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청도④ 전횡사당 치동묘

작성일
2019-10-09 07:23
조회
935

어청도④ 전횡사당(田橫祠堂) 치동묘(淄東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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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배가 고파도 타고 온 배가 떠나는 것까지는 봐야 한다. 내 배는 작은 배니까 조금 기다려도 되지만 큰 배는 지금이 아니면 떠나는 장면을 담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떠날 때는 배 안에 있기 때문에 떠나는 배를 어떻게 찍느냔 말이지. 그래서 기다렸다. 해군들이 보이는 것은 백령도에서 해병대를 본 것과 비교가 된다. 그러니까 어청도에는 해군이 주둔하고 있기 때문이고 백령도에는 해병대가 지키고 있기 때문이겠지....

연지 : 밥 먹어야지?
낭월 : 난 배가 가는 것을 보고 갈 테니까, 저기 양지식당 보이지?
연지 : 어디? 어 저기 이층집?
낭월 : 민박에 예약했으니까 내 이름을 대고 들어가서 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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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타고 온 짐들이 차에 실려지고, 이틀이나 결항으로 인해서 묶여있었던 여행객들은 모두 배에 올라서 목적지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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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등항해사 낭자가 어청도 매표소에서 판매한 표를 회수해서 바삐 뛰어가는 장면도 놓치면 아쉽지. 혼자서 열 일을 하는 것이 나중에 무엇을 하더라도 행복한 삶을 살지 않을까 싶은 덕담을 남기고 싶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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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두는 점점 고요해지고.... 배는 서서히 머리를 돌린다. 안개도 점점 걷혀간다. 이렇게 분 단위, 초 단위로 변화하는 것이 자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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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도 서서히 드러난다. 그러니 사진을 찍어놓지 않았더라면 조금 전의 그 긴박한 상황은 기억 속에서조차도 믿기지 않을 한 조각이었지 싶다. 텅 빈 선착장에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떠나는 어청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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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등대를 끼고 돌아가는 여객선이 지나간 물 위의 흔적이 점점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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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배가 자궁과 같은 부두를 빠져나가는 것까지 보고서야 발길을 돌렸다. 문득 자연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음을 생각해 봤다.

우주배는 은하수를 품고
은하수배는 태양계를 품고
태양계배는 지구를 품고
지구배는 산천을 품고
산천배는 어청도를 품고
어청도배는 어청항을 품고
어청항배는 선박을 품고
선박배는 나그네를 품고
나그네는 자신의 배를 품고
자신의 배는 영혼을 품고
영혼은 다시 우주를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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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민박의 208호가 우리의 보금자리였다. 통로 밖으로 나가면 어청항이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좋구먼. 미리 들어와서 짐을 풀어놓고 쉬던 연지님이 말해 준다.

주인 아줌마가 전망이 좋은 방을 보여주셨는데 침대방이더란다.
그런데 조금 좁아서 온돌로 원핬다네.
주인의 성의는 알아주라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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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렴, 그러셨구나.  낭월은 아무래도 좋다. 방에 앉아서 밖이 보이는 것도 좋지만 그건 크게 개의치 않는다. 왜냐하면 문만 열면 되는데 방에 앉아서 게으름을 부린다는 것은 여행사진가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숙소를 잡을 적에 1만원을 더 받고 바다 쪽으로 묵으시겠느냐는 말에는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돈으로 라면이라도 사먹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어차피 방은 잠을 자는 곳이지 사진을 찍을 곳이 아닌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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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부터 먹었다. 메뉴는 정식이다. 든든하게 먹고는 즐거운 사진 놀이를 위해서 한숨 푹 자야 한다. 낮잠은 나머지 오후의 활동을 위한 배터리 충전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진을 찍는 시간도 10시부터 3시까지는 제외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니 그 시간에 낮잠을 자 두는 것은 여러모로 봐서 적절한 시간의 활용이라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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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절을 한 듯이 꿀잠을 자고서 오후의 일정을 진행하기 위해서 여장을 꾸렸다. 등대가 유명하다니 등대 구경을 가야 하는데, 등대는 5시 이후에 봐야 할 여정이다. 그럼 지금은 너무 이르지 않은가? 등대만 본다면 이르다. 다만 지금 나선 것은 「전설의 완성」을 위해서이다. 항구는 한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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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만 보면 절반을 본 것이고, 돌로 쌓은 축대까지 보면 전부를 본 것이라고 할 만하다. 어청도의 역사는 이 돌들 하나하나에 묻어있기 때문이다. 간단한 것은 콘크리트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무척이나 오래된 포구라는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는 또 뒤편으로 미룬다. 지금은 서둘러서 가야 할 곳이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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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참 맑다. 어청도는 물이 맑다더니 과연 맞는 말이구먼. 동해안의 여느 포구와 조금도 다르지 않는 모습이다. 마음도 맑아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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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님이 준비하고 나오기를 기다려서 치동묘를 찾았다. 어차피 치동묘는 등대로 가는 길에 있으니 두벌일을 할 것도 없으니깐. 가볍게 가도 된다는 낭월의 말만 믿고서 물병 하나 달랑 들고 나서는 순진한 연지님을..... 시간이 지나고 보니 미안터란....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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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어청도길을 걷는다. 식당의 이름이 장미구나. 문득 어청도의 최전성기에 파시(波市)가 열렸을 장면이 겹친다. 고깃배가 모여들고, 고기들이 모여들고, 상인들이 들끓을 적에 그들의 성욕을 해소하는 꽃녀들도 모여드는 것은 당연한 일일터. 식당의 이름이 장미인 것을 너무 확대했나? 그냥 마광수의 『가자, 장미여관으로』였나? 그 제목이 떠올라서 연결시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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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매달린 채로 나그네를 맞아주는 무화과 열매가 춰 보이는 것은 태풍 링링이 흔들고 지나간 흔적으로 인해서일 게다. 태풍의 피해는 원산도나 어청도나 매한가지였다. 나뭇잎들이 쏟아졌거나 그나마 매달린 것은 말라죽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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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손을 남기고자 하는 열정을 보라. 폭풍에 다 뜯긴 잎사귀로나마 광합성을 해서 이만큼 키워놨으니 이 위대한 자연의 힘을 새삼스럽게 떠올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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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에는 특이한 구조물이 있어서 눈길을 끈다. 생긴 디자인은 마치 방사능 구역을 알리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만든 이유는 있겠지만 볼록한 중심의 한 점을 표시하는 것이려니 싶기는 하다. 이런 모양은 첨 본다. 글씨가 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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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쓴겨..... 「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인가? 2010년 10월에 뒤는 지워져서 없는 건지 안 보이는 건지 모르겠고... 그 위에는 위치표시인 모양인데.... 125도 58분은 경도일테고... 위도가 안 보이네.... 그래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폰으로 위치정보를 담아왔기 때문이다. 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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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뭔가 속이 션하군. 북위 36도, 동경 125도 58분 50초.... 위치는 중요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나의 공간은 어디인지를 알려주는 까닭이다. 모처럼 사용한 「Geo Tracker」의 공덕이다. 이렇게 해찰을 하면서 가도 된다. 치동묘는 바로 옆에 있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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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의 다리에서 바라보면 쪼맨한 오막살이가 보인다. 알려진 것에 비해서 생각 외로 작다. 외연도에서 본 전횡사당과 비교하면 완전 오두막이다. 이 사진은 이야기의 완성을 위해서 다음날 산책길로 갔다 오다가 찍은 것이다. 또 행여나 정재성분의 벗님이 시간정보가 왜 다르냐고 하실까봐.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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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너머로 보면 바로 보인다. 외연도의 사당을 찾아가기 위해서 숲속의 가파른 계단길을 올랐던 것을 생각하면 고마울 따름이다.

