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 제31장. 생존력(生存力)/ 1.자존감(自尊感)의 높이

작성일
2021-12-30 0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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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 제31장. 생존력(生存力) 


1. 자존감(自尊感)의 높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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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에 잠겼던 수경(水鏡)이 손을 들었다. 채운의 통통 튀는 반응도 명쾌해서 좋았으나 수경의 사려(思慮)가 깊고 진중(鎭重)한 말을 하는 것도 우창은 매력이 많은 제자라는 생각을 했는데 십간의 체용(體用)에 대한 설명을 듣고서는 무엇인가 말을 하려는 것에 대해서도 기대가 되었다.

“오, 수경도 할 말이 있으셨구나. 무슨 말이라도 좋으니까 기탄없이 말씀해 보시게.”

“스승님의 자상한 설명을 들으면서 매우 기초적이면서도 귀중한 가르침에 깨달은 바가 많았어요. 역시 명학(命學)의 핵심(核心)은 오행(五行)의 생극(生剋)에 있다는 것을 말이에요. 그동안의 공부를 돌이켜 보면 항상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뒤돌아보니까 더욱 중요한 것은 맞고 틀리고의 결과가 아니라 생극(生剋)의 기본적인 공부라는 것을 알았어요.”

“오, 그것을 깨달은 것만으로도 공부의 기초는 이미 공고(鞏固)해져 간다고 해도 되겠네.”

“말씀을 들으면서 약간의 의문이 생겨서 여쭙습니다. 경(庚)을 비견(比肩)이라고 했는데 일간(日干)이 경(庚)이라고 한다면 비견적(比肩的)인 성향(性向)이 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지요?”

“맞아, 그렇게 이해하면 되지.”

“기존에 제자가 배운 것으로는 일간(日干)이 어떤 천간이라고 하더라도 모두 똑같이 비견이 된다고 배웠다가 경(庚)이 비견이라는 말씀에 잠시 혼란(昏亂)스러웠어요. 이제 십간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니까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되었죠. 말씀을 들으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기존에 알았던 것은 십간(十干)의 작용(作用)에 대한 것이었는데, 지금 배운 것은 일간이 그 자리에 들어가서 작용하기 이전(以前)의 단계에 해당하는 본질(本質)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오호~! 잘 이해하셨네. 항상 중심에는 본질(本質)이 있고, 그 본질을 바탕으로 삼아서 작용(作用)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셨구나. 하하~!”

우창이 수경의 말에 흐뭇해서 웃으며 말하자 수경이 다시 합장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간지의 실체(實體)가 무엇인지도 모르고서 작용에 대해서만 배웠는데 실은 그것조차도 깊은 이치를 전혀 모르고 앵무새처럼 글자만 외웠다는 것을 알았으니 한편 생각하면 참 허무하기도 해요. 도대체 뭘 배웠던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 말이에요.”

“원래 학문의 길은 그런 것이 아니던가? 열심히 공부하고 난 다음에 그것의 오류가 발견되면 다시 수정하면서 하는 것이니 말이지. 당연히 그래가면서 공부하는 것인데 뭘. 하하하~!”

“이제 기초적인 것에서부터 다시 새로운 판을 짜야 하겠어요. 그러기 위해서 비견부터 정리하려고 해요. 비견의 본질은 경(庚)이므로 주체성(主體性)을 의미한다고 말씀하셨으니까 그대로 보면 되는 것이죠?”

수경은 다시 한번 확인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기초를 정리하지 않으면 언젠가 그 문제로 인해서 속을 썩이게 될 것이기 때문에 명확하게 하고 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서 다시 묻고자 했고 우창도 그 마음을 알기에 기쁜 마음으로 질문에 답했다.

“그렇다네. 주체성은 자존감(自尊感)을 의미하고 이것은 무색(無色)의 투명(透明)한 존재이면서도 또한 이것이 무너지면 삶의 의미가 없어질 정도로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네.”

“맞아요. 자존감이 무너지면 삶의 존재(存在)에 대한 의미도 없어지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때로는 스스로 결백하다는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서 소중한 목숨을 끊기도 하는 것은 오직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봐야 하겠지요?”

