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 제30장. 정신(精神)/ 17.경위분명(涇渭分明)

작성일
2021-10-25 0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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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5] 제30장. 정신(精神) 


17. 경위분명(涇渭分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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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창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오광을 바라보고 말했다.

“오광은 경위(涇渭)라는 말을 들어봤나?”

“들어봤습니다. ‘일이 그렇게 된 경위를 밝힌다’는 의미로 사용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려고 하네. 주자(朱子)라는 유가(儒家)의 학자가 있었네. 들어봤지?”

“물론입니다. 성리학(性理學)의 태조(太祖)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지 않습니까?”

“맞아. 서안(西安)의 부근에는 경하(涇河)와 위하(渭河)가 있다네.”

 

rudgkdnltn[참고자료: 위하(渭河)와 경하(涇河)]


“제자가 가보진 않았습니다만 스승님께서 말씀해 주셨으니 그런 줄로 알겠습니다. 그곳에서 경위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네. 경위구분(涇渭區分)이라는 말은 경하와 위하를 구분한다는 의미라네. 그러니까 위하(渭河)는 황토물인데 이것이 흘러서 황하(黃河)로 흘러가게 되어서 누런 황하가 된 것이고, 경하(涇河)는 맑은 물이 위하로 들어가는 것이 진실이라네.”

“아, 그렇다면 주자께서 그에 대해서 말씀하셨다는 것이지요? 그 내용이 궁금합니다.”

“우선 근원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시경(詩經)』으로 거슬러 가야 한다네.”

“시경이면 유가(儒家)의 삼대 경전이 아닙니까?”

“맞아. 바로 그 시경을 말한다네. 시경의 패풍(邶風)에 있는 곡풍(谷風)에 나오는 구절이라네. 「경이위탁(涇以渭濁),식식기지(湜湜其沚)」라는 내용을 말하는 것이라네.”

“그건 무슨 뜻입니까? 어렵습니다.”

“뜻을 풀이하면, ‘경(涇)은 위(渭)로 인해서 탁해지지만 가끔은 바닥이 보일 만큼 맑아지기도 한다’는 의미로 보면 되겠네.”

“아하, 그렇게 풀이를 해 주시니 알겠습니다.”

“이 내용을 주자가 언급한 것이 있는데 『주희집전(朱熹集傳)』이라는 책이네.”

“그렇습니까? 성현의 해석은 또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그 주희집전에서 말하기를 ‘경탁위청(涇濁渭淸)’이라고 했더라네. 이것은 무슨 뜻이지?”

“음.... 글자만 봐서는, ‘경하(涇河)는 탁하고, 위하(渭河)는 청하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어? 그렇다면 시경의 내용과는 서로 위배(違背)되는 내용이지 않나요? 둘중에 하나는 거짓이라는 말인데, 시경의 내용이 진실이라고 스승님께서 말씀하셨으니까 그건 아니라고 한다면, 주자집전이 거짓이라는 말입니까?”

“그렇다네. 주자는 송대(宋代)의 대학자이니까 또한 그로부터도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잖나? 그런데 아직도 그 오류(誤謬)를 바로잡지 않고 그냥 유전(流轉)되고 있다네. 이렇게 확인을 하면 바로 알아낼 수가 있는 현상(現象)조차도 그대로 전해지는 것을 본다면 말이지, 실제(實際)하는지도 알 수가 없는 신살(神殺)을 규명하고 골라낸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도 못 할 것은 없겠지? 하하하~!”

“과연 스승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겠습니다. 누군가 칼을 빼 들어야 하는데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거나 혹은 남들도 그렇게 말하니까 나도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넘어가고 있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네. 그래서 내가 깊은 학문은 없더라도 올바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에 대해서 일단 문제를 제기하게 되면 또 어느 후학이 그것의 진위(眞僞)를 가리는데 하나의 근거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 본다네.”