[외연도의 전횡사당 이야기를 보지 못한 벗님을 위한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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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안내판 덕분에 누구라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겠다. 물론 치동묘에 관심이 없는 경우에는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기도 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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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문을 보면서 '행여라도 잠겨 있으면 우짜노....'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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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청도에서 맘에 드는 것 중에 하나가 상세한 안내판이다. 정확하게 현재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보여주는 것은 매우 잘 한 것으로 봐서 칭찬해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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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동묘의 내력에 대한 안내판은..... 성의가 없어 보인다. 글자가 뭉개져서 읽기조차 쉽지 않은 것을 보면 다시 만들어놨으면 더욱 돋보였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전설이라고 있는 한 자락의 전횡묘에 대한 대접이라면 이장님이 나서서 조금만 신경 쓰면 될 일인데 말이다. 어청도의 최고 실권자는 이장님이겠거니 싶어서 그 책임도 이장님에게 물어야 한다고 본다.

"이장님, 관리 좀 잘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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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실 수 있는 벗님은 읽어보시기 바란다. 아마도 관리자를 원망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이걸 어떻게 읽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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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문의 빗장을 밀면 열리게 되어 있고, 이미 빗장도 그냥 걸려있을 뿐이어서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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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치동묘(淄東廟)구나. 어느 사찰의 산신각만큼의 공간에 지어진 사당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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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사진을 두 장 넣은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벗님은 정재는 없고 편재만 있으신 걸로. ㅎㅎ 별것은 아니다. 스티로폼이 날아다니기에 치우고 다시 찍었다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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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의 규모를 가늠하려고 찍은 사진이다. 딱 요만한 크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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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淄東廟」이다. 왜 치동묘일까? 글자대로 풀이를 한다면 '치의 동쪽에 있는 사당'이 되겠다. 그렇다면 치(淄)가 의미하는 바를 알면 그 동쪽이라는 것은 쉽게 풀린다. 우리나라의 지명에서도 이 글자가 등장한다.

江原道 襄陽郡 降峴面 沕단어장 추가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물치리이다. 물치는 설악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대포항과 가까운 위치로 보면 될 것이다. 물치의 동쪽은 일본이 있으니 여기를 말할 리는 만무하고....

중국의 지명에 淄가 있는 것을 찾으면 된다. 그리고 예전에 중국 여행을 하면서 이 글자의 지명을 발견했었다. 임치(臨淄)였다. 임치를 검색하면 흔적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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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나온다. 제나라의 수도란다. 지금은 산동성의 작은 마을이지만 춘추시대에는 그 규모가 상당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치동의 치는 임치에서 온 것이고, 그 임치가 속해있는 제나라의 동쪽에 있는 사당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를 하면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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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경계선이다. 산동반도를 끼고 있는 제나라의 수도가 임치이고 황하강을 끼고 있는 매우 비옥한 토지를 소유하고 막강한 힘을 누려왔던 한 시대의 흔적이다. 제나라 사람으로 유명한 인물은 강태공인데, 그의 사당이 임치에 있으니 지나는 길에 들러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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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임치는 쯔보시의 한 구(區)로 사용되고 있는 지역명이다. 현재의 산동성 성도는 지난()이 되었지만 지명이 그대로 있다는 것은 한 번쯤 지나는 길에 들러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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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김에 군산항에서 석도행 배를 12시간 타고 밤새도록 달려서 임치나 구경하고 강태공 사당에 향이나 한 가닥 올리고 오는 건 어떨랑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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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외연도의 사당에서 우중충한 안쪽에 쓰러져가던 위패가 떠올랐다. 여기에서도 그렇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살짝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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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둡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름 격식을 갖춘 초상이 자리하고 있다. 분위기는 훨씬 낫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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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황사당에는 전횡의 초상화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치동묘를 세운 후 얼마 지나서
공주에 계신 스님이 꿈에 현몽으로 나타나
그길로 어청도를 찾아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초상화가 완성된 단계에 이르러
한쪽 귀를 그리고 나머지 귀를 그리던 중
갑자기 붓이 떨어지고 죽었다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는 이야기이다.

