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 제30장. 정신(精神)/ 26.직관력(直觀力)과 영감(靈感)

작성일
2021-12-10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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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 제30장. 정신(精神) 


26. 직관력(直觀力)과 영감(靈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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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창이 미소를 짓고 있자 채운이 우창에게 물었다.

“스승님, 궁금한 것이 생겼어요.”

“뭔지 말해 보게.”

“모체(母體)와 대지(大地)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니까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어서요. 어머니는 뒤에도 눈이 있다는 말이 있잖아요?”

“있지.”

“그것도 설명을 할 수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왜 안 되겠나. 하하하~!”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요?”

“영감(靈感)~!”

“영감이라니요? 어머니는 영감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물론이지. 다른 것에는 무딘 여인조차도 자식에 대해서는 매우 영활(靈活)한 정신력을 갖고 있으니 참으로 신비한 현상이라고 해야겠네. 하하하~!”

“자식이 눈물을 흘리면 어머니는 피눈물을 흘린다는 말도 영감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실제 현상인가요?”

“아무렴.”

“정말 놀라운 현상이네요. 그런데 땅에도 영감이 있을까요? 어머니야 생명력이 있고 정신(精神)도 살아있는 존재이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땅은 무정물(無情物)이라서 그러한 생각도 없을 텐데 이것도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가 있을지 궁금해졌어요.”

“아, 궁금한 것이 그것이었군. 하하하~!”

“스승님께서는 아무리 어린아이 같은 궁금증일는지 몰라도 제자에게는 매우 중요하거든요.”

채운이 비로소 자기의 궁금증을 우창이 이해했다는 것을 알고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우창이 다시 물었다.

“가령, 어머니가 농아(聾啞)라면 자식에 대한 영감도 없을까?”

“아니겠죠. 아무리 말하지 못하고 귀가 안 들리더라도 느낌조차 없진 않을 테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가요?”

“아, 땅은 입이 없으니 말하지도 못하고, 귀가 없으니 듣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어머니와 같은 영감이 있다고 하겠느냐는 채운의 말을 비유적으로 해 본 것이라네.”

“그렇다면 땅도 그러한 영감이 있다고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인가요? 어떻게 설명해 주실지 궁금해요. 호호호~!”

“채운은 아마도 지기(地氣)를 모른다는 말이군.”

“예? 땅에 기(氣)가 있다는 말은 들었으나 실로 그것이 영감과 무슨 상관이죠?”

“엄마가 느끼는 것이나 땅이 느끼는 것이나 다를 것도 없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효자 효녀는 어머니의 마음을 잘 헤아려서 편안하게 해 드리듯이, 지혜로운 사람은 땅의 마음을 잘 헤아려서 마른 땅에는 집을 짓고, 젖은 땅에는 우물을 파게 되는 것이라네. 하하하~!”

“그건 땅의 영감이 아니라 인간의 영감이 아닐까요?”

“뭐 그렇게 생각을 할 수도 있겠군. 자식은 어머니와 교감(交感)을 하지 못해도 어머니는 항상 자식과 교감을 한단 말이네. 그래서 지혜로운 고인은 땅도 살아있는 생명체라고 한단 말이야. 과연 놀라운 통찰력이라고 생각이 되지.”

“말씀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무래도 채운의 공부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겠어요.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하겠어요.”

“그래? 궁금한 것을 지금 어떻게라도 해결을 할 생각을 해야지 뒤로 물러나는 것은 깨달음을 얻을 기회를 버리는 것과 같을 텐데?”

우창의 말에 채운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와우~! 스승님은 참 눈치도 빠르세요. 호호호~!”

“어허~! 내가 말하지 않았나? 스승은 어머니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말이네. 어머니가 뒤에도 눈이 있듯이 스승은 제자의 머리 꼭대기 위에 앉아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네. 하하하~!”

“알았어요. 그렇다면 다시 여쭐게요. 호호호~!”

“암, 그래야지.”

“이렇게 이해하면 어떨까요? 어리석고 우둔한 자식은 어머니의 마음을 모르더라도 어머니는 어느 자식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영감을 갖고서 일일이 보살피고 있다고요.”

“왜 안 되겠나. 잘 생각하고 있군.”

“그런데 너무 자연적인 이야기만 해서 이것을 명학(命學)에 연결을 시킬 방법이 어떻게 되는지도 걱정이네요. 이점에 대해서 걱정을 덜어주세요.”