“틀림없는 이야기로군. 그래서 비록 가세(家勢)가 기울어져서 3일 먹을 식량이 없더라도 그 마음 깊은 곳에서 자리하고 있는 자존감은 포기할 수가 없는 일이라고 하겠지. 더구나 스스로 옳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서 외부의 압력(壓力)과 고통(苦痛)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최후까지 버티게 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네. 비록 관청에서 누명을 씌우려고 형벌로 능지처참(陵遲處斬)을 가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떳떳하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그것을 굽히고 싶지 않은 것이라네.”

“스승님의 말씀을 듣고 생각해 보니까 자존감이란 목숨이라고 해도 되겠어요. 종전에는 비견이란 그냥 일간의 자리에 있는 것이고 의미를 특별히 부여하지 않았는데 스승님께서는 이것에 대해서 매우 크게 비중을 두고 설명하시는 말씀을 듣고 보니까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겠어요.”

“그렇지, 자존감이 우뚝한 사람은 신뢰(信賴)부터 얻게 되는 것이라네.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신뢰감이 없다면 어떻게 그를 의지하겠느냔 말이네. 비록 가장(家長)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아내나 자녀들이 신뢰하지 못한다면 무엇을 중심으로 뭉칠 수가 있겠나. 그렇게 되면 뿔뿔이 흩어져서 각자도생(各自圖生)하게 될 수밖에 없는 일이지.”

“과연 그렇겠어요. 가장이 자존감으로 가정을 지키고, 아내가 자존감으로 남편을 따르고, 자녀도 그러한 부모를 믿는다면 이러한 가정은 누가 와서 흔들어도 끄떡도 하지 않겠어요.”

“그렇겠지? 반면에 가장이 자존감을 잃으면 아내도 남편을 믿지 못하고, 자녀도 부친을 믿지 못하게 될 테니 가정의 비극(悲劇)은 이로 말미암아 일어날 수가 있지 않겠는가?”

“맞아요. 비견의 의미를 오늘 다시 새롭게 깨달았어요. 실체가 없는 듯해서 보이지 않았던 주체성이 이렇게도 중요했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마치 공기가 없이는 한순간도 살아갈 수가 없으면서도 그것을 잊고 있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옳지, 맞는 이야기로군. 자존감이란 공기와 같은 것이라네. 그래서 하충 스승님께서도 경금(庚金)을 고체(固體)라고 보신 것이 놀라울 따름이라네.”

“과연 견고(堅固)하고 굳건한 고체라고 통찰(洞察)하신 의미가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존감보다 견고(堅固)한 것은 또 없을 테니까요. 수많은 명학자의 저서(著書)에서 뭇사람들의 관심사가 재물(財物)이나 지위(地位)에 있다고 해서 그것에 대해서만 풀이를 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짓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어요. 이러한 것을 알고자 하는 방문자의 비위(脾胃)나 맞춰서 그것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자존감이 없는 짓이라는 것까지도 생각해야 하겠어요. 의뢰자의 말에 휘둘리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요. 방문자의 말을 따라가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자존감이 있는 학자는 방문자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는 자신의 생각대로 끌고 가려고 하지 않을까요?”

“오호~! 그럴듯하군. 수경의 말에 동감이네. 하하하~!”

우창은 통쾌(痛快)했다. 이렇게 가려운 곳을 시원스럽게 긁어주는 수경의 말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 것 같았다. 수경의 말이 이어졌다.

“실로 사람들이 묻는 것은 부귀영화(富貴榮華)니까요. 그들의 마음속에 자존감이 있을 까닭이 없지 않겠어요? 어쩌면 자존감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명운(命運)을 물으러 오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스스로 자기를 믿고 살아가면 되지 누구에게 내 삶을 묻는단 말이냐’고 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것도 일리가 있군. 이미 남에게 자신의 미래를 묻는다는 것부터가 자존감이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봐야 하겠단 말이지?”

“그렇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찾아온 사람이 알고자 하는 것이 이렇게 온통 밖에서 구하는 것으로만 가득하니 어느 겨를에 그 사람의 사주에 자존감이 있는지를 살펴봐 줄 기회가 있겠느냔 말이죠.”

우창은 비견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수경의 말을 들으면서 보람을 느꼈다. 이전에는 소중한 줄을 몰랐던 비견의 의미에 대해서 이 정도로 깨달았으면 이미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수경의 깨달음에 축하하네. 그럼에도 밝은 사람을 찾아서 자신의 길을 묻는 것은 자신을 점검하고 행여라도 살피지 못한 것이 있는지를 알고자 하는 마음이라면 당연히 칭찬해도 되겠지. 하하하~!”