“알고 보니까 스승님께서는 외로운 싸움을 하고 계셨네요. 그냥 쉽게 넘어가면 될 것인데 그냥 두지 못하고서 시비를 가리시니까 말입니다.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아니네. 앞으로 또 100년이 지나고 나면 나는 자평법의 역적이 되어있을 수도 있다네. 비록 그렇더라도 옛날에 한 미친 학자는 이러한 주장도 있더라는 기록은 남지 않겠느냔 말이네. 마치 존경하는 하충 스승님처럼 말이지. 그래서 하충 스승님의 가르침에 힘을 입어서 이렇게라도 제자를 가르치는 것이지.”

“스승님께서 그렇게 단칼에 모조리 쳐내는데도 기준(基準)은 있지 않습니까? 그 기준이 어디에 있습니까?”

“기준? 내가 삼은 기준은 오행의 생극(生剋)에 있지.”

“아, 그러니까 오행의 생극으로 봐서 맞지 않으면 걸러낸다는 의미로군요. 그리고 천을귀인이든 백호대살이든 오행의 이치로 봤을 적에 타당하지 않으므로 적용을 시킬 의미가 없다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맞아. 바로 그렇지. 내가 보는 기준은 바로 세상의 이치는 오행(五行)에 있다고 보는 까닭이라네. 오행의 이치로 대입하고 조화(調和)를 보고 균형(均衡)을 이루면 생(生)이라고 하고, 균형을 잃으면 극(剋)이라고 보는 관점이 실로 자평법의 핵심(核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지.”

“스승님의 말씀으로 봐서는 제거해야 할 것은 신살뿐만이 아니라는 의미입니까? 또 다른 것도 있다는 말씀이신지요?”

“물론이네. 차차로 그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을 것이네. 우선 오행의 생극에 대해서 깊은 연구를 하다가 보면 마치 불상(佛像)을 조각하는 석공(石工)이 바위를 앞에 놓고서 쓸데없는 것을 다 쪼아내고 나면 그 안에 들어있던 부처가 드러나는 것과 같을 것으로 믿는다네. 하하하~!”

“아, 참으로 멋진 비유이십니다. 그러니까 그 작업은 참으로 고된 일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 과연 이것을 쪼아내는 것이 맞을지, 그냥 둬야 할지에 대해서 부단(不斷)히도 생각해야 하니까 말이네. 자칫해서 매우 중요한 것을 뜯어내게 되면 온전한 불상이 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네. 그래서 조심스럽지만 나는 내가 들고 있는 설계도를 믿는 수밖에 없지 않겠나? 당연히 그 설계도는 「오행생극(五行生剋)」이라고 믿고 열심히 궁리하는 것이라네.”

“정말 감탄했습니다. 제자도 스승님의 노력에 일조(一助)를 할 수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이렇게 배우고 있으니 당연히 큰 역할을 하는 셈이라네. 더욱 열심히 정진해서 오행의 이치를 밝혀보도록 하자는 말이기도 하네. 하하하~!”

“잘 알겠습니다. 학문을 연마한다는 것이 새로운 것을 찾아내어서 사유(思惟)의 폭을 넓히고, 더욱 쉬지 말고 연마해서 통찰(洞察)의 깊이를 더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마음에 크게 공감이 됩니다.”

“다만, 자평법(子平法)이라는 것이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팔 적에 물건의 상태와 그 물건의 수요(需要)와 공급(供給)의 상황에 따라서 가격이 정해지는 것처럼 명료(明瞭)한 것이 아니기에 항상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기준을 오행으로 세워놓고서 하나씩 제거해 나갈 뿐이라네. 그중에 오류가 생긴다면 온전히 내 책임으로 떠안아야지. 하하하~!”