[지역정보보털 향토자원에서 옮김]

초상이 커서 단으로 모시지 못한 건지, 사당이 너무 낮아서 단에 모시지 못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초상이 먼저라면 사당이 너무 낮은 것이고, 초상이 나중이라면 앞으로 사당이 커지기를 바랐던 마음일 수도 있겠다. 초상을 그리게 된 동기가 재미있다. 꿈에 본 전횡을 그렸으니까 어쩌면 단 1%라도 실물과 닮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초상을 그렸는데 왜 갑자기 죽었을까....? 이게 중국식인가? 진시황제의 무덤을 만든 사람은 모두 죽였다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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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다 있는데? 한쪽 귀를 그리려다가 붓을 떨어트리고 죽었다는 말은 그냥 심심파적으로 전해지는 군더더기 설화인 모양이다. 어딘지 모르게 골격이 중국 사람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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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자.... 전횡도의 전횡 상과 닮았나? 사진이 너무 작아서 닮았는지는 구분하기 어렵군. 어느 스님의 꿈에 나타난 전횡의 모습이 동상에 남은 모습과 어딘가 닮았기를.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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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가로 놓인 상을 잠시 옆으로 옮겨놓고 온전한 초상을 사진으로 담았다. 이제 외연도와 어청도에 걸쳐서 있는 전횡의 전설이 정리가 되어야 할 마당이다. 그래야 마무리를 지을 수가 있겠군.

시작은 어청도가 맞지 싶다. 외연도에서는 배를 타고 동으로 오다가 외연도를 만났다는 말이 없는데 어청도에서는 그 말이 있기 때문이다.

전해지는 말 중에서 '어청도가 거울처럼 물이 맑아서 어청도'라는 이야기는 타당하지 않아 보인다. 거울처럼 맑은 물이 있는 섬이라고 하려면 명경도(明鏡島)라고 하던가, 경수도(鏡水島)라고 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래서 어청도와 거울같이 맑은 물이어서라는 말은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맑은 날에 항해를 하던 중에 갑자기 안개가 끼었다가 푸른 섬이 나타났다는 말이 더 공감이 가는 것은 조금 전에 어청도를 들어오면서 방파제와 충돌을 할 뻔한 장면과 겹치면서 고개를 끄덕여진다. 여하튼 어청도에는 전횡장군 일행이 찾아오던 이야기가 있는데 외연도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봐서 일단 어청도에 도착해서 좋은 일을 많이 하면서 영역을 넓혀서 외연도까지 그 영향을 입게 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가장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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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래된 나무 그릇이 옆에 있어서 뚜껑을 열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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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기가 담겨 있었구나. 오래된 흔적이 넘쳐났다. 봐하니 남원목기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목수가 나무를 잘라서 만든 것으로 보이는데 제사를 지낼 적에 사용하는 것이지 싶다. 전횡 일행의 이야기가 아무래도 허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잠시라도 다녀갔을 수도 있겠다는 일말의 여지는 남겨놔야 하지 싶다.

2016622_232576_4943[전북일보에서 가져옴]


전북일보의 기사에 의하면 아이언로드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청동기의 문화가 전횡의 일행을 통해서 전북 장수로 전해지는 여정이 있었을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전설은 실화가 될 수도 있겠다. 철의 길에다가 담양 전씨의 시조로 추정이 된다는 이야기까지 범벅이 되면 더욱 재미있어진다.  어청도가 안갯속에 잠기는 만큼이나 이야기도 안개에 감춰져 있으므로 진위는 논할 방법이 없지 싶다. 이렇게 해서 낭월의 여행에서 전횡에 대한 이야기도 마무리를 해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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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횡도를 갔든, 어청도를 왔든 그건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봐도 될 것이다. 중국도 역사왜곡에는 이골이 난 사람들이니까 어청도의 이야기로 전횡을 묻어버리기가 너무 아까워서 전횡도를 만들었을 수도 있고, 그냥 단순히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하기엔 콕 짚어서 '전횡'이라는 이름으로 남겨진 이야기들이 너무나 생생해서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이야기로 마무리하면 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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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닫고 합장했다. 격랑의 시대를 살다가 떠난 멋진 한 사나이에 대한 이야기였다. 항우와 유방의 싸움으로 인한 혼란의 시대를 살다가 떠난 한 영웅에 대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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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에서 배를 타면 석도를 갈 수가 있고, 석도에서 칭다오를 가다가 전횡도를 만날 수도 있으니 옛날에 전횡의 일행이 찾아왔던 외연도와 어청도의 뱃길로 스다오호가 운항하는 것은 또 무슨 우연일까 싶기도 하다.

전횡이 어청도에서 머물렀을 가능성도 있겠고, 그냥 전설로만 남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전횡의 자료를 찾다가 아래에 첨부한 내용을 발견했다. 내용 중에는 여말선초의 정도전과 이숭인의 전횡에 대한 시문이 있어서 함께 참고 자료로 옮겨다 붙여본다. 링크만 할 경우에는 원문이 삭제되면 찾을 수가 없는 까닭이다. 만약에 칭다오에 놀러 갈 기회가 있다면 전횡도를 둘러보고, 내친김에 임치도 둘러볼 씨앗을 한 알 심어 놓는다.