“그런가? 기(己)가 사주에 있다면, 특히 일간(日干)이라면 아마도 모성(母性)을 내재(內在)하고 있다고 보면 되지 않겠나?”

“아, 그렇게 적용하는 것이로군요. 그렇다면 영감(靈感)도 있나요?”

“영감이라고 해도 좋고, 혹은 직관(直觀)이라고 해도 좋지. 기(己)의 힘이 강하다면 직관력(直觀力)도 강하고, 부실(不實)하다면 직관력도 떨어지겠지만 없지는 않을 것이네.”

“와우~! 바로 이거에요. 호호호~!”

“왜? 자연 공부만 하고 어머니 공부만 하면 사주 공부는 언제 하느냐는 생각을 했었던 건가? 하하하~!”

“맞아요. 스승님의 말씀이 이치에는 부합이 되더라도 막상 사주(四柱)를 적어놓았을 적에 활용(活用)이 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겠다는 막연한 불안감도 없지 않았어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지. 학문(學問)만으로는 생계(生計)를 해결할 수가 없으니까 학술(學術)로 연결(連結)을 시켜야 한다는 부담감은 모든 분야에서 다 같은 것으로 보면 될 것이네. 하하하~!”

“아, 맞아요. 바로 그거에요. 학문은 심후(深厚)해도 빈곤(貧困)을 벗어나지 못하는 학자도 있는 것을 봤거든요. 그 이유가 학문만 하고 학술을 익히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을 몰랐어요. 그냥 생각하기로는 ‘밥벌이도 하지 못하는 학문을 뭐하러 파고드는 것일까?’싶었어요.”

“맞아. 달리 밥을 벌어 먹는 능력이 있다면 몰라도 학문으로 밥을 만들고자 한다면 반드시 운용(運用)하고 활용(活用)하는 능력도 겸비(兼備)해야 학술(學術)을 갖고 놀지 않겠느냔 말이지.”

“잘 알았어요. 그럼 다시 여쭐께요. 기(己)로 태어난 사람은 항상 능동적(能動的)이기보다는 수동적(受動的)이라고 봐야 하겠죠?”

“맞아. 그렇게 관찰하면 만무일실(萬無一失)이지.”

“그렇다면 기토(己土)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이와 같은 심리(心理)를 갖는다고 보면 되는 건가요?”

“물론이지. 다만 기본적으로 그렇다는 것만 빼놓지 않는다면 말이네.”

“예? 그것은 또 무슨 의미인가요?”

“무슨 의미겠나? 뒷문이지. 하하하~!”

“뒷문이라니요?”

우창의 말에 채운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눈만 깜빡이는 것을 보면서 우창이 미소를 짓고는 설명했다.

“사람이 싸움할 적에는 항상 도망갈 길을 봐놓고 싸우는 법이라네. 싸움에서 반드시 이긴다고 하더라도 막상 붙어봐야 아는 것이니까 말이네. 그러다가 아무리 해도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틈을 노렸다가 얼른 도망할 줄도 알아야 마음놓고 싸움을 할 수가 있는 것이라네. 하하하~!”

“아니, 그러니까 뒷문은 도망을 칠 곳을 만든다는 뜻인가요?”

“그렇지. 대부분의 기토(己土)는 그렇게 작용하겠지만 모두가 다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라네.”

“아무래도 그 말씀에는 동의하기 어렵겠네요. 그렇기로 든다면 어떻게 진리(眞理)라고 생각하고 그 이치(理致)를 마음 놓고 활용(活用)하겠어요? 갑자기 믿음의 마음이 흔들려요.”

“당연하지. 어떤 사람이 기토(己土)라서 감수성도 풍부하고, 영감도 있다고 했는데 만약에 그 사람이 ‘아닌데요.’라고 답을 하면 기분이 어떨까?”

“올바르게 추명(推命)을 했다면 어떻게 아니라는 말이 나오죠?”

“그야 당연히 느낌은 주관적(主觀的)이기 때문이지. 만약 그 사람의 사주에 상관(傷官)도 있고, 정관(正官)도 있다면 논리적으로 토론하는 것을 즐기면서 외향적인 성향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데 난데없이 내성적이고 영감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봐. 쉽사리 긍정하겠나?”

“그건......”

“추명(推命)이란 일간을 보는 것인가? 팔자(八字)를 보는 것인가?”

“그야 팔자를 보고 판단하는 것이잖아요?”

“당연하지. 그런데도 일간(日干)만으로 이러쿵저러쿵 하면서 단언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위험하겠느냔 말이라네. 하하하~!”