우창의 말에 수경도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이제 비견의 의미는 잘 알았어요. 그렇다면 비견의 음양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봐야 하겠어요. 비견에도 음양은 있는 것일 테니까요.”

“잘 생각했네. 어디 생각한 바를 말씀해 보게.”

우창이 말을 해 보라고 하자 수경도 생각한 바를 설명했다. 다른 제자들도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서 집중하느라고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수경이 판단하기에 비견의 양(陽)은 긍정적(肯定的)인 작용으로 나타날 것으로 생각되었어요. 그러니까 자존감으로 자신을 지키게 되는 것이겠네요. 이렇게 되려면 아마도 오행(五行)이 균형(均衡)을 이루고 있어야 가능하지 않을까요? 다만 그러한 것을 일일이 살펴서 예를 들 수는 없을 것으로 봐서 비견의 강약으로만 말을 하는 수밖에 없겠어요.”

“어떻게 이해를 할 수가 있을까? 어디 설명을 들어봐야 하겠군.”

“비견이 적당하면 자존감이 되지만 태과(太過)하면 오만(傲慢)하고 불손(不遜)하게 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을 떠올렸어요. 참, 과유불급은 이치에 맞는 말인가요? 갑자기 그 의미가 궁금해지네요. ‘지나침은 부족함만 못하다’고 하잖아요.”

“아, 그 말은 ‘지나친 것도 아름답지 않고, 부족한 것도 아름답지 않다’는 말이라네. 그러니까 둘 다 좋지는 않지만, 그중에서도 지나친 것은 오히려 부족한 것보다도 못하다는 의미라네. 다시 말하면 「균형(均衡)이 가장 좋지만, 균형을 얻지 못한 상황이라면 태과(太過)는 불급(不及)보다도 못하다」는 의미로 이해를 하는 것이 완전한 뜻이라고 하겠네. 하하하~!”

“아, 뭔가 빠진 격언(格言)이었네요. 그래서 부족한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오해를 할 수도 있었겠어요. 부족함도 균형은 아니니까요.”

“맞아. 그래서 항상 세 가지로 놓고 관찰해야 한다네. 가장 좋은 것은 균형(均衡)을 이루고 있는 중평(中平)이라네. 지나치면 태과(太過)가 되고, 부족하면 불급(不及)이 되는데 모두가 아름다운 일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라네. 그러니까 불급을 좋은 것으로 생각해서야 될 일인가?”

우창의 설명을 듣고서 수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알았어요. 그래서 비견이 과다(過多)하면 독불장군(獨不將軍)이 되어서 남의 말은 전혀 듣지 않으려고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국은 외롭게 혼자서 살아야 하는 상황까지도 생길 수가 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죠?”

“물론이지.”

“그렇다면 비견이 불급(不及)하다면 어떻게 될까요?”

“어디 수경의 말을 먼저 들어볼까?”

우창은 다른 제자들의 생각을 도울 겸으로 수경의 생각부터 물었다.

“예, 제자의 생각으로는 비견이 불급하면 자존감이 땅에 떨어져서 스스로 무엇이든 해결을 할 수가 없을 것이므로 항상 남의 의견만 따라다니다가 삶을 마치게 될 테니 이것은 흡사 노복(奴僕)의 삶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겠어요. 부모의 뜻에 따라서 시키는 공부하여 비록 과거에 급제했다고 하더라도 또 국법에 따라서 시키는 일만 하다가 그렇게 삶을 마치는 것으로 살아간다면 그 삶은 자신의 삶이 아니라 주변의 환경이 만들어 준 삶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어요?”

“오호~! 그렇지, 그러니까 수경처럼 학문의 길로 꿋꿋하게 가는 과정에서 남의 말에 현혹(眩惑)되지 않고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자신의 그림을 그리게 될 것이네. 하하하~!”

“혹 사주를 살펴보고 일간(日干)의 강약(强弱)으로 비견의 균형과 태과와 불급을 살펴도 될까요?”

“당연하지. 그것을 제외하고 또 무엇을 기준으로 삼겠는가.”

“아하~! 그렇다면 일지(日支)가 비견(比肩)인 8개의 간지(干支)는 모두 자존감이 상당하다고 봐도 될까요?”

“8개의 간지가 뭐지?”

