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가 떨어진 자리

작성일
2019-08-19 06:06
조회
631

여주가 떨어진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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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를 알게 된 것은 대만에 여행을 가서였다. 타이페이 화서가(華西街)에 가면 꼭 들리는 과일쥬스 집이 있는데 처음에는 망고쥬스를 사먹었다. 그런데 낯선 과일이 눈에 띄어서 주인에게 뭐냐고 물어봤다. 돌아온 답은.

"쿠과(苦瓜)~!"

아니, 달콤한 것도 아니고, 신 것도 아니고,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과일 이름이 이렇게 생겼다는 것에 호기심이 동해서 한 잔을 시켰던 것이 인연이다.

쥔장 : 다른 과일이랑 섞어서 해 드릴까요?(쓰니깐...)
낭월 : 아뇨, 쿠과만 넣어서 해 주세요.(쓴걸 좋아하니깐.)

그 한 잔의 쿠과주스는 매우만족이었다. 쌉싸름~~한 것이 입맛을 개운하게 해 준다. 원래 씀바귀를 좋아하는 입맛인지라 제대로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는 생과일쥬스를 사먹게 되면 제일 먼저 쿠과가 있는지를 알아보게 되었다. 식당에서도 쿠과, 그러니까 여주 무침이 나오면 반드시 함께 먹었다. 실로 여주라는 말은 몰랐다. 그래서 낭월에게 여주는 쿠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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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에 산책을 갔다가 농익어서 떨어져버린 여주를 보고 왔는데 다시 생각해봐도 아깝기가 한량이 없다. 그래서 다시 밭으로 갔다. 떨어진 여주라도 다시 보고 싶어서였다. 실은 그 껍질의 오톨도톨한 모습이라도 잘 담아놓자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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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자세히 봐야 보인다'는 이치를 다시 깨닫게 되었다. 이미 그자리에는 떨어진 여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자연의 역사는 잠시도 그대로인 것이 없고, 촌각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에 압도되어서 다시 그 풍경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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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어진 과육이 뒤집혀지는 모습도 진풍경이었다. 열매가 익어서 화들짝 벌어지는 것은 여주 외에 또 있을까 싶었다. '박과'라니까 호박이나 오이나 조롱박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하는 짓은 전혀 다르다. 겉보기에는 오이나 수세미를 닮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갸들은 절대로 익어도 벌어지는 법이 없다. 그냥 씨앗을 감싸고 있을 뿐.

굳이 찾아본다면 밤이 있기는 하다. 밤은 익으면 껍질이 벌어져서 씨앗(밤)을 떨어트리긴 하니깐 말이다. 그래서 또 깨닫는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안 보인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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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쪽도 궁금해서 들여다 본다. 그런데 하얀 솜털이 보송보송 피어나고 있는 모습에서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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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덩굴에 매달린 모습은 이러하지만 땅에 떨어진 쪽에서는 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까...... 파리도 아닌 것이 처음보는 녀석도 열심히 감로수를 빨고 있다. 자칫하면 그냥 '못 따먹어서 아깝다'는 생각만 남기고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장면이었는데 이렇게 들여다 보니까 또 하나의 신세계가 열리고 있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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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떨어진 여주에서 곰팡이가 핀 것은 이미 봤다. 그런데 90mm마크로 렌즈로 들여다 보면 그 안에는 또 하나의 우주가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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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아니, 열매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을 수도 있겠다. 포자(胞子)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게 맞지 싶군. 여튼, 까만 점들은 이미 여주의 즙을 먹고 배양이 되어서 결실을 보고 있다는 이야기이지 않은가. 참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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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참....."

이 장면에서 무슨 말이 필요하랴.... 그냥 감탄을 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장면을 보면 된다. 그리고 사진으로 담을 수가 있다면 더욱 행복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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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들여다 보고 싶은데 90마는 현미경이 아니다. 렌즈로 볼 수가 있는 한도까지만 허용을 한다. 자동초점(AF) 으로 봐도 양에 차지 않으면 수동초점(MF)으로 전환하면 조금은 더 다가갈 수가 있다. 그것만으로도 갈증은 많이 해소된다. 접사링을 챙기지 않은 것이 순간 떠올랐지만 이 정도라도 대략 분위기를 느끼는데는 충분하다. 다음엔 접사링을 챙겨야지.