“아, 기본적인 것은 참고로 바탕에 깔아둔다는 의미인가요?”

“맞아. 그리고 또 치명적(致命的)인 문제가 있을 가능성도 배제(排除)하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네.”

“그것은 또 무엇인가요?”

“생일이 틀렸을 경우도 있을 가능성이 항상 있기 때문이라네.”

“맞아요. 생일을 잘 모르는 경우도 허다해요. 그렇다면 실제로는 갑목(甲木)으로 태어났는데, 부모의 착오나 어떤 인연으로 해서 그 사람의 일간을 기토(己土)로 적게 된다면 당연히 빗나갈 수밖에 없겠네요. 아하~! 그래서 뒷문을 열어놓는 의미가 되는 것이었네요. 과연 스승님의 용의주도(用意周到)함이란 혀를 내두를 지경이네요. 호호호~!”

“뭘 그 정도를 갖고 그러나. 고려해야 할 사항은 항상 열 가지가 넘는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하나를 배웠다고 바로 써먹으려고 안달을 할 수가 있겠느냔 말이지.”

“아하, 이제야 스승님의 말씀이 이해되었어요. 말씀을 듣고 보니까 방문자(訪問者)와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겠어요. 두려움도 매우 클 것으로 생각되고요.”

채운이 비로소 이해한 것으로 보이자 우창도 미소를 짓고 말을 이었다.

“당연하지. 그래서 경험이 쌓이기 전에는 손님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면 심장이 두근두근한다네. 그러다가 연륜이 쌓이고 자신의 학문이 학술로 자리를 잡아가게 되면 비로소 손님이 찾아오는 소리가 반가운 노랫소리가 되는 것이지. 그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갈등을 겪게 되는 것이고, 그것을 이기면 전문가의 길로 들어선 것이고, 못 이기게 되면 포기를 할 수도 있는 것이라네.”

“아, 스승님도 그러한 과정을 겪으셨던 건가요? 처음부터 잘 알고 대응했을 것만 같은데 누구나 그런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말씀이죠? 그렇다면 채운도 희망이 생기네요. 호호호~!”

“서툰 어머니는 아이와 교감을 잘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나? 그렇지만 경험이 쌓이게 되면 어머니도 점점 아이와 잘 소통하게 된다네 그래서 비로소 어머니는 등 뒤에도 눈이 생기게 되는 거라네.”

“정말 그렇겠어요. 이제 이해가 되었어요. 그리고 사람마다 그러한 과정에 도달하는 것은 제각각 다르겠죠? 어떤 사람은 빠르고 어떤 사람은 더디게 될 수는 있어도 결국은 그러한 경지를 누리게 될수 있는 것이겠죠?”

“물론이네. 게으르지만 않는다면 말이네. 하하하~!”

“명리가(命理家)와 방문자(訪問者)의 관계는 어떻게 보는 것이 가장 좋을까요? 처음에는 손님이 칼만 들지 않았지, 무섭게 느껴질 것만 같은데 어떻게 하면 포근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을까요?”

“그야 졸탁동시(啐啄同時)라야지.”

“예? 졸탁동시라면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려고 할 적에 어미 닭이 껍질을 쪼아주는 것을 말한다’는 뜻인가요?”

“맞아.”

“그러니까 그 말씀의 뜻을 생각해 보면, 명리가는 어미 닭이 되고 방문한 손님은 알 속의 병아리와 닮은 경우가 되겠네요?”

“그렇지.”

“스승님의 말씀만 들어봐서는 손님을 너무 과소평가(過小評價)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네요.”

“아하~! 채운에게는 아직 손님이 거대한 바위로 보이겠구나.”

“맞아요. 그래서 스승님의 말씀이 와닿지 않나 봐요.”

“그것은 조바심을 내지 않아도 되네. 실제로 경험이 쌓이면 찾아온 사람은 병아리보다도 더 허약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 말이네. 지금은 공부에만 전념해도 충분하단 말이기도 하지.”

“스승님, 손님이 찾아와서 알고 싶은 것에 대해서 말을 한다는 것은 병아리가 껍질 속에서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신호(信號)가 된다고 보면 될까요?”

“오호~! 채운의 매력(魅力)은 바로 그 집요(執拗)함이라고 해야지. 웬만하면 지금은 이해가 되지 않으니까 그냥 넘어가고 다음에 또 기회가 오면 물어보자는 마음이기 쉬운데 의문이 남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해결을 보고 넘어가려고 하는 그 마음에서 대가(大家)의 시간은 단축될 수밖에 없단 말이네. 하하하~!”

