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 제30장. 정신(精神)/ 16.학문(學問)의 명암

작성일
2021-10-20 0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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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4] 제30장. 정신(精神) 


16. 학문(學問)의 명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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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운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꾸밈없이 활짝 웃은 다음에 말했다.

“잘 알겠어요. 명학(命學)이 사주풀이로 길흉화복(吉凶禍福)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살피는 공부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것도 같아요.”

“오호~! 이제야 비로소 간지의 공부에 입문했다고 할 만 하겠군. 하하하~!”

채운이 비로소 자신의 사주에 대해서 궁금했던 것과 근심스러웠던 것들에 대해서 말끔하게 정리가 되었음을 느끼고는 우창에게 사례(謝禮)했다. 마음으로는 큰절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다른 제자들에게 괜히 소란스러워 보일 것도 같아서 자제(自制)했다. 그러자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춘매가 말했다.

“정말 오늘의 가르침은 평생을 가슴속에 새겨둬야 하겠어요. 재물에 대한 정리를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은 미처 몰랐거든요. 그런데 오늘도 하루해가 저물었어요. 오늘 못다 한 공부는 내일 다시 펼치기로 하고 오늘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것이 어떨까 싶어요. 호호호~!”

그제야 유시(酉時)로 들어간 지도 한참 지났다는 것을 느낀 우창과 제자들이었다.

“어? 시간이 이렇게 흘러가 버렸나? 그럼 내일 또 공부하기 위해서 각자 휴식처로 귀가하시는 것이 좋겠네.”

그러자 채운이 말했다.

“스승님의 가르침을 뼈에 깊이 새기겠습니다. 오늘 모두 행복했던 시간이었지 싶어요. 안녕히 귀가하시고 내일 진시에 다시 만나겠어요.”

이렇게 모두의 마음속에는 아쉬움 하나와 행복감 하나씩을 품고서 저마다의 집으로 돌아가고, 다시 원래대로의 식구들만 남았다. 그러자 오광이 말했다.

“스승님의 가르침이 우리만 있을 때보다 더 신명이 나시는 것 같아서 참으로 좋습니다.”

그러자 춘매도 한마디 거들었다.

“당연하잖아. 이렇게 많은 제자에게 오행의 이치를 전해 주는 기쁨이 그만큼 커졌으니까 말이야. 호호호~!”

춘매의 말을 듣고 있던 자원이 말했다.

“싸부의 표정이 이렇게도 밝은 것도 참 오랜만에 뵙는 것 같아. 아까 채운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말씀을 들으면서 나도 완전히 몰입되어서 명학으로 이렇게나 다양한 관점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언니도 그러셨구나. 그중에서도 특히 겁재에 대한 해석에서 소름이 돋았어요. 도둑과 보시의 결과를 동시에 생각할 수가 있다는 것에서 말이에요. 호호호~!”

그러자 오광이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우창에게 물었다.

“스승님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는데 여쭤도 괜찮을까요? 하루종일 제자들을 가르치느라고 힘드셨는데 조금은 망설여지기도 합니다.”

“아, 뭔데? 그런 걱정은 하지 말고 묻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게나. 하하하~!”

“그럼 여쭙겠습니다. 문득 든 생각입니다. 팔자를 풀이한다는 것은 어떤 마음으로 묻는가에 따라서도 달라지고, 또 어떤 마음으로 답을 하느냐에 따라서도 전혀 다른 그림이 그려지겠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렇겠습니까?”

“물론이지.”

춘매가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끼어들었다.

“오광의 말을 들어보니까 말이 간단하게 끝나지 않을 것 같네. 우선 저녁밥부터 해결하고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떨까?”

“예, 누나의 말씀이 옳습니다. 얼른 상 차리는 것을 돕겠습니다. 오늘 저녁엔 무엇을 먹게 될까요?”

“저녁엔 거지처럼 먹으랬잖아? 호호호~!”

“뭐든 좋습니다.”

그야말로 조촐하게 저녁을 먹고 얼른 치웠다. 그리고서야 모두 둘러앉아서 차를 마셨다. 늘 그렇게 지내왔는데 갑자기 옛날의 풍경이 되어버린 것처럼 생소한 느낌도 들었다.

“아니, 차를 이렇게 마시는 것이 무척이나 오래전이었던 것처럼 느껴지지?”

춘매도 그러한 느낌이 들었는지 이렇게 말을 하면서 자원을 쳐다봤다. 자원도 그렇게 느꼈는지를 물어보는 뜻이기도 했다.

“나도 그렇게 느껴지네. 열정적인 신입 제자들의 열기가 넘쳐서 그래. 이제 우리는 영원히 옛날로 돌아갈 수가 없을 거야. 호호호~!”