“갑인(甲寅), 을묘(乙卯), 무진(戊辰), 무술(戊戌), 기축(己丑), 기미(己未), 경신(庚申), 신유(辛酉)의 여덟 간지 말이에요.”

“오호, 수경은 이미 육갑(六甲)을 손바닥에 얹어놓고 희롱할 수준이었군. 그렇게 공부를 한다면 무엇을 걱정할까. 하하하~!”

“그렇다면 여기에 하나만 더 비견이 있다면 이미 중심이 과다(過多)한 쪽으로 기울게 될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볼 수도 있겠네요?”

“아마도 그렇게 될 가능성도 있다고 봐야겠지. 다만 실제로는 천변만화(千變萬化)가 될 테니 한마디로 단언을 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네.”

“역시 스승님의 사려(思慮)가 깊은 통찰력이시네요. 그렇다면 단순하게 일주(日柱)만으로 참고하는 것으로 하는 것이 옳겠어요. 그 여덟 개의 간지에서도 진정으로 비견(比肩)인 것은 경신(庚申)이 되겠지요?”

“당연하지. 비견이 비견을 본 형국이니까 말이네. 그야말로 오상(五常)에서 의(義)에 해당하는 성분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

“아, 그 말씀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서 금(金)에 해당하는 것이 의(義)이기 때문인 거지요? 그렇다면 그 나머지 일곱 간지는 의롭다고 하기는 어렵다고 봐야 할까요?”

“아니, 어떻게 그런 판단을 할 수 있겠는가? 다만 가장 비견답기 때문에 자존감이 높을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만 대입하면 된다네. 항상 중요한 것은 하나의 예만으로 결정하려는 마음을 경계(警戒)해야 한다네.”

“이런, 제자가 또 실언(失言)했어요. 기본적인 이치로 모든 것을 다 덮으려고 하는 좁은 소견이 자칫하면 큰 실수를 할 뻔했어요. 조심하겠어요.”

“맞아, 일례불가언(一例不可言)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기본형은 어디까지나 기본적인 이치로만 이해하고 확장하는 것은 또 상황에 따라서 판단하면 만무일실(萬無一失)이라네. 하하하~!”

우창은 수경이 짧은 생각으로 인해서 부끄러울까 싶어서 애써 부드러운 말로 다독였다. 그러한 마음을 수경도 눈치를 했다. 그래서 더욱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

“스승님의 자상한 가르침에 감동이에요. 더욱 깊이 생각하고 또 사유하여 실수가 없도록 하겠어요.”

수경과 우창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채운이 손을 들고는 말했다.

“스승님, 궁금한 것을 여쭤도 될까요?”

“아, 채운은 무엇이 궁금한지 말을 해 보게.”

“예, 실은 태과한 비견(比肩)이 독불장군으로 남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에 대해서 공감(共感)을 했거든요. 그렇다면 불급(不及)한 비견의 경우에는 어떻게 마음을 쓸 것인지에 대해서 조금만 더 상세히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건 앞에서도 언급했는데? 아마도 설명이 부족했던가 보군, 그러니까 자존감이 떨어지는 사람은 줏대가 없다고 봐야지. 그래서 이런 사람을 일러서 무골호인(無骨好人)이라고도 하지. 호인(好人)이라는 글자로 인해서 칭찬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실은 지렁이처럼 줏대가 없이 이리저리 상황에 따라서 흔들리는 사람을 비웃는 뜻이기도 하다네.”

“그렇다면 사주에서 비견이 약한 사람과 아예 없는 사람과의 차이도 있을까요? 전혀 없다면 약하게나마 있는 사람보다도 자존감이 더 낮을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 이러한 것은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요?”

“오, 그것은 이문난답(易問難答)이로군. 하하하~!”

“질문은 쉬운데 답이 어렵다니 왜 그럴까요? 스승님의 견해라면 이러한 점에 대해서도 충분히 생각을 해 보셨을 텐데요. 혹 무슨 어려움이라도 있는 것일까요?”

우창은 채운의 물음에 잠시 망설였다. 비견이 전혀 없다는 것은 일간과 같은 비견이 없다는 뜻이다. 가령 일간(日干)이 갑(甲)이라면 다른 어디에서도 갑(甲)과 인(寅)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어떤 마음이 될 것인지를 물으니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실로 답을 하기에 쉽지 않은 물음이라네. 다만 공식적으로 답을 할 수는 있겠네. 비견이 없으니 자존감도 상대적으로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는 말이네. 다만 비견이 없다고 해서 자존감이 확실히 바닥이라고 말을 할 수는 없다는 의미를 함께 포함해서 이해하라는 뜻이라네. 시람이 타고난 심성을 단순하게 십성만으로 단언할 수는 없는 일인 까닭이라네. 왜 그런지 알겠는가?”

