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 제35장. 우성암(牛聖庵)/ 8.내화(內火)와 외화(外火)

작성일
2023-01-15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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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4] 제35장. 우성암(牛聖庵) 


8. 내화(內火)와 외화(外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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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쾌한 산중의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는 새날 아침의 공부 시간은 모두에게 기대감과 기쁨이 함께하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공부할 준비가 되자 자리에 앉아있던 지광이 손을 들었다. 웬만해서는 먼저 묻지 않았는데 오늘은 궁금한 점이 있었거나 혹은 다른 제자들의 지식창고를 채워줄 마음이었을 것으로 짐작한 우창이 물었다.

“오늘은 형님께서 시작해 주십니까? 어디 어떤 말씀이신지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모두에게 도움이 될 질문을 하실 것이 분명하지 싶습니다. 하하~!”

“내가 궁금한 것은 화(火)라네. 화맥(火脈)과 수맥(水脈)을 생각하다가 보니 이것은 대지(大地)의 현상이 아니냔 말이지. 그렇다면 사람의 몸에서 일어나는 수화(水火)는 어떨 것이며, 특히 아우님이 늘 말하는 마음의 화는 또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 것인지가 궁금했는데 어디 이러한 질문도 도움이 될 것인지는 나도 모를 일이네.”

지광이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알겠습니다. 형님께서 궁금하셨던 것이 인체(人體)의 화(火)란 말씀이지요? 그것은 화(火)의 음양으로 말씀을 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의학(醫學)에서는 군화(君火)와 상화(相火)로 말합니다. 신체의 내부에 있는 화(火)는 심화(心火)이고, 심장으로부터 발생하는 온기(溫氣)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인체의 혈액(血液)이 순환하고, 그로 인해서 모든 기관도 유연하게 움직여서 정상적으로 생활을 할 수가 있게 하는 것입니다.”

“오호~! 이름이 ‘임금의 불’이라는 것은 심장의 온기를 말하는 것이로군. 그렇다면 ‘재상(宰相)의 불’이라는 상화(相火)는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외화(外火)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외화라니? 바깥의 불이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불에도 내외(內外)가 있습니다. 군화는 음에 해당하고 상화는 양에 해당한다고 할 수도 있겠는데, 내화(內火)는 군화(君火)인 심화라고 한다면 외화(外火)는 태양(太陽)이나 열기(熱氣)가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지요.”

우창의 말에 지광이 다시 물었다.

“내화는 일정하게 체온(體溫)을 유지하는 것인데, 외화는 계절에 따라서 항상 변화하지 않는가?”

“맞습니다. 그래서 외화가 체온보다 낮으면 옷을 두껍게 입어서 내화가 달아나는 것을 방지해야 하는데, 특히 추위가 혹심한 겨울에는 동사(凍死)를 막기 위해서라도 체온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아, 체온을 조절한다는 것은, 외화가 체온보다 높거나 낮아서 일어나는 생존의 활동이라는 뜻이로구나.”

“내화는 항상 제 온도를 유지하고 있는데 외화가 자연의 현상에 의해서 변화하게 되면 그것에 적응하여 살아남아야 하는데 이것은 어찌 사람에게만 해당하겠습니까? 폭염(暴炎)이 이어지면 더위에 유난히 약한 닭들이 생존하기 어려운 것도 마찬가지이니 말입니다. 하하하~!”

“오호~! 아우님의 설명을 듣고 보니 사람이나 만물이나 자신의 내화를 환경의 외화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외화에 적응하고 사는 것이란 말이지 않은가?”

“뱀과 같은 동물은 외화에 스스로 변화해야 살아갈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외화에 따라서 내화가 변화하여 추운 겨울이 되면 체온이 강하되어 움직일 수가 없으므로 동굴에서 겨울을 넘긴다고도 합니다.”

“저런~! 모든 것이 내화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외화에 맞춰서 살아가는 생명체도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군.”

이렇게 지광이 이해가 되었다는 듯이 말하자 염재가 궁금한 것을 물었다.