그러자 우창이 말했다.

“모두 오지 말라고 할 것을 그랬나?”

우창의 말에 모두 한바탕 크게 웃었다. 그러자 오광이 말했다.

“스승님의 가르침이 점점 넓어지고 있는 까닭입니다. 새로 인연이 된 선생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제자도 깨달은 것이 많았습니다. 스승을 찾아서 저렇게들 먼 길을 돌아서 왔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짠하기도 했고요. 특히 채운 선생의 사주를 보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광의 말에 우창이 물었다.

“참, 아까 뭘 물었지?”

“아, 예. 아까 말씀드렸던 것은 같은 사주라도 어떻게 바라보고 조언을 하느냐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은 천양지차(天壤之差)가 되겠다는 생각을 말씀드렸습니다. 조언(助言)을 할 것인지, 아니면 예언(豫言)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습니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 스승님의 정리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야 당연한 음양의 이치가 아니겠나?”

“그렇습니다. 스승님의 말씀을 어떻게 수용하면 좋을지를 듣고 싶습니다.”

“같은 사주를 놓고서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우울한 마음으로 풀이하는 사람은 부정적(否定的)인 면이 크게 보이고, 기쁨에 가득한 사람의 풀이는 긍정적(肯定的)인 면이 더 크게 보이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나?”

“물론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자세를 취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궁금합니다.”

“당연히 긍칠부삼(肯七不三)이라야지.”

“예? 무슨......?”

그러자 춘매가 나서서 말했다.

“스승님의 말씀은 긍정적인 부분으로 7할을 말해 주고 부정적인 것은 3할만 말하면 된다는 뜻이죠?”

“맞아. 하하하~!”

다시 오광이 물었다.

“모두 긍정적으로만 말하는 것이 안 됩니까?”

이번엔 우창이 답했다.

“안 될 것이야 없지. 다만 상황에 따라서 말을 하는 것이라네. 만약에 자식이 죽어서 우울한 마음으로 방문을 했다면, 이런 여인과 상담을 할 적에는 긍십부영(肯十不零)으로 답하고, 일이 좀 풀리는 듯한 사람이 기고만장(氣高萬丈)해서 찾아왔다면 이번에는 긍사부육(肯四不六)으로 말해야 하니까 정해진 것은 없다고 봐야겠지. 하하하~!”

“과연 명언이십니다. 상담가의 마음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이해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정해진 것은 없지만 상황에 따라서 반드시 정해질 것은 있다는 말씀이시네요.”

“그렇지.”

“이러한 가르침을 책으로 배우려니까 답이 없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직접적으로 생생하게 들어봐야 어떤 상황에서는 이렇게 답하고, 또 어떤 상황에서는 저렇게 답한다는 것도 알 수 있을 텐데 책에는 아무래도 기본적인 것에 대해서만 언급을 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당연하지. 그래서 책은 책이고, 현실은 현실이라는 말도 나오는 것이라네. 다만 책이 없이는 기준을 알 수가 없으니까 먼저는 책을 의지해서 기준을 잡고, 그다음에 기준이 선 다음에는 이렇게 상황에 따라서 변화하는 것을 익히면 만무일실(萬無一失)이지. 하하하~!”

“이제야 비로소 스승님의 말씀을 잘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역설적(逆說的)인 관점도 가능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재물이 중요하다고 말해줘야 할까요?”

“오호~! 멋진 질문이군. 낭비(浪費)가 심한 사람은 자신의 경제력(經濟力)을 돌보지 않고서 마구 소비하다가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家族)과 이웃에게조차도 큰 피해를 주는 사람에게는 재물의 소중함을 말해줘야지.”

“아, 그렇겠습니다. 그렇지만 제자가 생각하기에 그런 사람은 이미 조언을 해봐도 듣지 않으려고 하지 싶습니다.”

“물론이지. 그리고 찾아와서 묻지도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질문이라고 하면 되지 싶군. 하하하~!”

“참, 낮에 말씀하시면서 백호대살(白虎大殺)이라고 해서 흉하다고 한 말을 생각해 봤습니다. 비록 흉살(凶殺)에 대해서 갖게 되는 두려움은 그렇게 알려줘서 벗어날 수가 있게 한다고 보면, 혹 누군가는 길신(吉神)이 사주에 들어있다는 것에 대해 희망을 갖고 살아갈 수도 있을 텐데 이런 경우조차도 의미가 없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 옳을까요?”

우창이 대답 대신에 다시 오광에게 물었다.

“오광은 어떻게 답을 해주고 싶은가?”