접사링은 또 그만큼 더 다가갈 수가 있게 해 준다. 다만, 접사링으로 다가가지 못한 대신에 사진을 라이트룸에서 잘라내도 결과는 비슷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언제부턴가 접사링에 손이 가지 않는 현상이 생기긴 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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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지 않은가? 낭월은 이러한 모습에서 생명력의 환희와 같은 것을 느끼는 모양이다. 내가 먹지 못한 한 알의 여주에서 이러한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고 신가할 따름이다. 뇌 안에 있다는 뉴런의 구조를 여주에서 피어난 흰 곰팡이를 보면서 인식을 할 줄은 또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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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최대한 이미지줌으로 당겨본 모습이다. 컴퓨터에서 크롭을 해서 본 그림이다. 세상 어느 꽃밭에 비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흰곰팡이 화원(花園)이다. 피어나는 꽃은 새하얗고, 결실이 된 꽃은 새까맣다. 그 중간의 상태는 갈색이구나. 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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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당겨본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한계이다. 이보다 더 확대하면 그림이 뭉개져서 오히려 부작용이 발생한다. 뭐든 적당(的當)해야 하는 법이다. 선명하게 보이는 여덟개의 포자들이 꽃송이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서 예상을 초월한 곳에서 경이로움이 일어나는 모양이다. 이름은 그냥 '흰곰팡이'라고 부를 밖에 더 아는 지식이 짧은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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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팡이의 균사(菌絲)는 여주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해서 확장해 나간다. 실처럼 뻗어 나가면서 계속해서 꽃이 핀다. 에너지가 공급되는 한은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가늘디 가는 실가닥에도 에너지가 배달되는 경로가 생생하게 활동하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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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알이 맺혀 있는 구슬은 영롱한 수정목걸이이다. 어쩌면 새벽에 내린 이슬방울일 수도 있겠다. 하얗게 맺힌 동그란 진주알은 꽃봉오리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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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부가 포화상태가 되니까 자꾸만 밖으로 뻗어나간다. 어디에 있다가 온 것인지.... 포자가 되어서는 또 어디로 가는 것인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그냥 허공중에 바람과 함께 떠다니다가 인연처를 만나면 다시 자리를 잡고 번식하겠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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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이들의 활동으로 죽은 것이 분해되고 다시 흙이 되고, 그리고 또 다시 피어나게 되는 것일게다. 문득 옛날 역학동(易學同)시절에 한 회원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숨은 실력자들'

식물에서도 동물에서도 미생물이 아니면 존재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었던 기억이 되살아 난 것이다. 과연, 숨은 실력자들이다. 심지어 사람조차도 유산균 미생물들이 없으면 생존을 할 수가 없단다. 음식을 먹어도 분해하는 것은 이 아이들의 몫이라고 했고, 이 아이들이 활동하지 않으면 생존은 불가능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참으로 놀라웠는데 지금 이 장면에서 다시 그 이야기가 떠오르면서 경이로움에 압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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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킨 실타래 같은 곳에서도 나름의 질서는 있을 게다. 혼돈은 질서와 통하고 질서는 다시 혼돈과 통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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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랗게 하나의 독립된 구(球)도 검고, 분리된 8개의 구도 검은 것은 또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 것인지 알 방법이 없다. 마늘도 통마늘도 있꼬 쪽마늘도 있으니깐.... 싶은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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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수 있을 적에 실컷 봐야 된다. 다음엔 이렇게 되도록 놔두지 않을 거니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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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풍경은 자꾸 봐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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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다시 여주의 껍질에 눈길을 준다. 이미 흥미로운 풍경을 본 다음에라서 그 신기함은 반감되었지만 여하튼 익은 여주의 피부도 신기한 것은 사실이다. 어쩌면 이렇게도 좁쌀만큼의 평면도 용납하지 않은 것일까..... 하늘의 뜻은 신기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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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을 찾았다. 결국 여주의 목적은 곰팡이에게 밥을 주는 것에 있지 않았을 터이다. 결실이 어딘가에 이뤄졌을텐데.... 싶었다. 그리고는 다소곳하게 다음 대를 기다리는 녀석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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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빨간 것은 씨앗을 싸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동물로 치면 양수막이었다는 것이다. 이미 씨앗이 빠져나와서 정확히 알아 볼 수는 없었지만 짐작만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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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도 참 묘하게 생겼다. 심을 적에는 그냥 여주 씨앗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이렇게 여주 안에서 나타나는 모습은 새삼스럽다. 그러고 보니까 씨앗의 옆구리도 오돌도돌하잖여. 그것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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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장가리로 살살 뒤적거려서 씨앗을 끄집어 냈다. 뭐같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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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사 거북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문양이 외 필요했을까? 호박씨나 박씨나 오이씨는 깔끔하기만 한데 참 기묘하게 생겼군. '뭘 상상하든 그 이상'이라고 하는 광고카피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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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연지님이 기다리는 것이다. 내년 봄에 다시 싹을 틔우도록 배려를 할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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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이 하도 신기해서 자꾸만 바라보게 된다. 그나저나 다음엔 반드시 시간을 놓치지 말고 제대로 익은 여주를 나무에서 수확해야지. 그래서 맛있는 쥬스를 맛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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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내로 익을 녀석에게 다시 눈길을 준다.

이상, 여주의 「낙과이후(落果以後)」에 대한 보고서였다. 곰팡이들이 하루 사이에 어떻게 변화하고 있을지가 궁금한 마음에, 어서 날이 밝아지기를 기다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