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장수] 논개사당

작성일
2019-11-09 08:08
조회
1051

[전북장수] 논개사당(論介祠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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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사당이 전라도 어디에 있다는 이야기만 봤다. 이미 진주 촉석루에서 논개사당을 봤었고, 의암에도 내려가 봤었다. 그게 몇년 전이었던지..... 가물가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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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봤으면 몰라도, 봤으면 그냥 지나칠 낭월이 아니다. 일부러 올 곳은 아니더라도 그냥 지나칠 곳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바로 '우회전'을 외쳤고, 차는 논개사당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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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봉샘에서 출발을 할 적에는 오늘 일정은 다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논개사당」이라는 안내판을 발견하고는 일정표에 하나를 더 추가하게 되었다. 그게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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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사당이 생각보다 큰 규모에 살짝 놀랐다. 시간은 늦었고, 관림시간은 오후 5시까지라고 되어 있었지만 아직 문은 닫히지 않아서 부지런히 사당을 향해서 걸어야 했다. 문이 닫히면 오늘은 더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관리하는 형태로 봐서 그냥 문을 열어두지는 않을 것으로 보여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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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월은 바빳지만 벗님은 바쁠 필요가 없다. 천천히 안내문을 읽으시면 된다. 그녀와 이번 생을 마감한 사내는 게야무라 로꾸스케((毛谷村六助))였구나. 처음 보는 이름이다. 그냥 왜장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알아봐야 쓸모는 없지만 그래도 알면 뭔가 정리가 된 듯한 느낌을 얻게 된다. 그렇다면 게야무라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궁금증의 실타래는 이렇게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곳으로 풀려나간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다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넣지는 않을 요량이다. 벗님이 궁금하다면 저 여섯 글자의 이름을 검색기에 넣으면 소상하게 나오는 자료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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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월은 기록된 역사는 절반만 믿는다. 물론 전혀 황당한 조작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전설과 신화도 포함해서이다. 뭔가 바탕이 되어서 단청이 된 이야기로 전해진 것일 가능성이 많다는 정도로 살펴본다. 어쩌면 조선왕조실록은... 80%는 사실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 본다. 역사서에 기록된 내용은 보나마나 승자기록(勝者記錄)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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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서도 가장 딱한 모습으로 변한 의자왕이 안쓰럽다. 그의 궁녀가 3000명이었다는 것부터가 황당한 날조일 것으로 보이지만 아니라고 할 수도 없으니 그것을 캐려고 낙화암에 배어있을 혈흔의 DNA를 추적할 마음은 없다. 증거는 없지만 짐작은 할 수가 있는 까닭이다. 여하튼 침략자는 당위성을 만들어야 하고, 그 소재로 최상의 가치가 있는 것은 패국의 왕을 제물로 삼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사마천이 사기에 기록한 내용조차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보다 사실적인 의미를 알고 싶어서 해당 자료와 연관이 된 흔적들을 찾아보기도 하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말기도 한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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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마지막에 살았었다는 이유로, 궁녀였다는 이유로 죽음을 맞이한 여인네를 위한 사당은 궁녀사(宮女祠)에 모셔서 기념하고 있으니 이또한 슬픈 애혼들에 대한 위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20191109-20181227_213604[출처: https://blog.naver.com/ejhyun20/221430816287-아랑낭자 초상]