[참고자료: 역사상의 전횡과 문화상의 전횡]


[자료링크:글자가 깨어져서 원본이 필요한 경우 참고]

(내용 중에서 우리나라와 연관이 있는 부분은 청색으로 표시함)


歷史上的田橫和文化上的田橫

 

田横(前250~前202年),秦末狄城(今山東淄博高青县高城镇)人,在秦末起义中收复齐国故地,于秦二世三年(公元前207年)为齐相国,治国有方,后为齐王,在与汉王刘邦军队大战中退居山东半岛沿海及海岛,在刘邦称帝后因不齿降附称臣而自刎在洛陽附近,所率五百门士皆舍身殉义,事见《史记.田儋列传》。是为历史上的田横。

田横事件成为千古一叹,历代称举。世人慕田横及其门人义士气节,在其生平、足迹相关各地大量修墓竖碑、建庙立祠,其原所据山岛,遂称为“田横山”、“田横岛”、“呜呼岛”等;自太史公记传其事,且对其极高评价,赞之曰“田横之高节,宾客慕义而从死,岂非圣贤!”“海岛传声”。 历代文人騷客,不仅吟咏、传说,更对其崇奉祭祀,“传声”所至,不仅在我国内地及其沿海,而且远被海外。由此,历史上的田横,遂成为文化上的田横。

 

第一,悲悼田横的挽歌,成为后世换歌的先声。

崔豹《古今注》云:《薤露》、《蒿里》,哀歌也,出田横门人,横自杀,门人伤之而作悲歌,言人命如上露,易唏灭,至李延年分为二曲,《薤露》送五公贵人,《蒿里》送士大夫蔗人,使挽逝者歌之,呼为挽歌。今存田横门人挽歌甚为简约:《薤露歌》:“薤上露,何易晞。露晞明朝更复落,人死一去何时归?”《蒿里歌》:“蒿里谁家地?聚敛魂魄无贤愚。鬼伯一何相催促,人命不得少踌躇。”却被汉代人作为通用的挽歌,“使挽逝者歌之”,不知历代感动了多少人,并成为历代大量挽歌创作的鼻祖。

第二,田横及其五百士,成为历代文人诗文吟咏、感怀的对象,成为人生高节、大义的化身。唐代为诗文盛世,吟咏田横及其五百士者令人目不暇接。李白有“海上五百人,同日死田横;当时不好贤,岂传千古名”,“苏武天山上,田横海岛边”;杜甫有“永系五湖舟,悲甚田横客”;李涉有“纵使将军能伏剑,何人岛上哭田横”[;李玖有“六合茫茫皆汉土,此神无处哭田横”;韩愈有《祭田横墓文》,高评曰:“余既博观乎天下,歇有庶几乎夫子之所为……自古死者非一,夫子至今有耿光,跪陈词而荐酒,魂仿佛其来享”,表达了深切的尊重与悼念之情。宋代苏洵《六国论》,言春秋战国直至秦汉之养士为宾客,“皆天下俊杰”,即以“田横亦有士五百人”为所举大端之一。苏洵《拟孙权答曹操书》:“昔田横,齐之遗虏……不肯以身辱于刘氏。”感喟“与其受韩信之诛,岂若死田横之节也哉。”后世如明郑成功《复台》诗云“田横尚有三千客,茹苦间关不忍离”;清龚自珍《咏史》诗云“回横五百人安在?难道归来尽列侯”;赵翼《海上望台湾》诗云“当年曾比田横岛,今日重烦杨仆船”;他如明周璠《田横岛》:“山函巨谷水茫茫,欲向洪涛觅首阳。穷岛至今多义骨,汉庭谁许有降王。断碑卧地苔痕重,古庙无人祀典荒。识得灵旗生气在,暮潮风卷早潮扬。”清张铪《田横岛》:“刎颈见陛下,神归兹岛中。岛中五百人,心与二客同。孰死不归土,孤屿生白虹。六国争得士,市道相罗笼。食客号三千,见危几人从。乃知夫子贤,义高薄苍穹。薤露痛已晞,图画莫能工。我来寻遗迹,剑璏血晕红。吊古鬼雄多,怀抱纷横纵。泪洒秋涛上,大海起悲风。”清黄守湘《田横岛》:“螺堆一点望嶙峋,落落英风不可寻。四塞河山归日角,千秋义烈吊忠心。青峰碧血沦苍翠,大海生潮咽古今。太息田齐尚余此,咸阳宫阙几销沉。”清赵执信《田横岛咏古》:“骨换黄金赤骥雏,何烦绝海觅龙刍。但令和氏能知玉,谩道齐门总滥竽。食客三千两鸡狗,岛人五百一头颅。凭谁寄问重瞳子,死到虞兮更有无。”匡源《田横岛石砚歌》:“泗上亭长为天子,齐王东走沧海里。洛阳一召不复还,五百义士岛中死。碧血沈埋二千年,水底盘盘结石髓。割取云腴制砚田,温润不让端溪紫。广文韩君家岛边,一苇可航去咫尺。为言潮落鱼龙潜,始见岩根露平底。此时畚锸好施功,剥尽皮肤得肌理。隆冬亲往冒严寒,铲雪敲冰僵十指。磨之砻之粗具形,函封遥寄长安市。我与翰翁各得双,漆光照耀乌皮儿。故人高谊厚如何?绝胜琅玕与文绮。我闻岛上有残碑,旧迹荒凉迷故垒。惟余废井长莓苔,甃碧沈沈波不起。摩挲片石景遗徽,烈士风规深仰止。案头相对发古香。正合研朱读汉史。”

近代台湾诗人的部分相关诗作,仅《台湾诗选》 一书所收,即可列举数例:

施澐舫《和唐维卿五妃墓》诗:“城南遗冢傍芳祠,吊古凄凉范九池。鱼贯宫中留玉带,凤阳海外失金枝。千秋气压桃花庙,一代光争桂子碑。五百田横孤岛在,不教巾帼愧须眉。”