“스승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까 참으로 많은 용기(勇氣)가 필요한 작업을 하고 계셨네요. 으레 그런 것이겠거니 했는데 전에 기문 도사와 대화에서 확실히 스승님의 관법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은 느꼈습니다만, 이와 같은 부담감조차도 감수(甘受)하면서 연구하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자, 그만큼 이해했다니 이 정도로 하고 또 궁금한 것이나 있으면 풀어보도록 하지. 하하하~!”

우창의 말을 들으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던 오광이 다시 말했다.

“스승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무척 놀랐습니다.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는 말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실제 상황에 부합하지 않는 명백한 오류는 누구라도 바로 잡아야 하지 않습니까? 비록 그것이 왕의 명령(命令)이라 하더라도 정신이 바로 있는 신하는 그 명을 거두어달라고 상소(上疏)를 올리는 것이 선비의 정신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위대한 사람이 한 말은 오류가 있어도 그냥 묻어둔다면 이것은 마치 상처에 들어있는 세균과 같아서 언젠가는 곪아 터지지 않겠습니까?”

“뭐, 그렇겠지? 하하하~!”

“스승님의 그 말씀에서 자조적(自嘲的)인 느낌이 듭니다. 스승님께서도 뭔가 내키지 않는 부분이 있으신 것입니까?”

“아니네. 내가 명예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정승판서가 되고 싶은 마음도 없으니 두려울 것인들 있겠나? 하하하~!”

“정말 다행입니다. 그러니까 눈치를 볼 대상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까?”

“있지. 왜 없겠어.”

“예? 스승님도 눈치를 봐야 할 대상이 있단 말씀이십니까?”

“물론이지.”

“혹 그 대상이 누구인지 말씀해 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왜 없겠어. 그 대상은 진리(眞理)라네. 다른 눈치는 볼 것이 없지만 유독(惟獨) 진리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말이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생각하고 판단한 것이 진리의 올바른 뜻에 위배(違背)되는 것은 아닌가 싶은 마음에 항상 눈치를 보고 있다네. 하하하~!”

“아, 제자는 또 무슨 말씀이신가 했습니다. 그러니까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올바른 진리일 뿐이라는 뜻입니까? 그 진리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여태 말하지 않았나. 기준은 오행이라네.”

“혹시 음양은 기준이 될 수 없습니까?”

“오호~! 참으로 재미있는 말이로군. 오광의 생각에는 어떤가?”

“제자의 생각으로는 음양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은 음양으로 구성되어서 움직이고 있지 않습니까? 왜 스승님께서는 오행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게 되셨습니까?”

“음양은 기준이 없기 때문이네.”

“예? 기준이 없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지요?”

“낮의 상대는 무엇인가?”

“그야 밤이 되지 않습니까?”

“밤의 상대는 그럼 낮이 되겠지?”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생각해 보게. 상대적인 것은 끝없는 순환(循環)의 고리를 이어가게 된다네. 낮이 되고, 또 밤이 되고, 다시 낮이 되는 순환이지. 이것이 음양의 본래 모습이 아니던가?”

“그렇습니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만.....”

오광의 답에 우창이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오행은 그 중심점(中心點)을 관통하는 것이라네. 음양은 순환만 있지만 그 음양이 오행을 만나서 비로소 완성을 이루는 것이라네.”

“말씀의 뜻이 좀 어렵습니다. 쉽게 풀어서 설명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가? 음..... 목(木)의 음양(陰陽)은 있는가?”

“물론입니다. 갑(甲)과 을(乙)이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갑을(甲乙)이 주체(主體)인가? 아니면 목(木)이 주체인가?”

“그야 목이 주체가 되고, 상황에 따라서 갑이나 을의 작용이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요?”

“오호~! 어렵다고 하면서도 대답은 잘하는구나. 하하하~!”

“사실은 제자가 답변을 드리면서도 맞는 것인지 확신은 들지 않습니다. 그냥 그렇게 답을 하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으로 말씀드리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괜찮네. 그것조차도 오광의 내면에서 나오는 말일 테니까. 하하하~!”