그런가 하면 머슴에게 겁탈을 당하고 목숨을 끊은 아랑낭자는 밀양의 전설이 되어서 영남루의 아랑각(阿娘閣)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도 이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또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세월과 운명의 수레바퀴는 서로 다른 흐름을 갖고서 만나 삶을 연주하는 것이 분명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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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처녀를 위한 사당도 있다. 영주 부석사의 선묘각(善妙閣)에 있는 선묘낭자는 산동 사람이었는데 의상대사에게 반해서 평생을 옆에서 모시겠다고 했다가, 새벽에 신라로 도망치는 것을 보고는 죽어서라도 함께 하겠다고 물로 뛰어 들었단다. 그녀도 또한 채 피지못한 삶으로 이렇게 추모하고 있으니 천수를 누리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일까? 논개를 생각하다가 보니까 이런저런 애혼들의 실루엣이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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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의 경우는 위의 여인들과는 확연히 다른 면이 있다고 해야 하겠군. 그야말로 나라를 구하겠다는 마음으로 이승을 하직했으니 그 의기(義氣)를 기려서 마땅하다고 하겠다. 그래서인지 논개사당의 바깥을 넉넉한 공간으로 넓게 다듬어 놓은 앞마당에 어둠이 찾아든다. 실제의 빛이 너무 어두워서 잘 보이도록 라이트룸의 신세를 져서 밝게 했다. 사진의 좋은 점이 또 여기에 있다는 것을.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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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가 웬만한 서원보다 큰 모양으로 구색을 갖췄다. 외삼문(外三門)이 아직은 열려 있어서 다행이다. 물론 닫혀있다면 그냥 사진만 찍고 돌아설 요량이었기는 했지만 고맙게도 시간에 맞춰서 닫지 않은 것은 인연이 있음이라고 나름대로 해석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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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의 기념관은 아직 불이 켜져있다. 퇴근하기 전인가 보다. 또 오른쪽에는 작은 비각이 있는데 너무 어두워서 들여다 봐야 보이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생략했다. 일삼아서 찾아갔다면 기념관도 들려봤을텐데 지금은 지나는 길이기도 하고 시간도 너무 늦었다. 궁금증을 해소한다고 남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은 마음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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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을 재촉하는 길에도 짐시 몸을 틀어서 비각의 자태는 담아 둔다. 기둥에는 오랜 세월이 묻어난다.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촉석의기논개생장향수명비)

촉석루에서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 기생 논개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 이름을 새겨서 세우는 비

비에는 이러한 글자가 새겨져 있다.(검색하면 다 나온다.) 그러니까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알려주고 있는 비석이기도 하고, 이 비석이 있어서 그러한 사연을 알 수가 있게 된 비이기도 하다. 무엇이 선후인지는 알 수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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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의 삼문은 계단을 올라가서 만난다. 하나, 둘... 21계단이구나. 왜 21계단이나면 논개의 나이가 21살이었을 적에 명을 다 했기 때문..... 이라고 하면 또 조사에 들어간다. 그리고 논개의 나이는 19세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니까 이것은 나이와 상관없군... 기왕이면 19계단을 쌓지 않고서(궁시렁궁시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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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삼문을 통과하니 다시 계단이다. 생각외로 넓직한 터를 마련했구나. 한 여인의 삶을 이렇게도 후대에서 기리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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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삼문 안쪽에 있는 문은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군. 절간이라면 불이문(不二門)이라고 하면 되지 싶은데 그럴 수도 없고... 그냥 이런 문이 하나 더 있다고만 해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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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충의문(忠義門)이었구나. 진작에 글자를 봤으면 괜히 무슨 이름을 사용하는지 검색하지 않아도 될 것을 시간 낭비를 했다. 모르면 시간이 물처럼 흘러간다. 그래서 많이 알아둬야 한다는 것을 다시 또 새겨둔다. 왜냐하면, 검색을 하는 사이에도 인생은 흘러가기 때문이다. 잠시도 멈추지 않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삶의 시계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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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사당이 모습을 드러낸다. 가을이 깊어가는 소식은 사당 뒤의 나무들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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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의 현판에는 의임사(義巖祠)라고 써놨고, 글을 쓴 사람은 함태영(咸台永)이란다. 이름을 검색해 보면, 1872년에 함경북도 무산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라고 적힌 이력을 간직하고 있다. 아마도 같은 사람이라면 말이다. 부통령을 역임했단다. 을미년(乙未年) 초추(初秋)에 썼다는 말로 보인다. 을미년이라면 1872년 이후의 을미년일테니까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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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도는 임신(壬申)이었군. 그후로 을미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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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을미년은 1895년인데 나이로 치면 23세이다. 이렇게 일찍 논개의 사당에 현판을 썼다는 것은 좀 어색하다.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를 알아보자. 왜냐하면 다음의 을미는 1955년도가 되는데 그 후에 사망했다면 두번째의 을미년이 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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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사망은 1964년이니까 낭월의 예측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 현판은 1955년도, 그러니까 낭월이 태어나기 2년 전에 쓴 글씨라는 것도 알겠다. 뭐, 이딴 것을 알아서 뭘 하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고 낭월도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이렇게 뒤져보고 있다. 그냥 지식놀이이고 상식게임이다. 함 선생의 나이가 83세에 썼다는 말이구나. 어쩐지... 글자의 필획에서 삶의 노련함과 진득함이 배어 있더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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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을미초(乙未初)까지는 확실한데 그 다음의 글자가 확실하게 가을추(秋)인지는 단정하기 어려워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자리에 들어가야 할 글자는 춘하추동(春夏秋冬)의 네 글자 밖에 없다. 그 중에서 가장 닮은 글자를 선택하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것은 삶의 연륜이다. ㅋㅋㅋ