“두 분 스승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심리적으로 내외화(內外火)는 어떻게 이해하는 것인지가 궁금해졌습니다. 마음의 외화와 내화도 설명해 주실 수가 있습니까?”

“그야 무엇이 어렵겠나. 내화는 열정(熱情)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우창이 염재에게 묻자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면 분발(奮發)하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것을 열정이라고 한다면 또한 내화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누군가 자신의 가족에게 위해(危害)를 가한다면 어떻게 되겠나?”

“가족을 해친다면 당연히 분노(忿怒)하게 될 것입니다. 아, 그것도 내화가 되는 것입니까?”

“당연하지. 이러한 경우는 어떻게 관계를 말할 수가 있겠나?”

우창이 다시 염재에게 묻자 잠시 생각한 염재가 말했다.

“외화가 내화를 극한 것으로 봐야 하겠습니까?”

“옳지, 그렇게 보면 되겠군. 밖에서 원인이 생겨서 내화가 발동하게 될 수도 있으니 원인은 대부분 밖에 있는 것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 말하자면 건드리지 않고 가만히 둔다면 내부에서 열이 발생할 이유는 없으니 말이네. 하하~!”

“말씀을 듣고 보니 과연 화의 내외(內外)에 대해서도 잘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특히 심화(心火)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마음의 불도 중요하지. 불이 훨훨 타오른다면 그 사람은 일함에도 맹렬한 힘으로 목적을 향해서 나아갈 것이니까 말이네. 그렇다면 물어볼까? 우리가 연구하는 학문은 어떨까?”

우창이 갑자기 묻자 염재도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학문은 더욱 오래도록 불타오르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순간적으로 타오르고 꺼져버리는 불이라면 끝을 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학문의 불은 병(丙)이 아니라 정(丁)이라야 하겠습니다.”

“옳지~! 맞는 말이네. 꾸준하게 타오르되 꺼지지 않아야 할 테니 말이지.”

우창의 설명을 듣던 현지가 손을 들고 말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참으로 오묘하네요. 과연, 오행의 이치를 벗어난 것은 없다고 봐도 될 정도가 아닌가 싶어요.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도 화(火)가 된다는 것은 생각지 못했어요. 급하게 타오르는 불은 양화(陽火)이고, 꾸준하게 타오르는 불은 음화(陰火)가 된다는 말씀에서도 음양의 이치를 깨닫게 되네요. 참으로 대충으로 알아서는 깊은 이치를 속속들이 깨닫는 것이 불가능하지 싶네요. 정말 생각할 점이 많아요.”

현지의 말에 진명도 한마디 했다.

“맞아요. 내부에서 타오르는 불이 없다면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 모쪼록 끊임없이 나무를 집어넣어서 불이 꺼지지 않게 해야 하겠어요. 불길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타오르지 않는다면 돌같이 굳은 사람의 정신세계는 절대로 변화하지 못할 거에요. 이렇게 활활 타오르는 불에 말랑말랑하게 녹아야만 비로소 재생(再生)이 가능할 것이고 이것을 견성(見性)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물론 연료가 되는 그 나무는 스승님의 가르침이 된다면 어떨까요?”

진명이 이렇게 말하자 우창이 답했다.

“참 좋은 말이로군. 맞아. 그렇게 계속해서 배우는 것은 목(木)인 연료가 되고 또 쉼 없이 익히는 것은 화(火)의 불길이 되는 것이라네. 무엇을 배우더라도 이와 같은 과정을 생략할 수는 없을 것이네. 그러다가 불이 꺼져버린다면 공부도 거기까지만 이르게 될 따름이니까 말이네. 하하하~!”

우창의 말에 진명이 다시 물었다.

“아, 맞아요~! 불이 꺼지기도 하듯이 공부하다가도 도중에 그만두게 될 수가 있는데 이것은 왜 그런 것인지 말씀해 주세요.”