“아, 그렇긴 합니다. 저의 생각을 말씀드린 것은 맞습니다.”

“이제 음양은 주체(主體)가 되지 못하고 변화하는 객체(客體)라는 의미를 이해하겠는가?”

“아직도 명료하게 이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어렴풋이나마 스승님께서 생각하시는 의도(意圖)는 이해가 될 것도 같습니다.”

“경하(涇河)가 탁수(濁水)라고 하거나 청수(淸水)라고 하거나 진실은 어떤가?”

“경하의 진실은 청수일 따름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진리도 그렇다고 생각하네. 어느 학자는 이렇다고 하고, 또 다른 학자는 저렇다고 할 수도 있다고 보네. 시경(詩經)에서는 경하(涇河)가 청수(淸水)라고 했지만 주자집주에서는 경하가 탁수라고 했다고 한들 자연의 실체는 바뀌지 않듯이 말이네.”

“그 말씀은 곧 천을귀인이 삶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며, 스승님처럼 그러한 것의 실체조차도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엄연한 진리는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를 해도 되겠습니까?”

“옳지~! 이제야 뭔가 정리가 되는 모양이군.”

우창의 말을 들으면서 뭔가를 생각하던 오광이 다시 물었다.

“제자가 걱정스러운 것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뭐든 말해 보게나. 하하하~!”

“만약에 세상의 모든 학자가 모두 천을귀인의 존재를 증명(證明)하고 오행의 이치를 뛰어넘어서 그 작용이 뚜렷하다고 하면 어쩌시겠습니까?”

“증명한다고 했나? 증명보다 더 명료한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것은 마치 직접 경하(涇河)에 가서 물이 맑은지 탁한지를 확인하는 것과 같을 테니까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어리석음을 명료하게 깨달아야지. 비록 오행의 논리로는 납득이 되지 않지만, 분명히 그러한 이치가 있으니 설명을 하지 못하더라도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말이네. 이러한 것을 ‘현상학(現象學)’이라고 한다네. 설명은 할 수가 없지만 현실에서 드러나는 것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군.”

“스승님의 말씀으로는 그렇게 될 가능성이 단 일리(一釐:1%)도 없다는 뜻으로 이해를 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네. 비단 천을귀인뿐이 아니라네. 백호대살, 원진살은 물론이고, 12운성(運星)이라고 부르는 포태법(胞胎法)도 마찬가지라네.”

“왜 그러한 이론도 모두 이치에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인지요?”

“오행의 관점으로 보면 그 구조가 전혀 부합되지 않는 까닭이라네.”

“그러니까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타당성의 여부는 판가름이 되는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맞아.”

“이건 다른 말씀입니다만, 문득 든 생각입니다.”

“그래? 무슨 말인고?”

“천을귀인에 대해서 비중있게 다루는 학문이 육임(六壬)이라고 하셨습니까?”

“맞아. 그냥 천을귀인만 논하는 것이 아니라. 양귀(陽貴)와 음귀(陰貴)도 논한다네.”

“예? 그 말씀은 양의 천을귀인도 있고, 음의 천을귀인도 있다는 뜻입니까? 그것은 음양의 이치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지. 음양은 어디에나 부합하니까. 하하하~!”

“부합하는 것과 실체는 다른 것입니까?”

“물론이지. 아직 그 차이에 대해서 이해가 부족한가 보군.”

“부합(符合)이 된다면 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잠시 들었습니다. 그런데 양귀와 음귀는 무슨 뜻입니까?”

“아, 그것은 해가 떠 있는 동안에 얻은 점사(占辭)에는 양귀의 동태를 살피고, 해가 진 다음에 얻은 점사에서는 음귀의 동태를 본다고 하더군.”

“그렇다면 구분이 되어있다는 말씀이군요.”

“당연하지. 가령 갑무경(甲戊庚)은 축미(丑未)가 천을귀인인데, 낮에는 축(丑)의 천을이 담당하고, 밤에는 미(未)의 천을이 담당하는 것이라네.”

