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순례③ 경복궁 경회루

작성일
2019-04-28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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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순례③ 경복궁 경회루(慶會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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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은 매주 화요일이 휴관이다. 그래서 월요일에는 경복궁을 둘러보고 대신 화요일에는 나머지 네 궁을 둘러보는 것으로 일정을 잡았다. 집에서 새벽 6시부터 서둘렀던 것은 아무리 늦어도 10시에 경회루 입구에 도착해야 한다는 이유로 인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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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은 화요일만 아니면 관람이 되지만 경회루는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관람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아보고는 6일 전에 예약이 가능한 시간을 기다렸다가 입장권을 구입했던 것이다. 하루 세 번 입장이 가능한데 오전에 봐야 오후 일정이 원활할 것으로 보여서 잡은 계획대로 제 시간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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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역에서 산천을 타고 용산역에 내려서는 다시 지하철로 종로3가에 내려서 3호선으로 갈아타고 경복궁역에 도착해서 입장권을 바꾼 다음에 용성문(用成門)으로 들어가면서 경복궁 관람은 시작이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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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역 5번 출구를 이용해서 나오게 되면 당연히 경복궁으로 들어가는 문은 용성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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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이 보이고, 그 앞에는 수문장이 머무르고 있는 수문장청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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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장 사진은 근정전편에서 써먹었으니 생략해도 되지 싶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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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 앞에는 수정전(修政殿)이 있는 것으로 봐서 여기도 왕이 머물면서 일을 보던 곳인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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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전 주변도 아직 복원을 해야 할 곳이 많다는 것은 잔디밭을 보면서 알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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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앞에 핀 붉은 빛의 산당화의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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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전 자리는 원래 세종때에 집현전이 있었던 곳인데, 그 후로 철거되어서 용도변경을 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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닦을수(修)가 현판에 쓰여 있는 것만 봐도 뭔가 열심히 연마하고 수행했다는 의미가 전해진다. 문이 닫혀 있으니 내부를 들여다 볼 수는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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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수정전을 끼고 뒤로 가면 웅장한 경회루의 자태가 서서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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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것이군. 영남루, 촉석루, 광한루, 부벽루 등등 아무리 거론을 해도 경회루를 제외한 다음에서야 논하는 것이 순서이다. 그야말로 조선 최대의 왕궁루각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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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4월의 태양을 받아서 축축 늘어진 수양버들 사이로 웅장한 자태를 보니 조선의 힘을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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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어디로 돌아다니느냐고 연지님 전화가 빗발쳐도 아직은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얼버부리면서 한바퀴 스캔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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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반영(反映) 때문이다. 아침에는 물결이 잔잔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물결도 변화하는 바람의 영향을 받아서 거칠어지기 마련인 까닭이다. 물결이 거칠어지면 반영은 볼품이 없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지금이 주어진 최상의 시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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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물론 아침 7시에 입장을 허용한다면 당연히 그 시간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으니 이것이 현재로는 최선인 것으로 하고 무조건 한 장이라도 더 담아야 그나마 나중에 아쉽지 않을 것임을 잘 알기에 그렇잖아도 바쁜 걸음걸이를 더욱 재촉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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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를 예전에 본 적이 있었던가....?
문득 추억을 더퉈보다가 묵은 앨범을 뒤져본다. 그리고 빛바랜 사진을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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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84년 이른 봄이거나 늦겨울이었던 모양이다. 어린 연지님의 조카들 표정이 추워보이는 것으로 봐서, 그리고 버드나무로 보이는 가지의 앙상함으로 인해서 그렇게 짐작을 해 볼 수가 있겠다. 말하자면 데이트를 하러 나와서 찍은 사진인데 당시는 필름이었을게고, 어떻게든 사진이 남아서 옛 추억을 떠올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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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35년이나 흘러갔지만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이다. 육신은 늙어가도 영혼은 불생불멸이라는 것을 실감하기도 한다. 남는 것은 사진이고, 사진은 미래로 돌아가는 추억열차이고, 사진은 그래서 공간이동을 하는 타임머신이라고 해도 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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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 7칸, 세로 5칸에 282평의 공간에 목조건물 중에 가장 큰 건물이라니 국보라고 할만 하겠다. 천지인과 12달을 포함하고 24절기까지 고려하여 배치했다는 것은 충분히 그랬을 법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기둥을 돌로 한 것은 습기로 인해서 목조기둥을 하면 썩기 쉬운 것을 고려한 것이려니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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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아직 10분이나 남았잖은가. 너무 서둘러서 왔군. 10분이면 사진을 찍어도 100장은 찍을 수가 있는데 말이다. 그래도 기다리는 사람을 생각해서 그림자라도 보여주는 것이 옳지 싶어서 더 애타게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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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로 통행하는 길은 세 개의 돌다리로 건너게 되어있다. 맨 앞에 있는 길은 왕의 길이므로 왕만 통행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도 이 문은 닫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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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의 관람객용 출입문은 함홍문(含弘門)을 이용하도록 되었는데, 이것은 정승판서들의 출입문이라고 한다. 맨 안쪽에 있는 문은 일을 보는 나인들이 출입하는 문이라고 하는데 역시 통행금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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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아직 10분 남았는데 그냥 통과하네? 그래서 머뭇거릴 틈이 없으니 또한 다행이다. 다가갈수록 웅장한 경회루의 모습에 압도당하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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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 앞마당에서 수정전을 바라본다. 물결이 살살 일어나고 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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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휘가 있으니 기념사진도 남는구나. 그래 아직은 두 다리가 온전해서 제 발로 순례길을 나섰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언젠가 다리는 힘이 빠지고 정신은 오락가락할 텐데 이렇게 의지를 잘 따라주는 몸에게 매일 매 순간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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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 건너편에서는 1층의 천정은 잘 안 보였는데 이 자리에 서보니까 그 규모가 새삼 다르게 느껴진다. 돌로 된 기둥이 바깥은 네모이고 안쪽은 원형이다. 이것은 밖은 땅이고 안은 하늘이어서이니 천원지방(天圓地方)의 뜻을 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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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가이드가 등장하지 않아서 윗층으로 올라가는 길이 막혀있다. 잠시 기다려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아직 시간도 약속한 열 시가 덜 되었다. 5분여가 남아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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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올라가야 하는데 관람객을 붙잡아 놓고서 경회루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자신이 선 곳은 땅이고, 돌로 한단 위에는 하늘이므로 이 공간은 하늘과 땅차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설명을 들으면서 어서 올라가기를 고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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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계단이 열리자마자 서둘러서 2층으로 올라갔다. 슬리퍼를 신느라고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그냥 맨발로 올라갔다. 마룻바닥인데 뭔 상관여~!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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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맨발에 가시라도 찔릴까 걱정이 되셨는지 연지님이 슬리퍼를 들고 올라온다. 역시 소중한 각시여~!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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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깨닫게 된 일이지만, 이 안내원의 설명은 듣지 않아도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듣다가 사진을 찍을 기회를 놓친다는 것이다. 말은 그렇게 한다.