초추(初秋)는 그 뒤에 중추(仲秋)와 계추(季秋)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초추 대신에 맹추(孟秋)라고 쓸 수도 있다. 가을을 셋으로 나누면 되고 그 중에 첫번째의 달을 말하는 것이므로 음력 7월이고 절기로는 입추가 지나고서 다음 달이 되기 전에 썼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렇게 노는 것을 문자놀이라고 한다. 예능방송인 「옥탑방의 문제아들」에나 나옴직한 내용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각설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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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 열린 문 안에 단아한 논개의 영정(影幀)이 어둠이 물들어가는 시간에 방문한 낭월을 맞아준다. 비록 어둠으로 인해서 카메라의 감도는 32000으로 끌어올렸지만 그래도 윤곽이 보이는 것은 카메라의 공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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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영혼을 위로하는 의암사에 앉아서, 아니 서서 찾아오는 나그네를 반겨준다. 물론 실물과는 크게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기생의 역할을 했다면 외모는 일정 수준 이상이었을 것이고, 그러한 생각을 하면서 적당한 모델을 찾아서 초상에 투영시켰을 것으로 짐작해 본다. 영정은 누가 그렸을까?



[자료출처http://yhyun.cnu.ac.kr/photo/nongepyo.htm]


논개(論介 : 1574 ? ~ 1593 선조26년)


논개의 생애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광해군 13년(1621년)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 “논개는 진주의 관기(官妓)였으며 계사년에 왜적에게 진주성이 함락되자 논개는 촉석루 아래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들어 순국했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인조 3년(1625년) 이후 진주의 선비 정대륭은 그가 순국한 바위에「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새겼으며, 경종 2년(1722년) 진주에서는 명암 정식이 지은 비문으로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를 세웠다. 이후 정식은 당시 경상우병사 최진한에게 논개의 포상문제를 조정에 주청하게 하였으며, 이 결과 경종은 예조로 하여금 면밀히 검토하여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관기 논개를 의기(義妓) 논개로 호칭하게 하였다.


영조 16년(1740년) 경상우병사 남덕하는 왕의 윤허를 받아 진주에 「의기사(義妓祠)」를 창건하고 「의기논개지위(義妓論介之位)」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의암사적비」에는 비각을 건립하여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의 현판을 게시하였다.


정조 3년(1779년) 경상우병사 홍화보는 「의기사」를 보수하였고, 순조 23년(1799년) 진주목사 홍백순은 재건하였으며 고종 5년(1868년) 진주목사 정현석은 이를 보수하고 「의암별제(義巖別祭)」를 지내도록 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의기사에서는 매년 음력 6월 그믐 논개 제향을 봉행하고 있으며, 전라북도 장수군에서는 1956년 의암사(義巖祠)를 창건, 함태영 부통령의 친필 현판을 게시했다.