“이야~! 말씀만 들어봐서는 뭔가 실제로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아, 제자가 여쭙고 싶었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스승님께서 자평법에서 천을의 존재를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셨다면 육임을 연구하는 곳에서도 천을은 마치 신기루와 같아서 헛된 공식이라고 가정(假定)을 할 수는 없는 것인지가 궁금했습니다.”

“당연히 생각을 해봐도 되겠군. 하하하~!”

“그렇다면 여기에 대해서 답변을 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지. 여기에 대한 답변이네.”

“예?”

우창이 오광의 물음에 미소를 짓고는 대답했다.

“그것은 육임에게 물어보게나. 하하하~!”

“아, 그게 답변입니까? 참으로 정확하고 명쾌한 답변이십니다.”

“당연하지 않은가? 육임의 문제는 육임에서 풀어야 하는데 그것을 자평학에서 바라본다면 쓸모가 없다고 생각할 테니 이로부터 온갖 문제가 야기(惹起)된다네. 실로 육임(六壬)의 눈으로 자평법을 봤기 때문에 천을귀인이 들어온 것이고, 풍수(風水)의 눈으로 자평법을 봤기 때문에 합충(合沖)이 끼어들었고, 의학(醫學)의 눈으로 자평을 봤기 때문에 오장육부가 사주와 연관이 있다고 하는 논리가 형성된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말이네.”

“과연 그러한 것입니까?”

“그렇다네. 가감승제(加減乘除)는 산수법(算數法)에서 통용되는 이치인데 이러한 이치를 어문법(語文法)에 적용하면 쓸모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기 십상이지 않겠는가?”

“예? 그것은 또 무슨 뜻입니까?”

“가령, 내가 오광에게 십 년을 공부하면 깨닫게 된다고 했다면 말이네. 산법(算法)에 의하면 5는 10년의 절반이므로 5년을 공부하면 자평의 절반을 깨닫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를 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네. 하하하~!”

“아니, 그게 타당한 이치입니까?”

“뭐가 문제인가? 십(十)의 반은 오(五)이니 당연하지 않은가? 하하하~!”

“그렇지만 깨달음은 사람마다 달라서 혹자는 언하(言下)에 깨닫고, 혹자는 3년을 수련해서야 깨닫고, 혹자는 평생을 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맞아. 그러니까 수행(隨行)에 산법(算法)을 적용해서 생각하면 되겠느냐는 말이네.”

“아, 이제야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육임에서 천을귀인을 버려도 될 것인지는 육임을 연구한 다음에 판단하라는 말씀이지요?”

“옳지~!”

“그러니까 스승님은 자평법은 오행으로 기준을 삼아야 하지만 그 나머지는 모른다는 말씀이신거군요?”

오광이 어느 정도 이해를 한 것으로 보이자 우창이 말했다.

“아, 내가 알기로는 『역경(易經)』은 음양으로 기준을 삼는다네. 모든 이치는 음양에 부합되지 않으면 버리고 부합되면 채용하는 것이 분명하니까. 하하하~!”

“그건 또 어떤 이치에서 나온 말씀이십니까?”

“천지비(天地否)~!”

“제자가 역경은 잘 몰라서 여쭙습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상괘(上卦)는 건(乾)이고, 하괘(下卦)가 곤(坤)인 대성괘(大成卦)를 비(否)라고 한다네.”

“그러니까 위는 하늘이고 아래는 땅이라는 뜻입니까? 그런데 비(否)는 부정하는 의미가 아닙니까?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는데 왜 아니라는 이름을 붙였을까요?”

“그것을 이해하려면 반대로 된 괘를 알아야 한다네.”

“반대라면 위는 땅이 되고 아래는 하늘이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그렇다네.”

“그것은 세상이 뒤집힌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야말로 비(否)로 봐야 할 것 같은데 이 괘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괘의 이름은 지천태(地天泰)라네.”