“그런데 제자는 어떤 길신이 있는지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흉살의 대표로 백호대살이 있다면, 길신의 대표격인 것도 있습니까?”

“물론이네, 대체로 천을귀인(天乙貴人)을 최고의 길신으로 꼽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네.”

“천을귀인이라니 글자만 봐도 뭔가 큰 도움을 주는 관음보살 정도로 느껴집니다. 이러한 것이 사주에 있어서 희망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 구조는 어떻게 이뤄진 것이며, 그것에 대해서는 믿어도 되겠습니까?”

“이미 오행을 벗어난 흉살이 의미가 없다면 오행을 벗어난 길신은 또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제자의 좁은 소견으로는 아마도 같은 의미에서 길신도 거론할 의미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맞아.”

“그렇지 싶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대표 격이라고 할 수가 있는 천을귀인의 구조는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합니다. 하나만 구조를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백호대살에 대해서도 그 구조가 궁금합니다. 많은 신살(神殺)이 있겠습니다만 대표격인 두 가지만 이해를 한다면 그 나머지는 미뤄서 짐작을 할 수가 있겠습니다.”

“알았네. 그렇다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이나 하시게. 하하하~!”

“귀를 기울여서 마음으로 담겠습니다.”

“갑무경(甲戊庚)은 축미(丑未)를 만나면 천을귀인이 되네. 을기(乙己)는 자신(子申)을 만나면 천을귀인이 되고, 병정(丙丁)은 해유(亥酉)를 천을귀인으로 삼고, 신(辛)은 오인(午寅)이 천을귀인이고, 임계(壬癸)는 사묘(巳卯)를 만나면 천을귀인이라고 한다네.”

“그러니까 갑무경(甲戊庚)의 일간은 지지(地支)에 축미토(丑未土)가 있으면 그것이 천을귀인이라는 뜻이군요?”

“맞아. 천을이 있으면 모든 길한 작용은 증대하고 흉은 소멸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니까 그야말로 최상의 길신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렇겠습니다. 사주에 그러한 것이 있다고 부추겨 준다면 그 말을 듣고는 그대로 믿고 싶어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적용(適用)은 어떻습니까? 공식은 그렇다고 하지만 오행의 균형에 대한 언급이 없이 단순히 구조만으로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래도 되는 것입니까?”

“그야 생각해 보면 알 일이지 않은가? 가령 갑목(甲木)으로 태어난 사람이 간지에 수(水)가 하나도 없는데 지지에는 축미(丑未)가 네 글자가 있다면 이때의 천을은 어떤 작용을 할까?”

“오행의 균형으로 본다면 수(水)의 생목(生木)이 절실한데 축미토(丑未土)가 깔려 있으면 오히려 흉한 것으로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사주를 갖고 상담하러 갔는데 풀이를 해주는 선생이 천을귀인이 지지에 깔렸으니 대부귀(大富貴)를 할 팔자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한 말을 들었다면 그 사람은 너무나 좋아서 마음이 날아갈 듯하겠습니다. 제자가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겠는데 하물며 당사자는 더 말을 할 나위도 없겠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겠지?”

“당연하지요. 그런데 균형을 이루지 못했으니 결국은 천을귀인이 무더기로 온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스승님께서는 신살의 의미는 깊이 생각할 여지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까?”

“오호~! 벌써 그것을 깨달았단 말인가?”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깊은 이치를 모르는 사람에게 ‘천을도 다 소용없다’고 한다면 상처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조언해 줘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오광은 희망고문(希望拷問)이라는 말을 들어봤나?”

“희망(希望)은 자신의 미래에 뜻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것이고, 고문(拷問)은 원하는 답을 얻어내기 위해서 극심하게 고통을 가하는 것인데 이 두 가지의 극단적인 의미가 되는 말이 연결된다는 것은 처음 들어봅니다.”

“그렇지 싶네. 이뤄질 것이라는 희망으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히 좋겠지. 그러나 이뤄질 수가 없는 것을 바라고 살아간다면 결국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 희망이 이뤄지지 않을 것을 빤히 알면서도 마냥 기다리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쩌면 선도(仙道)를 수련하면서 불로장생(不老長生)을 꿈꾸고 있는 것도 아마 희망고문이 아닐까 싶군. 이렇게 기대하고 살아가는 사람과 비교해서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을 생각해 보게나.”

우창의 물음에 오광이 다시 곰곰 생각해 보고는 말했다.

“당연히 이뤄질 수가 없는 사안에 대해서 기대하는 것은 ‘떡을 줄 사람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데 김칫국을 먼저 마신다’는 말과 흡사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오, 적절한 비유로군. 아니, 오광이 나이도 젊은데 그런 비유도 들 줄 알고 참 재미있는걸. 하하하~!”