“채운은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이 옳을지 얼른 판단이 서지 않아서요.”

우창은 이마에 맺히는 땀을 한 번 닦았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에도 어떤 답을 해 줘야 채운의 궁금증에 대해서 가장 정확한 답이 될 수가 있을 것인지를 생각했다. 지금 이들에게는 우창의 일언반구(一言半句)가 모두 가슴을 파고들어서 깊이 자리 잡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가령 말이네.....”

춘매가 우창의 표정을 보고는 재빨리 떠다 주는 냉수를 한 잔 마시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사주에는 비견(比肩)이 전혀 없는데 대신에 경(庚)은 있다고 하세. 일간(日干)이 목(木)이든 화(火)든 관계없이 말이지. 그랬을 적에 비록 비견은 없으나 비견의 본질인 경(庚)이 있단 말이네. 이러한 경우에 작용하게 될 비견은 없더라도 본질의 비견은 있으니 이러한 경우를 당한다면 단순하게 비견이 없다는 것만으로 자존감이 없는 것으로 볼 수가 있겠느냔 말이네. 실로 이러한 관법(觀法)은 좀 복잡하고 어렵기에 자칫하면 복잡하다고 생각을 할 수도 있는데, 기왕에 채운이 물었기 때문에 답을 하지만 이해에 혼란이 없기만을 바랄 따름이네.”

우창이 어렵사리 설명하자 모두 그 의미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한 내용을 막상 사주를 보면서 판단한다는 것이 여간 내공이 쌓이지 않고서는 판단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우창이 설명하는 것을 꺼렸던 이유를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러자 채운이 이야기를 듣고서 말했다.

“스승님의 제자를 아끼는 마음을 모두 이해하겠어요. 비록 제자들이 혼란을 겪을지라도 고구정령(苦口丁寧)으로 말씀하시는 뜻까지도 모를 리가 없죠. 그러니까 비견이 없더라도 경(庚)이 있는지도 살펴봐야 한다는 의미로 정리하면 되겠죠? 그렇게 하고서도 다시 살펴봐야 한다는 여지(餘地)도 남겨두고 말이에요.”

“옳지, 그렇게만 이해를 한다면 판단에서 큰 착오(錯誤)는 일어나기가 쉽지 않을 것이네. 한 사람의 모든 생각이 오로지 여덟 글자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하하하~!”

“스승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생각해 보면, 비견의 존재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어서 사주를 통해서 파악하기도 쉽지 않고 그것을 본인에게 말해 주는 것은 더욱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존감은 실로 남들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말이나 행동을 해야만 미뤄서 짐작할 수가 있을 따름인데 언행(言行)조차도 보이지 않을 때는 그냥 짐작만 할 수가 있겠어요. 그리고 언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모두 드러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아마도 고인들도 비견에 대해서는 많은 기록은 남겨두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을까요?”

“오호~! 과연 채운의 통찰력이라면 머지않아서 정확하게 십성의 핵심(核心)에 다다를 수가 있게 될 것이 틀림없겠네. 하하하~!”

“고맙습니다. 스승님의 가차(假借)없는 가르침이 꼭 필요해요. 호호호~!”

이때 염재가 손을 들고는 우창에게 물었다.

“스승님, 심오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시시한 질문을 드려서 죄송하기는 합니다만, 비견(比肩)이라는 두 글자의 뜻에 대해서도 좀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를 하면 좋을지요?”

“아, 우리가 이름에 대해서도 거론하지 않았나? 하하하~!”

그러자 채운도 웃으면서 말했다.

“에구머니나~! 우리가 궁금한 것만 생각하고 두서없이 서둘렀나 봐요. 호호호~!”

그러자 우창이 채운에게 물었다.

“잘 되었군. 채운이 설명해 주면 되겠어. 하하하~!”