“이유는 두 가지가 있겠지. 용광로에서 쇳물을 녹여서 다른 그릇으로 만들고 난 다음에는 더 이상 불이 필요 없듯이 원하던 공부가 끝났다면 더는 불길이 필요하지 않을 테니 자연스럽게 연료를 더 넣을 필요가 없고, 불도 그대로 사그라질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정상적으로 마무리가 되는 것이라고 하겠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연료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서 타다가 꺼지는 경우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네. 그러니까 불타다가 아직은 더 타야 하지만 연료가 부족해서 꺼지는 것과, 자신이 목적한 것을 이루고 나서야 꺼지는 것이라고 할까?”

이번에는 염재가 손을 들고 물었다.

“스승님, 그러한 경우에는 어떤 원인이 있겠습니까?”

“여기에는 또 두 가지의 원인이 있을 것이네. 그 하나는 스승이 연료를 주지 않아서 제자도 공부할 의욕이 사라질 수가 있을 것이네. 이 경우에는 제자는 그 불길이 꺼지지 않도록 또 다른 스승을 찾아서 계속 불을 태우면 되는 것으로 해결책을 찾으면 될 것이네. 또 하나는 스승은 계속해서 연료를 공급해 주고자 하나 제자가 그것을 원치 않을 경우도 있네. 그렇게 되면 또 불길은 도중에서 꺼져버릴 수가 있겠지.”

“과연 그럴 수가 있겠습니다. 제자가 연료를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것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지 다시 설명을 청하겠습니다.”

염재가 이렇게 말하자 대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설명했다.

“간단한 일이잖은가? 우선은 스승의 가르침이 열정은 있으나 자신이 원하는 것과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을 경우라네. 이것은 서로의 뜻이 다른 것으로 보면 될 것이네. 그리고 또 하나는 제자가 공부의 열정을 유지하지 못할 경우도 있겠지. 왜냐면 공부가 너무 힘들거나 자신의 목적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해서 포기(抛棄)를 하는 경우도 생길 수가 있으니까 말이네. 하하하~!”

“스승님이 가르치고자 해도 스스로 포기한다는 말씀을 들으니 문득 공문십철(孔門十哲)의 한 사람인 염구(冉求)가 떠오릅니다. 얼른 벼슬을 하러 가고 싶은데 공자는 계속 공부를 더 하라고만 하니까 스스로 공부를 포기하게 되는 이야기가 논어에 있었지 싶습니다. 과연 이치에 타당하더라도 제자가 그것을 깨닫고자 하는 마음이 부족하다면 당연히 그러한 현상이 생길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래서 내화(內火)는 문명지화(文明之火)라고도 한다네. 내면의 불은 문명을 만들어내는 까닭이라네. 가르침을 전하는 것과 그것을 배우는 것은 책으로 기록될 것이니 이러한 열정으로 인해서 세상은 점점 밝아지게 되는 것일 테니까 말이지.”

우창이 이렇게 설명하자 모두 이해가 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합장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조용하게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화련 보살이 손을 들었다. 우창이 눈길을 주자 조용히 말했다.

“말씀을 듣다 보니까 선승(禪僧)의 참선(參禪)과도 서로 통하는 것으로 보여서 말이에요. 참선하는 스님은 화두(話頭)를 들고 참구(參究)할 적에 간단(間斷)없이 하라고 하거든요. 중간에서 자꾸 끊어지게 되면 공부에 장애가 발생하게 되므로 호롱불이 꾸준히 타듯이 촛불이 꺼지지 않고 계속 타들어 가듯이 그렇게 해야 하는데, 오행의 공부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닫고 보니까 과연 학문에는 차별이 없다고 해야 하겠네요.”

“그렇습니다. 그릇을 만드는 도공(陶工)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릇을 빚어서 불가마에 넣고서는 며칠 동안 불을 계속해서 지펴줘야만 그릇이 제대로 구워진다고 합니다. 도중에 불이 꺼지거나 하면 그릇의 모양도 쓸모가 없이 되어버린다고 하니 세상만사는 화(火)의 이치로 해서 밝아지고 완성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하하~!”

