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용신은 찾는 것이지 정하는게 아니다

작성일
2007-09-11 18:54
조회
14918

용신공부를 하면서 혼동을 해서는 곤란한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다. 용신을 찾아야 하는데, 이것을 잘못 착각하고서는 용신을 정하려고 하는 학자가 있다. 어찌 생각해보면 찾는 것이나, 정하는 것이나, 비슷할 것 같은데 사실은 대단히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용신을 찾는다는 것은 이미 어딘가에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주 자체에서 이미 태어나면서 어디에 있는 글자가 용신이라고 하는 원칙이 정해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선천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명리학자는 그 용신을 찾는 것이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용신을 정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명리가의 직권남용이 된다. 내가 정할 수가 없는 것을 정하겠다고 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찾는다는 이야기는 사주가 주체가 되고, 정한다는 것은 감정을 하는 사람이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객이 뒤바뀌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내용인데, 이것을 정확하게 헤아리지 못하고 혼동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용신은 이미 정해져 있다. 내가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다만 정해진 용신을 찾아내는 노력만 할 뿐이다.




용신을 정하겠다고 덤비는 사람은 실제적으로 그 사람의 삶에는 관심이 없는 경우라고 할 수도 있겠다. 오로지 내가 심판관이 되어서 사주를 보고는 자신의 안목대로 정해버린다.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보자.




이 사주는 木이 용신이야. 그래서 이 木運에는 절대로 돈을 벌어야돼, 만약 돈을 못 벌었다면 이것은 네가 잘못된 거야 사주로는 분명히 벌게 되어있거든.”




이렇게 말을 하는 사람은 사주의 용신을 정하려고 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실력행사를 할 수가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로지 실제로 가장 근접하게 해석을 해야 하는데, 그 해석이 틀렸을 경우에 이렇게 용신을 정하는 사람은 큼지막한 목소리로 찾아온 사람에게 꾸짖는다. 그렇다면 용신을 찾는 사람은 어떻게 말을 할까?




“이 사주의 생긴 모습을 볼 적에, 아마도 용신은 木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면 작년에는(乙亥年 이라면) 돈을 벌었어야 하는데, 실제로 그랬는지요? 만약 돈을 벌지 못했고, 오히려 까먹었다면 아마도 내가 용신을 잘못 찾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것이 용신은 찾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말이다. 무슨 차이가 나는지를 구분하신다면 충분하다. 적어도 용신이 찾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학자라면 스스로 장담을 하는 일은 여간해서 잘 하지 않는다. 결과는 분명하게 偏財가 용신이라고 하더라도, 그 용신을 찾는 사람의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설명을 하는 방법에는 많은 차이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그래서 여기에 추가말씀을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때로는 용신을 정해야 할 경우도 있다. 만약 상담을 요청한 사람이 이미 많은 선생님들을 찾아 뵙고 여러 가지의 의견을 듣고 난 나머지라고 하거나, 혹은 명리공부를 하다가 어떤 특정한 사주를 보고서 스스로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그냥 실제상황은 접어놓고서 단지 원국의 상황으로만 용신을 찾아달라고 부탁을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때에는 부득이 나름대로의 안목에 의지해서 용신을 정해야 한다. 가령 찾아간 철학원 마다 설명해주는 것이 다르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대단히 혼동을 할 것이다. 그렇게 되어서는 어느 장단에 기준을 맞춰야 할는지가 애매하므로 실제상황을 떠나서 보다 객관적으로 용신을 정해보라고 요구를 할 수가 있다. 특히 순례파들에게는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미 다각적으로 자신의 사주에 대해서 이해를 하고 있는 사람은 보다 객관적으로 어떻게 볼 수가 있는지에 더욱 관심이 많기 때문에, 이런 요구를 할 적에는 부득이 사주를 살펴서 용신을 정해줘야 한다. 즉 자신의 안목대로만 설명을 해주는 것이다. 실제상황은 무시하고서 원칙대로만 설명을 해달라고 할 경우에 해당하는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용신을 정한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찾는다고 생각하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