"사진 찍을 시간을 드릴 거예요~!"

그런데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사진을 찍으라고 주는 시간이 3분 정도이다. 그리고는 어서 나가야 한단다. 자꾸 몰아내야 자신의 오전 일과가 끝나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만 해 본다. 그러므로 혹 이 글을 읽으시는 벗님께서 경회루에 올라갈 계획을 세우셨다면 안내원의 말은 귓등으로 흘려버리고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원하는 앵글로 사진을 많이 찍으실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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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가 생각보다 넓다. 그래서 렌즈는 가능하면 광각을 챙기는 것을 권한다. 24-105로도 오히려 좁아서 12-24를 필요로 했다. 이 렌즈를 안 가져갔으면 넓은 경회루를 제대로 담기 어려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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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것은 사방을 새의 출입을 방지하느라고 그물로 감쌌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림은 생각보다 예쁘지 않아서 이점은 좀 아쉬웠지만 그렇게라도 들여보내 주는 것이 고마워서 뭐라고 말을 할 처지는 아니었으니 속으로만 불평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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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따라 경회루 중종편」

조선의 11대 왕인 중종 때에 경복궁이 내려다 보이는 인왕산 바위에서 다홍색 치마가 휘날린다. 반정군들이 중종의 조강지처인 단경왕후() 가 아버지인 신수근이 연산군을 위해서 중종반정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반정을 추진하던 무리로부터 살해를 당하였고 그로 인해서 왕비도 자연스럽게 폐위가 되었더란다.

왕비가 된지 겨우 7일만에 아버지의 역적으로 인해서 쫒겨나서는 인왕산 중턱으로 귀양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사랑의 행복을 나눌 겨를도 없이 아내인 단경왕후를 인왕산으로 보낸 중종은 비록 폐위는 되었을망정 사랑하는 왕후를 그리워해서 경회루에 자주 올랐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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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간을 단경왕후도 알고서는 남편이자 왕인 중종이 경회루에 오를 시간이면 바위에다가 자신의 다홍치마를 펼쳐놓았으니 치마를 보면서 자신이 잘 있다는 것을 알고 마음 편히 계시라는 뜻이었다니 사랑은 행복하고도 슬픈 것이 분명하구나....