우창이 이렇게 말하자 보살이 다시 말을 이었다.

“과연 목(木)을 공부하기도 쉽지 않았는데 화(火)의 공부도 그리 간단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었어요. 물질적인 관점에서 살피는 것도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유심론(唯心論)으로 논하는 말씀을 들으니까 아는 만큼만 보인다는 가르침이 실감 나네요. 부처님께 촛불을 켜고 향불을 붙여서 공양을 올리는 것도 모두 불이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어요. 이렇게 불을 만지면서도 불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를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참으로 우습기도 하네요.”

“자연의 불을 이용하면서 인류의 삶도 윤택해졌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불이 있는 곳에서는 문명도 존재한다고 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밥을 짓고 요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불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보면 이것조차도 그 범위를 제한할 수가 없을 정도로 광범위(廣範圍)하다고 보겠습니다.”

“맞아요. 그런데, 마음의 불이 바깥의 불길의 도움을 받는 것은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우창이 간단히 답을 하자 보살의 물음이 이어졌다.

“만약에 마음의 불길이 보인다면 스승의 불길은 매우 높고 넓게 타올라서 대지를 환하게 비출 것이고, 제자의 불길은 작고 약하게 타오르는 것으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왜냐면 스승의 가르침을 듣노라면 깜깜했던 머릿속이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조차 드는 것을 보면 말이에요. 그리고 다시 생각해보면 스승의 불을 제자의 불로 옮겨서 활활 타게 한다는 생각도 들어요. 스승의 불길이 활활 타게 된다면 제자도 그 불길을 옮기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수련할 것이니까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이치에 타당할까요?”

“예, 그렇습니다. 불길에 대해서 그 정도로만 관찰한다고 해도 충분히 깊은 사유라고 하겠습니다. 항상 그렇듯이 과열(過熱)이 되지 않도록 중화(中和)를 맞춰가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서도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우창이 동의하자 보살도 합장하여 고마움을 표시했다. 우창이 다시 생각이 났다는 듯이 말했다.

“화련 보살과 말씀을 나누다가 보니 또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내 심중(心中)에서 강력한 불이 타오르면 어느 누군가 그 불길을 끄거나 훼손하려고 해도 불가능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금강심(金剛心)이나 부동심(不動心)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작은 불이 바람을 만나면 흔들리고 더욱 센 바람을 만나면 꺼져버리게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촛불은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도 흔들립니다만, 거대한 활화산(活火山)의 불이라고 한다면 어떤 난관이 다가오더라도 더욱 활활 타기만 할 테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적천수(滴天髓)』에 말하기를 「기상모설(欺霜侮雪)」이라고 했습니다. ‘눈과 서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이것을 단순하게 병화(丙火)는 빛이기 때문에 태양으로 생각해서라고 이해했는데 오늘 이야기를 나누면서 생각해보니 중심이 잡힌 불과 같은 마음은 밖에서 어떤 흔들림이 접근하더라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창이 이렇게 설명하자, 이해가 잘 되었다는 듯이 보살이 말했다.

“맞아요~! 과연 부동심의 경지를 이렇게 오행으로 설명해도 말이 된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어요. 참으로 아름다운 오행이네요. 스스로 그러한 경지가 되도록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겠어요. 언제 일부러 시간을 잡아서라도 그 귀한 가르침을 공부하고 싶어요.”

“아, 적천수 말입니까? 언젠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우창이 이렇게 답을 하자 이번에는 거산이 손을 들고 말했다.

“정성을 다해서 해 주시는 말씀이 좀 어렵기는 합니다. 그래도 요지(要旨)는 이해가 되지 싶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가령 어떤 사람이 열이 나고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 이것은 과열(過熱)로 인해서 그렇게 된 것으로 봐서 이것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차가운 물수건으로 머리를 식혀주는 것만으로 좋아지듯이 지나친 것을 바로잡을 수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공부한다는 것은 속에서 불을 지피는 것과 같아서 머리가 아플 수도 있습니까? 요즘 제자가 그러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아프다고 할 수는 없는데 가슴이 답답하여 개운하지 못한 것이 어쩌면 이러한 현상과 연관이 있지 않은가 싶어서 여쭙습니다.”