“예, 그럼 부족하지만 설명해 볼게요. 우선 비(比)는 똑같은 두 개를 놓고서 비교(比較)하는 뜻이에요. 그것은 일간(日干)과 똑같은 오행(五行)의 음양(陰陽)이라는 뜻이에요. 같은 글자가 아니면 비교를 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채운의 말에 염재가 다시 물었다.

“아,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일간(日干)이 갑(甲)이면 비견(比肩)도 갑이 된다는 단순한 뜻이었습니까?”

채운은 염재가 나이는 젊어도 대중의 자리에서 문답을 나누는 것임을 생각해서 경어(敬語)로 말했다.

“맞아요. 그리고 견(肩)은 어깨라는 뜻도 있지만 무거운 짐을 견딘다는 의미도 있어요. 호(戶)는 지게를 의미해요. 지게는 아시나요?”

채운은 염재가 혹시 지게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할 것으로 생각되어서 물었다. 그러자 염재가 답했다.

“무거운 짐을 얹어서 등에 지고 다니는 것을 말하는 것이 맞습니까?”

“아, 맞아요. 그리고 견(肩)의 월(月)은 육(肉)이에요. 이것은 어깨를 의미해요. 어깨 중에서도 뼈가 아니라 살을 말하지요. 그러니까 지게에 무서운 짐을 얹어서 짊어지는 것으로 인해서 어깨 견(肩)이라는 뜻이 보편적으로 쓰였지만 실은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서도 꿋꿋하게 버티고 서는 것을 의미해요.”

“아, 그런 뜻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깨우침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염재가 이렇게 새로운 것을 하나 배운 것에 대해서 고마워하자 채운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오늘 스승님의 가르침을 듣고 보니까 또 새로운 것을 하나 더해야 하겠어요. 그것은 바로 ‘자존감이란 어렵고 힘든 것을 참고 견디는 것’이라는 점을 말이에요. 견(肩)에는 무거운 짐을 견디는 의미가 들어있는데 누구나 호의호식(好衣好食)하고 잘 지낼 적에는 자존감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존감도 버려야 할 위기를 만났을 적에서야 비로소 내면에서 잠자고 있던 자존감이 드러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보니까 단순하게 관념적(觀念的)으로만 이해했던 비견의 뜻이 더욱 깊게 느껴졌어요. ‘송백(松柏)은 서리를 맞아야 더디 시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은 이런 경우에 쓰라고 있는 말이겠죠? 스승님의 가르침이 아니었다면 이러한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죠.”

채운의 깨달음에 우창도 신명이 나서 다시 추가로 보충을 했다.

“맞는 말이네, 실제로 삶의 여정(旅程)에서 고난이 클수록 자존감(自尊感)도 높아지는 법이라네. 반대로 편하고 어려움이 없을수록 자존감도 나약해지는 것이지. 경(庚)은 쇠를 백천 번의 담금질을 거쳐서 단단한 강철(鋼鐵)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니고 무엇이겠나? 견(肩)의 어깨에 무거운 짐의 지게를 지고 홀로 가야 하는 삶이야말로 자신의 주체가 없이는 힘든 일일 수밖에 더 있겠나?”

“아하, 그래서 주체(主體)의 오행을 금(金)이라고 한 것이었군요. 과연 고인들의 지혜가 이렇게 용의주도(用意周到)하여 물 한 방울도 새어나가지 못할 정도로 빈틈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어요.”

그러면서 우창에게 합장하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우창도 미소로 받았다. 그러자 염재가 말했다.

“채운 사저(師姐)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그냥 막연하게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뜻이겠거니 했는데 설명을 듣고 보니까 자존감의 본래 의미가 그 안에 깃들어 있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견(肩)입니다.”

염재도 채운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우창이 웃으면서 말했다.

“너무들 하나의 가르침에 마음을 표하지 않도록 하게. 당연히 가르침을 주고받는 것이 도반일진대 그런 때마다 일일이 감사한다면 그 번거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네. 하하하~!”

“아, 알겠습니다. 스승님~!”

“예, 앞으로는 번거로운 인사는 생략할게요. 호호호~!”

그러자 다른 대중들도 함께 웃었다. 석양의 빛이 창틈으로 넘어왔다. 이렇게 해서 오늘의 공부는 마무리하기로 하고 다시 다음날을 기약했다. 우창도 분주했던 하루의 여정을 정리하고는 다시 오붓한 식구끼리 모여서 저녁밥을 먹고는 긴 하루를 마무리하고 휴식을 취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뻐꾸기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