우창이 이렇게 칭찬하는 말을 듣자 채운도 기분이 좋아서 미소를 짓고는 다시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렇다면,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고 싶다는 신호를 보냈다는 것을 상담가는 알아봐야 한다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잘 모르면 서툰 엄마가 되는 것이고, 잘 알면 노련(老鍊)한 엄마가 되는 것이라네. 그리고 다른 방법은 없고, 오로지 반복해서 익히는 것밖에 없으니 상담가도 익혀야 할 것이 있는 셈이지.”

“스승님은 손님이 찾아오면 바로 왜 왔는지를 알아보시나요? 그래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데요.”

“그걸 어떻게 아나? 그건 귀신이 붙은 사람이라면 몰라도 학문을 한 사람에게는 영원히 알 수가 없는 영역이라네.”

“그렇게 영감이 없다면 어떻게 손님이 찾아온 것을 해결해 주겠어요?”

“그야 물어야지. 입은 뒀다가 어디에 쓰시려고?”

“아니, 그래도 기대를 갖고서 찾아온 사람에게 이것저것 다 물어보고 답을 주면 손님이 실망하지 않을까요?”

“괜한 걱정이라네.”

“정말요?”

“내가 채운을 속여서 무슨 이득을 볼 것이 있다고 거짓을 말하겠나?”

“그래도 믿어지지 않아요. 쉽게 설명해 주세요.”

“간단하다네. 병아리가 껍질을 톡톡 두드릴 때를 기다리는 것이지.”

“손님이 찾아왔는데 무엇인가 말을 해야지 마냥 기다리고 있으면 어떡해요?”

채운의 말에 우창이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알을 품고 있는 어미 닭이 얼른 병아리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조바심을 낼까? 병아리가 껍질을 툭툭 건드리지 않느냐고 안달복달을 하게 될까?”

“닭이야 안 그러겠죠. 그렇지만 답답해서 찾아온 사람이잖아요.”

“어허~! 닭이나 사람이나 같다고 하지 않았나? 하하하~!”

“아무리 그래도요.”

“손님이 찾아와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앉아서 채운만 바라보고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가 걱정된단 말이지?”

“맞아요. 그럴 경우가 참 난감할 것으로 생각된단 말이에요. 그러면 어떡해요?”

“만약에 반드시 무엇인가 알고자 하는 것이 분명히 있어서 찾아와서는 그렇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앉아있는 손님이 있다면 채운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아마도 잘 맞추는지 알아보려고 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혹 내가 왜 왔는지는 알아야 내가 궁금한 것을 물어보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할 수가 있겠네요.”

“맞아.”

“그러니까요. 그런데 주인도 가만히 앉아있으면 어떡하냔 말이에요.”

“여전히 그것이 걱정이로구나. 만약에 일각(一刻:15분)이 지나도록 말을 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예? 그렇게 오랜 시간을 주객(主客)이 마주 보며 말없이 앉아있다고요? 그러면 손님은 화를 낼 수도 있지 않을까요?”

“화를 낸 다음에는?”

“심하게 비난하고 가겠네요.”

“아마도 그렇게 되겠지?”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손님을 그렇게 응대해도 되나요?”

“물론이지.”

“예? 당연하다고요? 손님은 매우 실망하고 남들에게도 비난하면서 엉터리라고 하면 어떡해요?”

“니답답지 내답답나.”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아, 그런 손님이 왔다가 가면 소금을 뿌리는 대신에 내가 외우는 주문이라네. 하하하~!”

“주문이면 뜻은 없나요?”

“뜻이야 당연히 있지. ‘그대가 답답해서 왔다가 그냥 가면 그대만 답답할 뿐, 나는 전혀 답답해야 할 것이 없네’라는 뜻이지 뭐겠나. 하하하~!”

“아, 무슨 뜻인가 했네요. 호호호~!”

비로소 무슨 뜻인지를 이해한 채운이 크게 웃자 다른 대중들도 이야기에 빠져들었다가 같이 웃었다. 잠시 기다린 우창이 다시 말을 이었다.

“손님이 왔다가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고 그냥 가면 내가 답답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그만 답답할 따름이라네. 그러니 그냥 가는 것에 대해서 왜 마음을 쓰냔 말이지.”

“그렇지만 스승님도 그 사람이 그냥 앉아있을 적에는 어떤 영감이 들지 않으세요?”