2017년 8월에 KBS2TV에서 드라마로 방송을 했었다는데 보지는 못했다. 못견디게 심심하면 경회루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다시보기로 한 번 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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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지도에서도 치마바위가 나온다. 이렇게 멀리 바라보면서 장인때문에 왕이 되었고, 자신이 왕이 되었기 때문에 아내는 7일 만에 쫓겨나야 하는 운명을 슬퍼했었지 싶다. 그것이 인생이고 그래서 세상은 공평하다고 해야 할까.....?

물론 세상은 결코 공평하지 않다. 공평하다면 부익부 빈익빈은 무엇이고, 공평하다면 피부 색깔에 따라서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서 저마다 운명이라고 하고, 세상을 탓하면서 그렇게 맺힌 한을 한 보따리 안고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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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눈에 잘 띄라고 인왕산 자락에 치마를 펼쳐놨다고 해서 치마바위라고 전한다는데 왕도 사람이라면 얼마나 마음에 천근의 돌을 얹어 놓은 것 같았을까 싶기도 하다. 준비도 없이 얼떨결에 왕이 된 사람에게 주어진 충격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만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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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원의 설명으로 몰랐던 것을 하나 배우긴 했다.  그래서 귀는 항상 열어놓고 다녀야 하는 것이 맞다. 풍경이 좋은 경회루에서 조차도 멍든 가슴으로 먼 산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움을 달래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는 것이 참 오묘하다. 그래서 구중궁궐()에 태어나는 자는 전생에 죄업이 하늘을 찌를 만큼 쌓여야 가능하다는 말에도 고개가 끄덕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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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서쪽방향을 바라보면서 설명을 구성지게 하던 안내원이 이번에는 북쪽으로 향한다. 사면의 분위기가 모두 다르다는 말도 하고, 특히 가을의 풍경이 더 좋다는 말도 한다. 단풍의 채색을 두고 말하는 것이겠거니... 낭월은 지금 이 순간의 푸릇푸릇한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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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개국시에는 자그마한 연못이었더란다. 그나마 습지에 세운 정자가 기울어져 가는 것을 보다 못한 태종이 건축가의 능력을 발휘하는 수문장 박자청() 에게 명해서 조금도 크게 짓지 말고 딱 이만한 크기로 다시 지으라는 분부를 내렸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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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명을 받은 박자청. 곰곰 생각을 하더니만 왕의 분부를 거역하고 대대적인 공사를 벌여서 지금의 규모로 지어버렸다. 왕명을 어겼으니 당연히 그에 따른 죗값을 받아야 했는데, 실은 태종의 속 마음을 간파한 공사였던 것이다. 해서, 겉으로는 혼을 내고 속으로 조용히 만나서 맛있는 술을 하사했을 것이다.

더구나 북악산에서 흘러들어온 물이 경회루를 한바퀴 감돌아서 빠져나가도록 설계를 한 바람에 항상 맑은 물로 가득 채워진 경회루였다는데 지금은 물이 흘러가는 곳이 어딘지 알 수가 없지만 명색이 국보 224호라면 물을 흘려서 맑은 경회지(慶會池)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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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생이 비천한 종의 신분이었으니 양반들의 비난과 조롱을 얼마나 받았겠는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설계도를 따라서 공사를 마무리 지었던 것이다. 문득 떠오르는 이야기 한 토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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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절의 비구니가 주지스님이셨는데, 하루는 법회를 하는 날에 신도들이 법당을 가득 메웠는데, 절에서 키우던 진도개가 꿩을 한 마리 잡아서는 당당하게 물고 와서 법당 앞에 내려놓았다. 그것을 본 주지스님과 신도들이 대경실색. 스님이 개에게 호통을 치면서 이놈 이리오너라 하고서 뒷뜰로 데러간 다음에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잘했다~ 잘했어~ 다음에도 잡아 와~!'라고 하는 장면을 옛날에 도반이 봤다고 이야기를 해 줬는데 어쩌면 규묘만 다르지 딱 그 장면이 아닌가 싶어서 미소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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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대왕이 특히 경회루를 사랑해서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올리고, 외국에서 사신들이 오면 연회를 열었는데 모두들 건물의 위용에 감탄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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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의 누각에 있는 기둥은  안쪽에 4개씩 8개이고, 이것은 주역의 팔괘를 의미한다니 '어련하시겠습니까.'싶다. 그리고 바깥 가둥은 8개씩 16개이다. 안과 밖을 다 합하면 24개가 되어서 일년의 24절기를 나타낸다는데 이건 좀 꿰어 맞추기로 한  냄새가 솔솔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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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의 동쪽 풍경은 대궐을 조망하도록 배치되었다. 대궐은 모두가 목조건물이다. 그래서 가장 무서운 것은 화마(火魔)가 닥치는 것이다. 그래서 각 전각마다 물항아리를 네 귀퉁이에 놓아서 불의 귀신이 불지르고자 왔다가 물통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서는 놀라서 도망간다는 이야기를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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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유사시에는 실제로 불을 꺼야 했다. 그래서 경회루를 더 크게 지었으니 박자청의 건축술에는 실용과 미의 요소를 두루 갖췄던가 보다. 특히 주역이 조선시대 왕조의 근본 이념이다 보니까 경회루에서도 당연히 팔괘 중에서 수괘(水卦)에 해당하는 육감수(六坎水)로 배치했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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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는 2층이고 내부의 평면이 3중으로 되어 있어서 합이 35칸이고 기둥은 모두 48개라고 한다. 세어보지 않았으니 '48개이다'라고 쓰기가 좀 찜찜해서... ㅋㅋㅋ