何敬臣《秋日谒延平郡王祠八首》之一:“投戈旧部久寒盟,痛哭神州一旦倾。两岛甲兵逾十万,固应雄略胜田横。”

邱仙根《台湾竹枝词四十首》之一:“自设屏藩瘴海滨,荒陬从此沐皇仁。将军不死降王去,无复田横五百人。”

蔡国琳(玉屏)《秋日谒延平郡王祠孝廉》:“长松盘空瘦蛟舞,败叶飒飒如秋雨。红墙一角暮云平,郑王祠宇昭千古。圣代褒封祀典崇,鼎新庙貌极穹窿。易名‘忠节’辉青史,俎豆春秋拜下风。太息前朝丁季造,只身欲挽狂拦倒。雄心虽说效扶余,比似田横栖海岛。焚罢蓝衫换战衣,鲸鱼到处碧波飞。滇南犹有嗣君在,闽事无成涕几挥!厦金两屿全师抗,舳舻千里谋北向。三军齐唱望江南,未许香焚孝陵上。九皋航海往来频,正朔犹存天佑春。退步洪荒开世界,天心亦似爱孤臣。相从文武多俊杰,余生草裹苌宏血。返日挥戈恨未能,幕府西台泪凄咽。由来烈母有奇儿,庭下寒梅挺古姿。可惜将星旋告霣,渡河宗泽恨终垂。大厦已倾支不得,长耳草鸡谶群识。窜身耻作陈宜中,力战何殊李定国。古木荒凉噪暮鸦,寺称‘海会’几年华?杜鹃血染王孙草,精卫冤含帝子花。记室鳞鸿绝命词,舍人苜蓿大哀赋。零丁洋里叹零丁,吮毫欲续文山句。人生忠孝本难全,移孝作忠可与权。瞿张所处堪伯仲,文肃吁恳荩疏传。同甫气豪有健笔,楹联字字胸臆出。我今瞻拜荐馨香,采风簪笔纪其实。辟地擎天伟绩彰,葵倾私慕民难忘。怒涛犹作灵胥恨,多少诗人吊夕阳。”

蔡国琳(玉屏)《延平王祠题壁八首,次何敬臣大令韵》:“生标‘忠节’没为神,瀚海风涛百战身。祖训一篇和泪读,田横岛上泣孤臣。”

陈昂《咏郑氏遗事四首》:“片石能容百万人,天遗图谶应袋闽。也知中国全归汉,妄托仙源可避秦。荒岛畬田登版籍,土酋番族杂流民。开荒绝胜田横岛,易世相传尚不臣。”

第三,在中国大陆沿海尤其是泛山东半岛与泛朝鲜半岛之间的海陆交通和海上交流网络,朝鲜入贡陪臣[按历代制度,海外属国国王为中国皇帝之臣,国王属下官员,对中国朝廷而言,不得称“臣”,而是“陪臣”。]多有吟咏田横者,说明田横信仰深入人心,作为一种文化现象,同样感染了海外文人(进而海外民间,详下)。

朝鲜贡使文人吟咏、祭悼田横的诗文,多题“呜呼岛”、“呜呼岛悼田横”等。按“呜呼岛”,唐代文献作写作“乌湖岛”,宋元后多写作“呜呼岛”,如元代朱善(1340年-1413年)有《望呜呼岛》.元明亦称乌湖戌,至清有南隍城、北隍城之分称。今见朝鲜贡使文人咏悼田横者,主要有明代郑道传(号三峰,1342—1398)《呜呼岛吊田》、李崇仁(号陶隐,1347—1392)《呜呼岛》、金寿恒《呜呼岛吊田横》等。

郑道传《呜呼岛吊田》:

晓日出海东,直照孤岛中。

夫子一片心,正为此月同。

相去旷于载,呜呼感吊衷。

毛发吊如竹,凛凛听英风。

李崇仁《呜呼岛》:

呜呼岛在东溟中,沧波香然一点碧。

夫何使我双涕零,祗为哀此田横客。

田横气槪横素秋,义士归心实五百。

咸阳降准眞天人,手注天潢洗秦虐。

横何为哉不归来,寃血自污蓮花锷。

客虽闻之将奈何,飞鸟依依无处托。

宁从地下共秋收,究明如丝安足惜。

同将一刎寄孤屿,山哀浦思日色薄。

呜呼千秋与万古,此心□结谁能识。

不为轰霆有所泄,定作(长虹)射天赤。

君不见,古今多少轻薄儿,吊慰同袍暮旧迹。

当年□马敢言非,大义堂堂白日辉。

草木亦沾周雨露,愧君猶食首陽薇。

另外,朝鲜高丽末期、李朝初期的权近(1352-1409,字可远、思权,号阳村),入朝航行在莱州海域时也同样写了哀悼田横的《过呜呼岛》:

   蒼蒼海中山,萬古浮翠色。

   觀者盡嗚呼,爲弔田橫客。

   一士足可王,擾擾多五百。

   天命已有归,人固难容力。

   苟得小者侯,犹可存宗祏。

   如何却自裁,以比经沟渎。

   死輕尙能堪,義重寧屈辱。

   田宗旣已亡,烏止干誰屋。

   欲報平生恩,殉身是其職。

   烈烈志士心,永與雲水白。

   至今有遺哀,凜凜秋氣積。

   山飛海亦枯,忠憤無終極。

   就是李崇仁陶隐、郑道传三峯这两位东国大诗人,还由于《呜呼岛》诗作,结下了恩怨纠葛。明成化年间,朝鲜人徐刚中作《东人诗话》,记曰:

   李陶隐、郑三峯齐名一时。李淸新高古。而乏雄浑,郑豪逸奔放,而少锻炼,互有上下。然牧老(拙按:牧隐,李穑,明代朝鲜著名诗人)每当题评,先李而后郑。一日,牧隐见陶隐《呜呼岛》诗,极口称誉。间数日,三峰亦作《呜呼岛》诗,谒牧老曰:“偶得此诗于古人诗稿中。”牧隐曰:“此真佳作,然君辈亦裕为之,至如陶隐诗。不多得也。”后三峰当国,牧隐屡遭顚踬,仅免其死。陶隐终蹈其祸。论者以谓未必非《呜呼岛》诗为之崇也。

第四,人们相信,田横集团并没有全部殉节遇难,尚有传世者。

尽管根据《史记》所记,田横及其门客义士都自杀殉身,但或者因《史记》记载并不完全坐实,或者由于田横信仰的传播而转为传奇,或者当年的田横部下大军确有海外逃生者,总之,至少人们较为普遍地相信,田横集团并没有全部殉节遇难,尚有远走天涯、逃生传世者。对此,不少史籍、史迹也有“佐证”。

至少关于五百义士的下落,二千年来,无论是史家记载,还是市井传闻,说法较多。归纳起来,约有五说。

1、在海岛自杀取义。《辞海》云“留居海岛者闻田横死讯,也全部自杀。”即此。徐悲鸿所作油画《田横五百士图》,采蹈海取义,乃自杀方式一种,可归于此类。

2、出岛之后取义。据《史记》:田横自刎后,汉高帝“以王者礼葬田横”,“既葬,二客穿其冢旁孔,皆自刭,下从之。高帝闻之,乃大惊”,以“田横之客皆贤”,“闻其馀尚五百人在海中,使使召之。至,则闻田横死,亦皆自杀。於是乃知田横兄弟能得士也。”据《正义》:“齐田横墓在偃师西十五里。”这就是说,田横墓、门客五百人之葬所,都不在原踞海岛上。

3、并未全部自杀,亦有逃生隐遁者。早在清康熙年间,就有马志泮《崂山逸笔·田横岛》记载:“有布商,囊金过田横岛,遇寇劫金去。方窘急间,忽一丈夫至,长髯修躯,仗剑决寇首,返金于商。商悚惶殊甚,丈夫云:‘勿虑,我田横义士蒿理先生也。’转瞬而去。”(清马志泮《崂山逸笔·田横岛》,见《崂山志大事记》第九章《艺文》。)今有人据《元和郡县图志》,认为田横的弟弟在田横死后,一直隐居在离田横岛不远的小鬲山里,这里三面绝壁皆百余仞,只有东南一道能够出人,是避世生活的理想环境,田横之弟能在此生活至老,也是一例。或谓小鬲峰北麓至今有一个鬲村(今连云港经济技术开发区中云办事处,现改叫隔村),村中多田姓人家,有可能是田横家族遗留在“小鬲山”的后裔。

 4、飘洋过海到美洲。“田横的五百壮士集体自杀是假的,其实他们已逃走了,而且据《三十八国游记》载,直到20世纪初,美洲大陆还有‘田人墓’的遗迹,‘田人墓’就是田横门人之墓。他们及其后代,曾有人回过山东。”

   飘洋过海到朝鲜半岛沿海诸岛。这在今韩国的外烟诸岛至今盛传。我们在朝鲜半岛外烟列岛的田横信仰中发现了线索。韩国民俗学者2006年6月2日在今属韩国忠清南道的外烟列岛的鹿岛做现场调查,82岁的李圭仁老人说:“那位老爷(田横),听爷爷辈的说,是从中国来的......”传说中,田横被描绘成岛民的救世主。田横是岛民们的守护神。

[청색 부분만 번역함]

파고가 넘실대는 바다를 건너서 조선반도의 바다와 인접한 섬의 무리가 있다. 여기에는 현재 한국의 외연군도에서 전해지는 전횡의 왕성한 전설이 있다. 우리는 조선반도의 외연열도에 있는 전횡신앙에 대해서 어떤 흔적을 찾고자 하였다. 한국민속학자가 2006년 6월 2일에 현재의 한국 충청남도에 있는 외연열도의 녹도에서 조사를 했는데, 82세가 된 이규인 할아버지가 말하기를 '그 전횡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할아버지때부터 들어왔는데 중국에서 왔다고 하더라.....'고 했다. 전설 중에는 전횡이 섬 사람들에게는 구세주로 묘사되어 있었으며 전횡을 그들의 수호신으로 삼고 있었다.

第五与田横有关的名胜古迹

1. 洛阳东田横墓。

唐代韩愈《祭田横墓文》,记其去东京洛阳,路经在洛阳东三十里偃师乡的田横墓,“因取酒以祭,为文而吊之”:

贞元十一年九月,愈如东京,道出田横墓下。感横义高能得士,因取酒以祭,为文而吊之,其辞曰:事有旷百世而相感者,余不自知其何心,非今世之所稀,孰为使余歔欷而不可禁?余既博观乎天下,曷有庶几乎夫子之所为?死者不复生,嗟余去此其从谁?当秦氏之败乱,得一士而可王,何五百人之扰扰,而不能脱夫子於剑铓?抑所宝之非贤,亦天命之有常。昔阙里之多士,孔圣亦云其遑遑。苟余行之不迷,虽颠沛其何伤?自古死者非一,夫子至今有耿光。跽陈辞而荐酒,魂仿佛而来享。

2.青岛田横岛。

青岛田横岛,在即墨东部海域的横门湾中,距岸3.5公里,为一东西狭长岛屿,总面积1.46平方公里,海岸线长8公里,今已辟为旅游度假区。

《北史》载:北魏时自称“百世忠臣,输诚魏室,家之国破”的杨喑,在其兄忤旨见诛和奸人投书恐吓后,伪作投水自溺,变易姓名为刘士安,初屏嵩山,“又潜之光州,因东入田横岛,以讲诵为业,海隅之士谓之刘先生。”按当时的光州之东的“田横岛”,即今青岛即墨的田横岛。北齐时今青岛即墨一带属长广郡,隶光州(治今莱州),北周与北齐同。隋初开皇五年光州改为莱州。可知在南北朝时期,6世纪,今青岛即墨田横岛即名“田横岛”。