거산이 이렇게 말하자 지광이 거산을 보면서 말했다.

“당연하지, 거산은 요즘의 공부가 다소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겠군. 그렇다면 하루는 쉬어서 해도 좋을 것이네. 가르치는 사람은 한 사람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충분히 중심이 잡힌 제자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서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이 하겠으나 거산과 같이 기본적인 공부가 부족한 입장에서는 당연히 열이 날 수도 있겠군. 오늘은 쉬는 것이 어떻겠나? 하하하~!”

지광의 말을 듣고서 보살도 거산에게 한마디 했다.

“그것을 지혜열(智慧熱)이라고 하지, 노인들은 ‘알음증’이라고도 했는데 이것은 두세 살의 아기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야, 갑자기 열이 나서 심하면 혼절(昏絶)하기도 한다네. 그래서 아이를 키우는 집에서는 항상 경면주사(鏡面朱砂)를 갖추고 있기도 하다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증세를 벗어나고 보면 아이는 또 정신적으로 부쩍 성숙해지는 것이라네. 그래서 ‘아기는 열이 날 적마다 한번 크고, 노인은 열이 날 적마다 한번 늙는다’는 말도 있다네. 문득 거산의 말을 듣고 보니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해도 되지 싶어서 한마디 한 것이야.”

보살의 말에 거산이 합장하고 말했다.

“과연 듣고 보니 틀림없습니다. 아이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도 그러한 현상이 있다는 것이 오히려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러니까 아이가 열병을 앓고 나서 성장하듯이 이렇게 두통을 앓고 나면 새로운 지식으로 발돋움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에 두통이 싹 사라졌습니다. 고맙습니다.”

거산이 머리가 상쾌해졌다는 듯이 말하자 모두 즐겁게 웃었다. 그러자 진명이 일어나면서 말했다.

“가르침을 듣다가 보니 어느 사이에 오시(午時)가 다 되었어요. 공부하다가 머리가 아파진 제자들은 어서 주방으로 도망을 쳐요. 호호호~!”

진명의 말에 거산도 따라서 일어나면서 합장을 했다.

“오늘의 불에 대한 가르침을 잘 익히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뜻깊은 시간을 갖게 해 주신 스승님께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스승님의 불꽃이 제자의 가슴으로 옮겨붙는 것만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우창도 이야기에 빠져서 시간이 흐르는 것도 잊었다가 점심을 준비하러 나가는 것을 보고야 오늘의 공부는 여기까지 라고 마무리했다. 모두 합장으로 감사를 표하고는 저마다 자신이 맡은 일을 수행하려고 일어났다. 우창도 평상에 앉아서 멀리 산 아래에 전개되는 풍경에 눈길을 주고 있을 때 염재가 다가와서 말했다.

“스승님, 쉬시는데 말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야 당연하지. 뭔가? 하하~!”

“실은 목생화(木生火)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할 수가 있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 말해 보게. 어디 들어봄세.”

“목(木)은 새로운 것으로 향해서 나아가는 힘이라고 이해해 봤습니다. 마음에서 생각하니까 그 힘은 내력(內力)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이것은 지구력(持久力)으로 생각해도 되지 싶습니다. 이러한 내력이 강한 사람은 난관(難關)을 만나더라도 돌파(突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힘찬 목은 결국 강력한 생화(生火)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길이 약해서 흔들리는 것에는 그 원인으로 안에 있는 힘이 약하다고 하겠으니 그것은 학문(學問)에 대한 동기(動機)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염재의 말에 우창이 동의하면서 말했다.

“당연하지~! 이렇게 모여서 서로를 격려하면서 잘 공부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발심(發心)의 동기가 부족한 사람이 있다면 아무래도 난관을 극복하지 못하고 도중(途中)에 탈락(脫落)할 수도 있는 것은 당연하다네. 그런 의미에서 아직은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기도 하다네. 하하하~!”