기둥은 48개이고 2층 누각의 중심에는 3칸으로 되어 있으니 이것은 천지인(天地人)의 섬재(三才)가 되고, 기둥은 8개를 사용하여 팔괘를 나타낸다. 중앙의 밖에는 12칸으로 지어진 마루인데 12의 열 두달을 의미한다는 것과 또 기둥이 16개가 되므로 각각의 기둥 사이에는 네 짝의 문이 있어서 64괘를 이루고 있다.

마지막으로 맨 바깥부분은 모두 20칸으로 되어있고, 낭무(廊黛)로 기둥은 24개로 24방위의 월절후를 의미한다. 그리고 실제로 행사를 할 적에는 왕은 가장 높은 중앙에 위치하고, 그 다음의 자리에는 당상관이 앉고, 맨 가에는 당하관이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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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서쪽을 보는 풍경과 동쪽을 보는 풍경은 판이하게 다른 분위기구나. 그런데 아까부터 얼른 내려가야 한다면서 채근하는 안내원 아지매 때문에 눈치가 보여서 더 못 돌아 다녔다. 그래서 앞에 드린 말씀이 그것이다.

"절대로 안내원 말을 믿지 말고 맘대로 사진부터 찍으세요~!"

언제나 그렇듯이, '이 다음'은 없는 법이니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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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랫층으로 내려와서 슬리퍼를 벗어놓는 신발장도 한 장 남긴다. 이때에는 이러한 형식으로 방문했다는 것도 기록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물론 다시 35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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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나가기 서운해서 천장도 바라보고... 한가롭게 기둥의 숫자도 세어봤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언제 지나는 길에 또 한 번 더 가야 할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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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병?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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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버티는 자가 수지맞는 법이다. 얼른 나오라고 성화를 대지만 그래도 뒤를 돌아다 보면서 마무리 샷 하나는 남겨야 하지 않겠느냔 말이지. .그러고 보니 연지님도 아직 빠져나오지 않았었구나.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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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서울나들이를 할 일이 있거든 다시 경회루 관람을 신청해야 하겠다는 약속을 마음 속에 남기고 아쉬운 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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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경회루 인증샷이. 그런데 같은 건물에 뭐가 다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모르시는 말씀이다. 겪어 본 다음에 바라보는 경회루는 밖에서만 보던 경회루가 아니라는 것을. 모든 일은 겪어봐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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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사진인데 뭘 보라고 한 장 더 올렸는가 싶다면 물을 잘 들여다 보시라고 권한다. 잉어들이 헤엄치고 노는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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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왕궁과 함께 애환을 보냈을 경회루였다. 이번에는 한가롭게 10mm의 렌즈로 엄청나게 넓은 경회루 모습으로 남기고 싶었다. 왜곡이면 또 어떤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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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낭월이 서울 시장을 한다면 제일 먼저 경회루 물부터 북한산의 물로 가득 채우라고 명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맑은 물이 넘쳐서 청계천으로 흐르게 만들어야 하겠다. 그만큼 이 물의 모습은 아쉬움을 남겼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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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아직도 반영은 그런대로 봐줄만 하다. 담장앞의 건물은 정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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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하여 하향정(荷香亭)이란다. 연꽃향이 가득한 정자라는 뜻인 것으로 봐서 이 건물을 지을 적에는 연꽃이 있었던 모양인데, 실은 이 정자는 조선시대의 정자가 아니라 이승만이 만들었다고 하니, 철거를 하느니 마느니 하고 이론이 분분한 모양이다. 낭월이 보기에는 뭐 그냥 둬도 되지 싶다. 특별히 거슬리지는 않으니까. 잘 생긴 얼굴에 사마귀 하나 있는셈 치지 뭘.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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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35년 후에 왔을 적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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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물이 찰랑이는 경회루를 보게 되기를~! 그게 언제냐고? 그야 아무렴 어떤가. 35년 전에 왔던 경회루인데 다시 그만큼의 시간이 지난 다음의 약속을 한들 안될 일이 무에 있겠느냐~ 항상 오늘을 희망가득한 에너지로 살기만 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