“예? 천하태평(天下泰平)의 태(泰)란 말입니까? 좀 이상합니다.”

“뭐가 이상한가? 주역의 학자들은 아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말이네.”

“제자가 생각하기에는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이상합니다. 그것은 자연의 풍경이 아니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다만 음양의 풍경이라네. 하하하~!”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좀 설명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음양(陰陽)의 가장 큰 죄악(罪惡)이 무엇인지 아는가?”

“아니, 그런 것도 있습니까?”

“물론이네. 하하하~!”

“궁금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무변(無變)~!”

“예? 변화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씀입니까? 그러니까 음양의 이치는 변화하지 않는 것이 죄악이라는 뜻입니까?”

“그렇다네. 태극을 생각해 보면 알 일이네. 태극은 잠시도 쉬지 않고 변화하는 것을 담은 상징(象徵)이니까.”

이렇게 말을 한 우창이 붓을 들어서 태극(太極)을 그렸다.

335 태극도

자원은 우창이 그린 태극을 보자 감탄하면서 말했다.

“와우~! 싸부의 태극은 그야말로 일필휘지(一筆揮之)로 탄생한 작품이네. 싸부는 화가(畵家)의 길로 갔어도 굶지는 않았겠에요. 호호호호~!”

자원의 말에 우창도 미소를 짓고는 설명을 이었다.

“이것을 들여다봐. 태극은 잠시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것이 흡사 춘하추동(春夏秋冬)과 같다네. 봄인가 싶으면 어느 사이에 폭염(暴炎)이 쏟아지고, 또 폭염인가 하면 어느 사이에 가을이 찾아오는 이치와 같다네. 이것을 보면서 음양의 도(道)를 완성시켰다고 생각해도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네. 그런데 생각해 보게. 항상 봄이라면 꽃은 피겠지만 결실은 없을 것이고, 항상 가을이라면 꽃이 없으니 결실도 없지 않겠어?”

“아, 그래서 역경에서는 천지(天地)는 비(否)가 되고, 지천(地天)은 태(泰)가 되는 것이로군요. 이제야 이해가 되었습니다.”

“안정(安定)을 최우선(最優先)으로 논하는 오행법(五行法)과 변화(變化)를 최우선으로 논하는 음양법(陰陽法)은 서로 보완할 수는 있을지라도 기준을 정할 수는 없는 이치라네. 하하하~!”

“정말 이렇게 심오한 말씀을 듣기는 처음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두 가지의 이치가 존재하는 것입니까?”

“두 가지라니?”

“음양법과 오행법 말입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예? 그것은 또 무슨 뜻인지요?”

“불가(佛家)에서는 또 달리 말을 하니까 말이네.”

“어떻게 말을 합니까?”

“불이법(不二法)~!”

“불이법이라니요. 둘이 아닌 이치라는 뜻인가요?”

“맞아, 실은 ‘둘이라고 해도 안 되는 이치’라고 해야 할 수도 있겠지.”

“그것은 음양도 오행도 이치가 아니라는 뜻입니까?”

“아, 그게 아니라 음양과 오행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틀렸다는 의미로 봐야 하겠지. 하하하~!”

“스승님, 공부가 갈수록 어렵습니다.”

“그래? 이제 그만하고 쉬세나. 그래야 내일 또 공부할 테니까. 하하하~!”

“아, 벌써 시간이 삼경(三更:子時)입니다. 제가 궁금한 것을 풀고자 스승님을 괴롭혀드렸습니다. 귀하신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쉬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아니라네. 즐거운 마음으로 나도 이야기를 나눴으니 행복한 밤이었네. 이렇게 함께 담론을 즐길 수가 있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라네. 잘 쉬게나.”

우창도 긴 하루를 이렇게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비록 몸은 노곤했으나 마음은 상쾌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리고는 이내 잠속으로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