“제자가 보기에 우성암에 모인 대중은 모두 매일 새로운 열정으로 동기부여(動機附輿)를 하는 것이 보일 정도입니다. 그러니 누구 하나 물러날 마음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외력(外力)의 영향을 극심(極甚)하게 받는다면 또 어떤 현상이 생길지는 모르겠습니다. 밖에서 영향을 미치는 것에는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이유를 만들고자 한다면 무엇인들 안 되겠는가? 아무리 외력이 강하게 엄습하더라도 스스로 더욱 막강(莫强)한 힘을 갖고 있다면 절대로 흔들릴 이유가 없을 것이고, 외력에 밀린다면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이 되는 것과 같아서 바람을 탓할 수가 없듯이 공부하는 사람은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일이겠지. 다만 그중에서도 함께 공부하는 도반(道伴)이 있다면 울타리가 되어주고 바람벽이 되어서 격려해주고 위험에서 벗어날 수가 있도록 협력할 수가 있지 않겠나? 이것은 혼자서 하는 공부와 다르다고 할 수가 있겠군.”

“아, 맞습니다. 혼자서 공부하게 되면 도중에 작은 영향을 받아도 흔들리게 됩니다. 함께 공부한다는 것이란 이러한 효과도 있다는 것을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목생화(木生火)의 이치야말로 열정으로 공부하는 학인(學人)에게는 더할 나위가 없이 중요한 힘이라고 하겠습니다.”

염재의 말에 우창도 고개를 끄덕여서 동의했다. 잠시 생각하던 염재가 다시 물었다.

“목생화(木生火)의 이치를 알고 나니까 이번에는 화생토(火生土)의 의미도 생각해보고 싶어졌습니다. 이것은 하루를 궁리한 다음에 내일 다시 여쭤보는 것 이 좋겠지요?”

“그렇게 하지. 오행의 이치는 무엇부터 궁리해도 괜찮고 무엇을 적용해도 좋으니까 자꾸 생각하고 이어지는 이치를 찾아보면 된다네. 이렇게 하다가 기발한 생각이 난다면 다시 물어서 확인하면 서로에게 나눔이 될 테니 또한 좋은 일이지 않겠나? 하하하~!”

이렇게 말을 마치고서 일어나려던 염재가 다시 우창을 돌아보고는 자리에 앉아서 말했다.

“스승님께 문득 여쭙고 싶은 것이 생각났습니다. 목생화에 대해서 말씀을 듣고 보니 목극화(木剋火)는 어떤 상황이 되었을 적에 대입하면 좋을지를 알았으면 합니다.”

“오호~! 목극화 말인가? 가령 어떤 사람이 기분이 좋지 않은데 자꾸만 공부를 잘하지 못한다고 자기를 비난하는 말을 한다면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의기소침(意氣銷沈)하게 되지 않겠나? 그렇게 되면 열정이고 뭐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우울한 마음이 될 테니 이런 경우라고 한다면 목극화라고 할 만할까?”

“과연 틀림없는 말씀입니다. 도반들은 스승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이해하는데 혼자서만 무슨 말인지 몰라서 우울한 상황에서 누군가 상처를 주는 말을 한다면 그것도 목극화가 되겠지요?”

“뭐, 그렇게 봐도 되겠지만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수극화(水剋火)에 가깝지 않을까 싶기도 하군. 하하하~!”

우창이 갑자기 수극화에 대해서 말하자 염재가 다시 곰곰 생각하고는 물었다.

“스승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은 직접적으로 상처를 줬기 때문이란 말씀이신지요? 받아들일 만큼의 말은 격려가 되어서 목생화라고 하겠으나 오히려 그것이 과하여 듣는 사람에게 의욕을 잃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렇지, 맞는 말이로구나. 하하하~!”

우창이 이렇게 말하자 비로소 염재도 이해되었다는 듯이 합장하고는 상을 차리겠다고 식당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