또한 그녀의 출생지라고 알려진 장계면 주촌리에 생가를 복원해 장수 군민들과 신안 주씨 종친들이 매년 음력 9월 3일 제례를 봉행하고 있다.


參考文獻 : 於于野談, 太常諡狀錄, 備邊司伸報, 晋陽誌, 長水縣邑誌, 長水郡誌(참고문헌:어우야담, 태상시장록, 비변사신보, 진양지, 장수현읍지, 장수군지)







이러한 기록이 전한다. 문자는 과거를 기록하는 최상의 방법이다. 오죽하면 인류의 역사를 문명(文明)이라고 할까? 문자로 밝혀지는 것이 문명이고 문자는 그림문자도 포함한다. 문자가 없었더라면 수년 전의 일인들 어찌 소상하게 알 수가 있으랴, 하물며 백년 천년 전의 이야기는 말해서 뭘 하겠느냔 말이지. 논개의 표준영정을 제작하게 된 이야기가 소상하게 밝혀진 글이 있어서 옮겨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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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논개영정을 제작한지 2년여의 산고 끝에 2007년 12월 27일 문광부 표준영정심의위원회에서 새로운 논개 표준얼굴로 최종 통과되어 2008년 2월4일 국가표준영정 제79호로 지정받았습니다. 


2006년 1월 진주시와 장수군은 논개의 고귀한 얼을 더 높이 선양하기 위해 논개 표준영정 제작작가를 전국에 현상 공모했습니다. 그 결과 7월 13일 고증과정을 거친 영정전문작가들의 작품 가운데, 제 작품이 최우수작으로 당선되고 논개표준영정 제작작가로 선정 발표되었습니다. 


그 후 논개영정을 새로 제작하여 7차례의 엄격한 문광부표준영정심의위원회의 심의를 통과, 표준영정으로 지정받게 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수차례의 얼굴 형태와 의상을 수정보완하였고, 그와 함께 13차례의 가체머리 수정보완과정을 거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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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영정의 얼굴은 신안주씨(新安朱氏) 용모 유전인자를 토대로 제작되었습니다. 저는 2006년 1월부터 주논개(朱論介)의 얼굴 특징을 찾아내기 위해 ‘얼굴 연구소’에 의뢰해, 신안주씨 여자의 얼굴 특징을 형질인류학적으로 분석했는데, 논개의 생장지인 장수지역(장수읍과 함양군 서상면, 전북지역 등)을 중심으로 신안주씨 문중을 촬영, 150여 군데의 얼굴을 계측 분석하여 신안주씨가 가지고 있는 동일형태의 용모 유전인자를 추출해 내어 논개에 가깝다고 판단되는 얼굴 모형을 찾았습니다. 


논개영정의 얼굴화장은 진수아미(螓首蛾眉) 미용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이 화장법은 족집게를 이용한 ‘뽑는 미용법’인데, 고대 여인들에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유행한 미용법으로, 진수아미는 넓고 네모반듯한 이마에 초승달 같은 눈썹인 여자 얼굴을 형용한 말로서, 오랫동안 이 미용법이 아름다운 여인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고구려 벽화의 여인상, 가락국기 김수로왕의 황후 허황옥 등과 조선전기 하연부인상, 운낭자상 등 조선여인들의 얼굴도 진수아미 미용을 한 경우가 많아 논개얼굴도 이 미용법을 따랐습니다. 


논개영정의 머리모양 고증은 출토된 변수(1447~1524)묘 목각인형 주악상의 머리모양, [호조랑관계회도,1550년경]와 관련서적 등을 참조하여 재현하였습니다. 


논개영정의 복식은 출토된 당시의 의상과 출토 목각인형 그리고 당시에 제작된 그림을 참고로 '고전복식전문연구소'에 제작 의뢰해 3차례의 논개의상 제작과 가체머리 고증 및 재현과정등 철저한 고증과정을 거치는 과학적인 방법이 동원되었습니다. 