明代曹臣,字荩之,歙(今安徽省歙县)人,于崇祯七年(1634年)甲戌游崂山后,作《崂山游记》,记载了明代中后期的田横岛及其田横庙、五百义士墓荒祀的状况:曹臣游毕崂山,友人谓:“足下远人也。田横岛远不百里,不乘兴吊之乎?”于是次日抵达田横岛凭吊田横。“于是,朗生先人具舟筏。明日骑而八十里,抵海滨曰山东,舟筏具待,风帆而前,筏橹而后,上下波头二十里,历岛门而至岛。岛门隘,其石门水怒,鬼神挟波要食,番舶具牲后渡,否则祸人。岛形椭纵长十里,横二里。”“访吊先生遗庙既五百义士冢,冢草艽艽,庙废无有。先足辽人,百家聚此成落,共祀先生,后以耿孔寇乱,防兵苦之,渐而鸟散,庙亦寻废,侍御公有意重建未果。”

清顾祖禹《读史方舆纪要》记田横岛,在即墨“县东北百里海中,去岸二十五里。中可居千余家,相传即田横与其徒五百人亡入海岛处。”

现在的即墨田横岛的相关介绍,一般称五百义士为在岛上殉节。如:“刘邦以王礼葬田横,并封二客为都尉。田横既葬,二客穿入墓穴内自刭,噩耗传来,留岛部属全部自杀。后人深感其义,收集遗骨,合葬于岛之西南部最高处,后称之为田横顶。义士合葬墓约3米,周约60米。现属青岛市重点文物保护单位。明万历《即墨志》载:岛上“旧有田横庙,今圮。”清同治年间,岛上尚有田横祠,不知圮于何时。现存石碑一座,系附圮于天后宫(已拆除)廊下的牌位,宋体字的碑文是:“齐王田横暨五百义士之位”,碑体高44厘米,宽19.5厘米,厚7.5厘米。盖为清末所立,或系齐王祠圮后移置于此。”

3.蓬莱田横山

蓬莱田横山,传为秦末齐王田横屯兵处,因以名之。距蓬莱城2.5公里,位于丹崖山西侧,登蓬莱阁四望,西部即是。因其位处渤海海峡登州一侧,亦称“登州岬”;又因其位于山东半岛极北端,故又名老北山。山上建有灯塔,与旅顺老铁山灯塔的连线,即为黄、渤二海分界线。田横山海拔72米,与丹崖山相联,山石亦呈赭红色。田横山东南坡现辟为田横纪念广场,立有“田横寨遗址”石碑、田横纪念柱、田横雕像、田横栈道等。广场列旗杆5根,上悬“田”、“齐”大旗。

4.渤海庙岛群岛乌呼岛,即今长岛县南、北隍城岛。

南、北隍城岛历史上长期合并称谓。唐称乌湖岛,宋后称呜呼岛,元明称乌湖戌,清始有南隍城、北隍城之分称。二岛陆地面积1.83平方公里,1个行政村,现有900多人。

清顾祖禹《读史方舆纪要》:“乌湖岛,府东北二百五十里海中。与大谢戍俱为伐东夷之要路。唐贞观十八年,征高丽,置乌湖镇,亦曰乌湖戍。二十二年,镇将古神感浮海击高丽,破之于曷山。曷山在高丽界,或作易山。《新唐志》:自登州东北海行,至大谢岛、龟歆岛、淤岛,而后至乌湖岛三百里。北渡乌湖海,至马石山东之都里镇二百里。东傍海壖,过青泥浦、桃花浦、杏花浦、石人江、橐驼湾、乌骨江八百里,乃南傍海壖,过乌牧岛、贝江口、椒岛,得新罗西北之长口镇。又过秦王石桥、麻田岛、古寺岛、得物岛千里,至鸭绿江唐恩浦口。乃东南陆行七百里,至新罗王城。自鸭绿江口舟行百余里,乃小舫溯流东北三十里,至泊灼口,得勃海之境。又溯流五百里,至丸都县城,故高丽王都。又东北溯流二百里,至神州。又陆行四百里,至显州,天宝中高丽王所都。又正北如东六百里,至勃海王城。五代唐天成初,契丹东丹王突欲居扶余城,盖在唐高丽扶余川中。长兴初,突欲以不得嗣立,越海自登州来奔,盖道出乌湖、大谢间。”

5.连云港云台山,原是田横岛。

该山岛至明末仍为岛屿,居于海中,因黄河改道致使海岸线演变,至清初与大陆相连,亦称田横崮,或称田横岗,上有田横将军墓、田横庙、五百壮士冢遗址。此亦颇有来历。

唐李吉甫《元和郡县图志》海州东海县“田横国”条:“齐王田广死,田横乃代立为王,与灌婴战于嬴下,横败走,与其属五百人入居海岛,即此也。”

宋乐史《太平寰宇记》记:“东海县,东水路九十里,依旧二乡。本秦末田横所保郁洲,亦曰郁洲,亦谓之四横岛,为贑榆县地。宋泰始三年,失淮北,于郁洲上侨立青州,即此地。”“废艾不城,在县北二十四里,今古相传,田横避难,汉使艾不追横而筑。后晋移贑榆县于此。”“田横固,在县东北六十一里小鬲山,孤峰特秀。三面壁立,俯临深溪,惟有东隅纔近人行,累石为城。《汉书》云:“齐王田广既死,田横代为王,与灌婴战于嬴下,横败。及汉定天下,横惧诛,与其徒属五百余人入海,居岛中。”此固即田横所营处也。”