“들지.”

“그렇겠죠? 무슨 느낌이 들까요?”

“이 녀석이 나를 저울질하러 왔나보다 싶지 뭘.”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물어봐야 하잖아요?”

“뭐라고? 나를 달아보러 왔느냐고?”

“맞아요. 그렇게 물어야죠.”

“뭐하러 그래? 가만두면 나는 승자(勝者)고 그는 패자(敗者)가 될 텐데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잖은가?”

“그건 또 무슨 방법인가요?”

“공성계(空城計)라네.”

“예? 공성계라니요. 그건 손자병법(孫子兵法)의 삼십이계(三十二計)잖아요?”

“맞아. 주인을 달아보러 온 무례한 방문자에게는 성을 비우고 놀러 가는 것이 상책이거든. 하하하~!”

“아하~! 이제야 스승님의 가르침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었어요. 이나 저나 무슨 말을 해도 시비를 걸 것이므로 아예 상대하지 않는 것이 최선책이라는 말씀이죠?”

“오호~! 이해가 되셨나?”

“정말 묘수(妙手)네요. 호호호~!”

“그런 목적이 아니고서야 일각(一刻)이 지나도록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앉아있을 턱이 없으니까 말이네. 물론 여태까지 그러한 사람을 만나진 못했네만.”

“그러니까 찾아온 사람은 반드시 물을 것이 있다는 것이니까 기다리고 있으면 말을 하게 될 것이고 그때가 병아리가 알 속에서 껍질을 톡톡 두드리는 순간이라는 것이지요?”

“맞아.”

“그러한 때를 기다려서 비로소 마주 쪼아주면 비로소 껍질이 깨지고 서로는 만나서 뜻을 이루게 되는 것이란 말이죠?”

“이제 졸탁동시의 의미를 확연(確然)히 깨달았구나. 하하하~!”

“그건 제자와의 문답에서나 해당하는 말인 줄로만 알았잖아요. 이렇게 손님과의 만남에서도 유효하다는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손님과 만나서 대화하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없던 영감(靈感)도 생긴다네. 그것은 후천적 기토(己土)라고 할 수가 있겠군. 기토의 영감이나 모성애의 영감이나, 상담경력이 쌓이면 생기는 영감은 모두 같은 것이더란 말이네.”

“아, 그렇지 않아도 영감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하느냐고 여쭈려던 참이었는데 용케도 그것을 알아보시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시네요. 참 신기해요. 호호호~!”

“포도대장(捕盜大將)이 도둑을 잡다가 보면 없던 육감(六感)이 생겨난다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타고난 것이 있으면 더 좋지만 없다고 하더라도 숙련(熟練)을 통해서 예지력(豫知力)과 직관력(直觀力)이 생기는 것이라네.”

“그것은 무슨 이치일까요?”

“어차피 태어난 모태가 기(己)이고, 살아가고 있는 이 땅도 기(己)인데 그 기토(己土)가 갖고있는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는 까닭이지 뭐겠는가.”

“정말 설명하시는 말씀만 듣다가 보면 제자도 모르게 빠져들어 가네요. 전혀 문제가 없는 설명을 들으면서 지식의 창고는 또 종지기만큼 커졌겠어요.”

“기토(己土)의 정신(精神)에 대해서 이 정도로 이해를 하면 되었을까?”

“처음에는 좀 막연했는데 이제야 명쾌하게 정리가 되었어요. 물질과 마음을 모두 얻은 느낌이 들어서 뿌듯한걸요. 정말 감사드려요. 호호호~!”

채운이 이해가 잘 되었다는 듯이 합장하면서 말하자 우창도 흐뭇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무토(戊土)에 대한 설명을 어떻게 해 줘야 할 것인지를 생각했다. 그러자 또 채운이 우창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스승님, 기(己)를 이해하고 나니까 갑자기 무(戊)에 대해서 궁금한 마음이 생겼어요. 보통 말하기는 무(戊)는 고산(高山)이고 준령(峻嶺)이라고 하지만 스승님의 관점은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에 대한 설명이 궁금해져요. 어떻게 설명해 주실까요?”

“무(戊)라.... 무가 고산(高山)이라는 말은 왜 나왔을까?”

우창은 무엇이든 그냥 답을 하는 법이 없었다. 우선 그대가 알고 있는 것이 어디에서 기인(起因)했는지부터 생각해 보았느냐는 반문(反問)이 항상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득 채운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게 한순간의 침묵이 천근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