논개영정 의상문양은 당시 유행하던 문양인 연화만초문사(蓮花蔓草紋紗)인데, 안동김씨 묘(1560년대) 출토복식과 변수(1447~1524)묘 출토복식을 참조하여 제작되었습니다. 복식은 거사일이 하절기인 점을 고려하여 여름복식으로 하였습니다. 


논개영정의 옥가락지 고증은 “왜장을 유인하여 열손가락에 힘을 다해 껴안고 함께 강에 투신했다”는 내용의 여러 고문헌 관련기록들을 참고하였습니다. 


논개영정의 표현기법은 조선시대 전통영정기법으로 제작되었는데, 비단(畵絹)이라는 독특한 재질을 살려내는 배채법(北彩法)과 육리문법(肉理紋法)등을 활용하고 머릿결은 적선법(積線法)으로 표현하여, 얼굴표정에서 배어나오는 전신사조(傳神寫照)와 정치하고 부드러운 질감이 잘 나타났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논개영정의 표정과 자세는 의기에 찬 모습으로 열 가락지를 끼고 투신순국을 위해 왜장(毛谷村六助)을 향해 가려고 하는 자세로 설정했습니다. 자세는 적장을 향해 가려고하는 자세이기 때문에 시각적 동선의 흐름에 변화를 주어 역동적이고 힘찬 모습으로 표현하려고 하였습니다. 논개표준영정은 가로110cm, 세로 180cm 크기의 비단바탕에 천연채색으로 된 정면 전신입상입니다.







논개영정은..


1960년 의기사가 중건된 이후부터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가 그린 논개영정이 봉안되어 왔으나 고증결과 복식(服飾)과 머리모양 등이 시대와 맞지 않아 논란이 되어 오던 터에 진주시와 장수군은 논개의 얼을 선양(宣揚)하기 위해 전국에 현상 공모 과학적인 고증(考證)을 거친 영정전문작가의 작품을 선정, 공동으로 제작하여 2008년 2월 4일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국가표준영정(國家標準影幀) 제79호로 지정(指定)받아 2008년 5월 23일 기존 영정과 교체 봉안하였다.


본 영정은 충남대학교 석천(石川) 윤여환(尹 汝煥) 교수의 작품으로 조선시대 전통 영정기법으로 제작되었으며, 비단이라는 독특한 재질을 살려내는 배채법(背彩法)과 육리문법(肉理紋法) 등을 활용하여 얼굴 표정에서 배어 나오는 전신사조(傳神寫照)로 표현하였다. 표정은 의기에 찬 모습이고, 자세는 순국을 위해 왜장을 향해가는 역동적이고 힘찬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논개 표준영정은 가로110㎝, 세로 180㎝ 크기의 비단 바탕에 천연채색(天然彩色)으로 된 정면 전신입상(全身立像)이다.







그냥 힐끗 보거나, 정성스럽게 보거나 간에 그 안에는 또 이와 같은 사연들이 깃들어 있는 한 점의 영정이라는 것을 생각하기는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사진이라도 한 장 있다면 어려울 일도 아니었겠으나 상상으로 그리려니까 많은 전문가들이 모여서 의논을 수없이 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해본다.

