잘 먹었어요.
낭월 : 나도.
화인 : 어디로 갈 예정이세요?
낭월 : 5분 거리에 있는 용연계곡에서 놀고 가자.
화인 : 숙소는 3시부터 입실이 가능하다고 했어요.
낭월 : 그러니까 천천히 구경하면 되겠군. 잘 되었지.
화인 : 아직도 가보지 않은 곳이 또 있는 것도 신기합니다. 호호~!

(여행은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