“스승님의 비유법을 보면서 제자도 그렇게 해보고 싶었는데 스승님께서 재미있으시다니까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뭐든 처음이 어렵지 자꾸 반복하다가 보면 자연스럽게 비유도 활용할 수가 있을 것이네. 잘했어. 하하하~!”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희망고문이라는 말도 참 재미있습니다. 희망으로 고문하는 것은 아마도 얼마나 헛된 희망으로 시간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허비했으면 그런 말이 나왔겠는가 싶기는 합니다. 그러니까 흉살(凶殺)로 인해서 마음에 상처를 받는 것은 좌절 고문이 되나요?”

“오호~! 갈수록 말이 잘 다듬어 지는걸. 그래도 되겠네.”

“그런 사람에게는 당연히 쓸모없는 이야기이므로 잊어버리면 된다고 말해 준다지만, 길신조차도 쓸모없으니까 헛된 꿈을 갖지 말라고 해야 하겠지요?”

“맞아, 길신(吉神)과 흉살(凶殺)을 묶어서 신살(神殺)이라고 하는데, 신살이든 무엇이든 간에 그 중심에는 오행의 생극이 있으면 된다네. 그러니까 오행의 생극을 바탕에 두고서 그 상황에 부합되는 신살을 응용한다면 또한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혹 그러한 신살도 있습니까?”

“있으면 뭣하고 없으면 뭣하겠느냔 말이지. 가령 ‘천을귀인이라서 흉화위길(凶化爲吉)의 작용을 하지만 그것이 용신이 되지 못한다면 있더라도 없는 것과 같다’고 한다면 오행생극(五行生剋)의 이치에 위배가 된다고 말을 할 것까지는 아니지만, 이렇게 말을 하기로 든다면 실제로 천을귀인이 있거나 말거나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질문에는 답을 할 방법이 없겠더란 말이네.”

“과연 그렇겠습니다. 그나저나 천을귀인은 원래 자평명리학에서 만들어진 것입니까?”

“아닐세.”

“예? 그렇다면 주역에서 나왔습니까?”

“그것도 아니라네.”

“그렇다면 어디에서 생겨난 것입니까? 그 출처가 궁금합니다.”

“나도 잘은 모르지만 언젠가 『육임학(六壬學)』과 관련된 책을 보니까 천을귀인에 대해서 매우 소중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았네.”

“육임학은 어떤 학문입니까?”

“아, 육임에 대해서는 처음 들어보겠구나. 그것은 점술(占術)이라네. 점술계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점학(占學)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 어쩌면 육임을 운용하던 학자가 자평법을 병용(倂用)하는 과정에서 끌어들인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은 해 봤네.”

“일리가 있겠습니다. 학문이 서로 이합집산하는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이론들이 서로 섞여드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구나. 매우 합리적인 생각이로군. 그렇다면 초창기에는 어중이떠중이로 주워 모은 이론들이 모여들어서 혼란이 있었다면 그로부터 1천 년이 지난 다음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무엇이든 처음에는 우왕좌왕(右往左往)해도 시간이 흐르면서 걸러지고 정리되어서 자리를 잡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자평명리학도 또한 마찬가지로 그렇게 자리를 잡아가야 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만.”

“옳은 말이네.”

“그런데도 정리가 되지 않고 있는 것이 바로 신살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어디 신살 뿐이겠나. 그 외에도 수두룩하지만 시급한 것이 있다고 하면 가장 우선적으로 정리해야 할 것이라고 하겠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생겼습니다.”

“뭔가?”

“육임학에서 그렇게나 소중한 것이라면 자평법에서도 어떻게든 쓸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마도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스승님께서 그들을 잘 활용할 방법을 강구하는 것은 어떠실까 싶습니다.”

“이미 선학(先學)들께서 그렇게 활용한 것이 기록으로 남아있다네. 그러한 책은 『연해자평(淵海子平)』이나 『삼명통회(三命通會)』에 남아있는 것으로 봐서라네. 문제는 그러한 책조차도 이미 거론을 할 의미가 없는 내용들이 7할은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보니 어떻게 그것을 믿고 활용하겠느냐는 말이네.”

“왜 그러한 것을 정리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권위가 가장 큰 영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네. ‘어찌 감히’라고 하는 생각이 학자들에게는 상당한 부담으로 자리를 잡고있는 까닭이라네.”

“그것을 바꾸기는 쉽지 않겠습니다. 더구나 보수적인 학자라면 더욱 그렇겠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줄까?”

“예, 스승님. 무슨 말씀이라도 재미있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만, 특히 재미있는 말씀이라면 대환영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창은 오광의 말을 들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