내용 중에서 글씨의 색이 바뀌지 않아서 들여다 보니까 그림으로 써넣은 글씨였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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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를 찾을 수가 없어서 그림으로 만들어서 넣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래한글에서 해당 글자를 찾아서 텍스트로 만들었다. 웹브라우저에서 확장한자를 지원하고 있음에도 예전에 만들어진 문서는 그대로인 까닭이다. 이러한 것도 디지털 역사의 한 조각이다. 「이 문서는 확장한자를 지원하기 이전에 작성된 것」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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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영정을 어둡게 보정한 것은 그 안에 낭월도 포함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 그렇게 해서 반영된 실루엣에는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 머리 허연 영감이 함께 포함되었다. 영정은 움직이지 않는 그림이지만 이렇게 뭔가를 추가함으로 해서 생명력을 불어 넣을 수도 있는 것이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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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의 눈높이에서 앞을 본다. 경치가 좋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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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 문을 나가보고 싶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문을 나가지 않아도 자유로운 영혼은 언제나 마음만 내키면 어디든 다녀 올 수가 있을테니 이것조차도 관찰자의 영역에 갇혀서 해 보는 상상이라는 것도 생각하면서 걸음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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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에 들러보기는 처음이 아닌가 싶다. 뜬봉샘의 인연으로 이렇게 발자국을 남기는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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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월이 외삼문을 나오자마자 관리자가 얼른 나와서 문을 닫는다. 때늦은 방문자가 편안하게 둘러보고 나가기를 기다렸다는 생각을 하니 이것도 민폐였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관리실에서 모니터를 보면서 얼른 안 나가고 뭐하나.... 싶은 생각도 했지 싶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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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다 본 의암사의 외삼문은 굳게 닫혔다. 이렇게 해서 그 관리자도 오늘의 일과를 마무리 했구나. 그러니까 웬만하면 업무를 보는 시간에 방문을 해야 하는데 말이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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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그네는 떠나갑니다. 편히 쉬세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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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사 앞은 연못을 만들었다. 군민들의 산책을 위한 공간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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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에 사는 사람들에게 논개사당은 나름대로 자랑거리가 되지 싶다. 하늘의 노을이 빠지기 전에 사진을 찍었으면 더 예쁠텐데 그 시간이 지나서 밋밋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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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또 다른 밝은 날에 장수를지날 기회가 된다면 천천히 둘러봐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논개사당의 나들이를 마무리 했다. 논개의 생가도 있으니깐. 그리고 한 장 얻어 온 논개사당에 대한 안내문서를 이제서야 찬찬히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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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의 앞면과 뒷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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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아 샆에 새겨놓은 돌의 시를 옮겼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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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영정 79호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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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도 참 기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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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이 들어간 안내문이다. 그런데 특이하게 사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지. 그래서 자세히 들여다 본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사주이기도 하다. 이른바 사갑술(四甲戌)사주이다. 1574년 9월 3일 밤이란다. 밤이면 술시(보다 해시가 더 가깝지 않을까? 누가 술시(19~21)라고 하지? 술시라면 저녁이라고 하거나, 밤이라면 해시(亥時-21시~23시)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은 들지만 그것을 확인할 방법은 없지 싶다.

영조의 사주도 같다는 것으로도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한다. 그래서 영조의 자료를 찾아본다. 뭐든 확인을 할 수 있는 것까지는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조사를 해도 명확하게 나오지 않으면 비로소 카더라통신을 의지할 수밖에 없으니 이때는 출처가 카더라통신이라는 것을 밝혀야 하는 것도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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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조가 그 영조가 맞다면, 조선시대에 영조는 한 사람일 테니까 당연하겠지만, 그의 출생연도는 1694년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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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술년이 맞구나. 왕의 생일이야 틀림이 없으리라고 봐서 기준을 삼는다. 영조의 사주는 갑술년생이 맞는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논개의 출생연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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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가 필요하지 싶어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나온 것임을 밝힌다. 여기에는 출생일은 잘 모른다고 했고, 사망일은 1593년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19년을 빼면 되는 것이겠지. 보자.... 그렇게 하고 보니까 1574년이 된다. 그래서 1574년은 무슨 년인지를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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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그해도 갑술년이었구나. 그러니까 한 갑자(60년) 이전에 태어난 논개라는 이야기였다. 보통 말하기는 한날 한시에 태어났다고들 하기도 하는데 이점에 대해서는 한갑자를 건너서 태어난 것이므로 둘 사이에는 60년의 시간적인 거리가 있다는 것으로 정리하면 되지 싶다. 그러니까 사주가 같다고 해서 한날 한시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