清顾祖禹《读史方舆纪要》记“田横岛”云:“孔氏曰:田横所保,在海州东海县之鬲山,去岸八十里。非此山(按指即墨田横岛)也,今江南海州东小鬲山是矣。

田横岗(田横崮)至今古岗遗址尚存。当年的田横岛东西北三面俯临大海,绝壁深渊,无路可攀,不须设防,只在南面筑块石城墙,残存墙体长100余米,高低不等,城墙中间留一寨门,门前小道与南云台主峰相连。岗上分左、中、右、前四营寨,垒城防守,互为犄角,中营地处岗顶,俯视各寨,结构布局颇具军事匠心。左中二营寨之间的大青涧边,巨石砌垒成屋,前面平石为案,侧可见弧形灶穴,烟炱痕尚在。古岗正中有原“田横祠” 遗址,方志记载是田横将军庙,应是明代所建,遗址东侧有一被盗墓穴,相传系田横五百士为田横建造的衣冠冢。旁有一风化石碑,文字已模糊不清,残高1.4、宽0.71米。该碑正是张学瀚《云台山导游诗抄》中所记的清康熙四十一年(1702年)里人成俭立的《田将军讳横暨二客、五百义士碑记》,原在今朝阳镇新县西五里的小西山东侧,后被人迁移至此。在与田横岗隔山而望的南面山峰上,另有一岗,名艾不岗,留有人类据守的遗迹。艾不是刘邦大将,以追逐劝降田横而闻名。今江苏连云港市赣榆县罗阳乡还残存着艾不城遗址,据说是当年艾不追杀田横至艾塘湖畔,不敢过海上岛,为把田横及五百壮士困在悬居海中的郁州山(云台山古称)海岛上,在艾塘湖畔构筑起一座土城,后人称艾不城,并改艾塘湖叫艾不湖。



嗚呼島(오호도)-李崇仁(이숭인)


[다음의 나그네블로그에서 퍼옴]


嗚呼島在東溟中 滄波渺然一點碧


오호도재동명중 창파묘연일점벽


夫何使我雙涕零 祇爲哀此田橫客


부하사아쌍체령 기위애차전횡객


田橫氣槪橫素秋 壯士歸心實五百


전횡기개횡소추 장사귀심실오백


咸陽隆準眞天人 手注天潢洗秦虐


함양륭준진천인 수주천황세진학


橫何爲哉不歸來 冤血自汚蓮花鍔


횡하위재불귀래 원혈자오련화악


客雖聞之爭奈何 飛鳥依依無處托


객수문지쟁내하 비조의의무처탁


寧從地下共追隨 軀命如絲安足惜


녕종지하공추수 구명여사안족석


同將一刎寄孤嶼 山哀浦思日色薄


동장일문기고서 산애포사일색박


嗚呼千秋與萬古 此心菀結誰能識


오호천추여만고 차심울결수능식


不爲轟霆有所洩 定作長虹射天赤


불위굉정유소설 정작장홍사천적


君不見


군불견


古今多少輕薄兒 朝爲同袍暮仇敵


고금다소경박아 조위동포모구적


오호도는 동해바다 한복판에 있노니


푸른 물결 아득한데 한 점 새파랗구나.


무엇이 나를 울려 두 줄 눈물 흘리게 하나


다만 제 전횡과 그의 문객들 때문이로다.


전횡의 기개가 맑은 가을인 듯 시원하고


장사들이 심복한자 실로 5백 명이었다.


함양의 코 큰 한나라 고조는 하늘서 내린 사람


손으로 은하를 당겨 진나라의 학정 씻어버렸구나.


전횡은 어찌하여, 돌아오지 못하는가.


원통히도 스스로 자결하고 말았단다.


문객들이 그 소식 들었으나 어찌하지 못하여


나는 새처럼 주저하며 의탁할 곳 없었단다.


차라리 지하로 가서 서로 뜻을 쫒을 것을


실낱같은 구차한 목숨을 어찌 아끼리오.


모두 같이 목을 찔러 외로운 섬에 남겨져


산도 애달프고, 포구도 시름겹고, 지는 해도 지는구나.


아아, 천 동안 다시 만 년 오래도록


맺히고 맺힌 이 마음 누가 알아주리오.


뇌성벽력이 되어서 이 기운 쏟아내지 못하면


반드시 길게 뻗친 무지개 되어 하늘을 붉게 쏘리라.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고금의 다소의 경박한 아이들


아침에는 친구였다가 저녁이면 원수로구나


李崇仁(이숭인 1349~1392)고려 말의 학자.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 자는 자안(子安), 호는 도은(陶隱), 경산부(京山府-상주) 사람.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숙옹부승(肅雍府丞)이 되고 곧 장흥부사(長興府使) 겸 진덕박사(進德博士)가 되었으며 고려 문사(文士)를 뽑아 명나라에 보낼 때 수석으로 뽑혔으나 나이 아직 25세가 못 되므로 보내지 않았다. 김용구(金容九)·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북원(北元)의 사신(使臣)을 돌려보낼 것을 청하다가 한때 귀양 갔으며 다시 돌아와서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 전임하여 동료와 함께 소를 올려 국가의 시급한 대책을 논하였다. 그 후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어 정당문학(政堂文學)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실록(實錄)을 편수하고 동지사사(同知司事)에 전임하였으나 이후로는 친명파(親明派)와 친원파(親元派)의 모함을 받아가며 여러 옥사(獄事)를 겪었고, 조선 개국(開國)에 이르러 정도전(鄭道傳)의 원한을 사서 그의 심복 황거정(黃居正)에게 살해되었다고 전한다.